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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58)화 (158/164)

158화. 그 후의 이야기(1)

2021.09.06.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슈바르한에서는 이례적으로 날이 좋은 날이었고, 전쟁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날이기도 했다.

"설마 대공 전하께서 결혼하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결혼뿐이에요. 이미 혼인 서약서도 작성했고, 심지어 아들도 있다고 하던데요."

"아들이요?"

포푸리 남작 부인의 눈이 커졌다. 페이논 백작 부인은 재빨리 주변을 살핀 후, 목소리를 낮췄다.

"심지어 그 아들은요. 대공의 피가 안 섞였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럼 아이의 아빠는 누군데요? 설마 대공께서 다른 사내의 아이를 기르진 않겠죠?"

"그거야 모르죠.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여자가 보통이 아닐 거라는 거예요."

"얼핏 보기엔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포푸리 남작 부인이 말끝을 흐렸다.

"원래 순해 보이는 것들이 더 무서운 법이에요. 유력 가문의 가주들이 그 여자를 괜히 싸고도는 게 아니라니까요."

"싸고돈다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출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여자와의 결혼이 귀족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겠어요?"

"그건 그렇네요."

"그리고 이건 또 다른 소문인데 말이죠. 저 여자가 마법을 쓴다는 소문도 있어요. 짐승을 끌고 다니는 모습이 영락없이 마녀라고요."

"소문을 믿나요?"

"괜히 소문이 났……."

페이논 백작 부인은 말을 하다가 멈췄다. 조금 전 끼어든 건 포푸리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

"누구신데, 함부로 남의 대화에 끼어드시는 거죠? 대화를 엿듣는 건-."

"앞에서 하지도 못할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사람들보단 낫겠죠."

햇살 아래, 금발이 반짝거렸다. 웃고 있는 사내는 슈바르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로아킨 사람인가 보군요."

포푸리 남작 부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로아킨에 대한 평가가 예전보다 나아졌다 해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뿌리 깊은 불신은 여전히 존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펜리르 로아킨. 로아킨의 맹주입니다. 저번 달에 정식으로 자리를 계승 받았지요."

펜리르는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고, 두 부인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유난히도 선명한 녹색 눈이 꺼림칙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상대는 훤칠한 청년이었다.

"경께서 로아킨의 맹주인 건 알겠습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남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 것이 허락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목소리를 안 들리게 내셨어야죠."

"뭐라고요?"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계속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걸며 소문을 퍼트리고 계시더군요."

"……."

페이논 백작 부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펜리르는 느긋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눈매를 접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대충 알 것 같지만 적당히 합시다. 좋은 날이잖아요. 축하해주러 와서 그런 소리를 하고 싶으신가요?"

"저, 저는 그게……."

"아니면, 제가 대신 대공께 전해드릴까요? 여기 계신 부인들께서 새로운 대공비가 마음에 안 든다며 이상한 소문을 내고 계셨다고요."

펜리르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이미 두 부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 물론 농담입니다."

"……."

"……."

"맹주. 이제 대공께 인사드리러 갈 시간입니다."

"맞아. 그래야지. 대공을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얼른 가자고."

펜리르는 보란 듯 두 부인에게 웃어 보인 후, 몸을 돌렸다. 베르베는 몸을 돌리자마자, 단숨에 뒤바뀐 펜리르의 표정에 쯧쯧 혀를 찼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입을 놀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할 인간입니다. 왜 쓸데없는 일에 끼어드십니까."

"그러는 너는 왜 거짓말을 한 건데?"

"전 그냥 실연당하고 엄한 곳에다가 분을 푸는 사내에게 맞춰줬을 뿐입니다."

"하여간 잔인한 말은 잘도 한다니까."

"좋은 말로 해선 안 들으셔서 이러는 겁니다."

베르베는 새침하게 쏘아붙이고는 먼저 앞장서 걸어갔다. 펜리르는 베르베의 뒤를 느긋하게 쫓으며 주변을 살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는 슈바르한 대공의 결혼 소식이었고, 그만큼 많은 추측과 소문들이 불거졌다. 슈바르한 대공이 약탈혼을 했다는 이야기부터, 황가의 색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슈바르한의 친자가 아니라는 이야기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뜬 소문은 결국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펜리르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을 바라보며 웃었다. 세상을 뜨겁게 달군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오늘의 결혼식에서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슈바르한 대공 부부는 여느 연인들과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

"예쁘네요."

"너도 그런 소리를 할 줄 알아?"

"너도라뇨. 그거 무슨 뜻입니까."

베르베의 미간이 좁아졌다. 펜리르는 어색한 몸짓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봐. 슬슬 피로연이 시작되려나 봐."

"말 돌려는 속셈이 빤히 보이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일단 봐드리죠."

베르베는 대놓고 혀를 차며 펜리르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웃고 있으니 더 잘생겼네요. 맹주께서 상대가 안 될 만했습니다."

"실연한 주군을 위한 위로는 없는 건가."

"원래 세상은 패배자에겐 냉정한 법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보니 맹주께서는 좀 더 오래 마음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이셨거든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그래."

펜리르는 턱을 괸 채 입을 삐죽 내밀었다. 베르베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손을 팔랑거렸다.

"좋은 날이니 그만 떠들고 식이나 감상하시죠. 이렇게 화려한 파티는 좀처럼 보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만큼 돈을 쓴 거겠지. 아름다움과 돈은 비례하는 법이거든."

"하긴, 이 정도 규모라면 소맹주의 재산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겠죠."

"나도 못 벌진 않거든. 알잖아. 항구도 얻었겠다, 제국과 사이도 돈독해졌겠다, 점점 오아시스의 수도 늘어갔겠다 뭐 하나 돈이 안 굴어오기 힘든 구조가 되었다는 거."

"그걸 내준 사람이 대공 아닙니까."

"……."

베르베는 한숨을 내쉬며, 펜리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포기하기로 했으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인정하세요. 그래야 마음 정리가 제대로 됩니다. 내가 못 가졌다고 해서 상대를 깎아내리면 추해지는 법이거든요."

"……티 많이 났어?"

"네."

"하여간 네 눈은 못 속인다니까."

펜리르는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들썩거리다가 마주친 시선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향해 지어지는 미소에 결국 따라 미소를 지었다.

"맹주. 지금 표정 굉장히 바보 같으신 거 아십니까?"

"그래도 할 수 없지. 좋은 날이잖아. 좋은 날에는 웃어야지."

펜리르는 베르베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부디 행복하시길. 오늘을 위해 준비해둔 말을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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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람이 진짜 많네요."

"덕분에 기억은 잘 남겠지. 누가 누구와 결혼하는지 말이야."

"설마 그걸 노린 거예요?"

"아니라곤 못 하겠군."

카벨레누스는 웃었고, 알리시아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행복한 날이었다, 서로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날 정도로.

"다리는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요."

"힘들면 말해."

"진짜 괜찮으니까, 손님이나 신경 써줘요. 그리고……."

알리시아는 주변을 살피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케이크를 먹겠다고 갔어."

카벨레누스는 눈치껏 미카엘이 간 방향을 가리켰다.

"아까도 잔뜩 먹는 것 같았는데."

"데려오라고 해야겠군. 배탈이라도 나면 곤란하잖아."

"그게 좋겠어요."

알리시아는 사람을 부르려다가 멈췄다. 금발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예전에 봤던 신관님이네요."

"신관?"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발의 여자, 나탈리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나탈리."

"오래간만입니다. 대공 전하."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요. 누가 보내주신 초대장인데, 당연히 와봐야죠."

나탈리가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입던 신관복 대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입어보는 거라서 어색하네요."

"아닙니다. 잘 어울리십니다. 원래 드레스가 더 익숙했던 분 아닙니까."

나탈리 리아나드. 리아나드 후작의 외동딸이자, 차기 황태자비였던 여자. 카벨레누스는 모든 것을 잃기 전의 고귀했던 아가씨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좋아 보이셔서요."

"그동안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에게도 들키지 않았고요."

"……."

"그런 눈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는 벌을 받은 것뿐이니까요."

나탈리는 웃었지만 카벨레누스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앞으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만약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곳에 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예요."

"……."

"오늘 온 건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인사를 위해서이기도 하거든요."

나탈리가 두 손을 모으자, 그녀의 목에 걸린 팔찌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벨레누스는 눈을 찡그렸다. 그에게는 익숙한 팔찌였다.

"여행을 할까 해요."

"여행이요?"

"제 아버지는 선선대 황제의 끔찍한 실험에 동조했고, 선선대 황제 부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반역죄로 죽었죠."

"……."

"물론 제 옛 연인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고요."

"……."

"못된 자들이에요, 참.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자들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나탈리가 힘없이 웃었다.

"언제까지 제게 치유의 힘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힘을 쓰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고 싶어서 신전에 들어갔던 거였는걸요. 물론, 제가 생각했던 곳과는 달라서 제 뜻을 펼치기란 어려웠지만 이제는 아니잖아요."

"……당신이 한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눈 하지 마세요. 결국 이 또한 제 선택이니까. 저희는 각자 서로가 선택한 길로 가는 것뿐이에요."

나탈리의 시선이 알리시아에게 닿았다. 알리시아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웃었다.

"그거 알고 있나요? 신전이 사라지기 전까지 모든 결혼식의 끝에는 신관의 축복이 있었다는 거."

축하해요, 진심으로. 나탈리에게서 흘러나온 옅은 빛이 카벨레누스와 알리시아를 맴돌았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따뜻한 빛이었다. 예전, 거리낌 없이 그녀를 치유해주던 치유의 힘이 그러하듯.

"그리고, 이건 선물이에요."

"선물이요?"

"원래 첫날밤에 입는 속옷은 선물 받아서 입어야 행복하다는 미신이 있는데, 대공비 부부에게 그런 옷을 선물할 수 있는 간 큰 사람은 몇 없으니까요."

"……."

알리시아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나탈리는 낭랑하게 웃으며 상자를 기어코 알리시아에게 안겼다.

"선물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결혼식 이후의 첫날밤은 오늘이 될 테니까 괜찮겠죠?"

"아, 아마도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부끄러워하면서도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알리시아에 나탈리의 미소가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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