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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46)화 (146/164)
  • 146화. 내가 있어야 할 곳

    2021.07.26.

    "발버둥 치시는 모습이 퍽 귀여우시군요. 벌레보다 못한 목숨들을 살려보겠다고 아등바등 날뛰고 계십니다."

    헤르만은 일부러 자극적인 말들을 토해내며 두 팔을 벌렸다. 한계까지 끌어올린 힘이 넘치고 있었지만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몸이 망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절망감을 카벨레누스도 느끼길 바랄 뿐입니다.

    "지금쯤 슈바르한은 점령당했을 겁니다. 폐하께서 만든 실험체들은 전부 슈바르한을 향하고 있거든요."

    "……."

    "하지만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지요."

    짐승의 얼굴에서 대화나 표정을 읽을 순 없지만, 카벨레누스의 움직임은 아까보다 틈이 많이 보였다.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헤르만은 보란 듯 손톱에 묻은 카벨레누스의 피를 핥았다. 혀끝에 닿는 핏방울은 유난히도 달게 느껴졌다.

    "이제라도 제 앞에 무릎을 꿇으시면 봐드리지요. 스스로를 제물 삼아 모두의 목숨이라도 구하는 겁니다. 어때요?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지요?"

    완전히 끝이 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끝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카벨레누스를 통째로 씹어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카벨레누스에겐 같은 피를 이은 아들이 남아 있으니까. 무리해서라도 카벨레누스를 잡아먹어 몸을 회복시킨 후, 그의 아들을 이용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헤르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 순간에도 그는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제 몸을 채우고 있는 신의 힘을 온전히 손에 넣고 싶었다. 헤르만은 또 한 번 힘을 끌어올리며 거칠게 팔을 들었다. 그때였다. 거칠게 휘둘러지던 헤르만의 손도, 그리고 뒤로 물러서려던 카벨레누스의 다리도 그대로 멈췄다.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눈에 힘을 줬다.

    "……이게 무슨 짓이죠?"

    "……."

    카벨레누스는 이만 바득바득 갈 뿐이지 움직이지 못하는 헤르만을 가만히 지켜봤다. 처음에는 헤르만의 꿍꿍이라고 생각했는데, 당황스럽기는 헤르만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힘을 쓸 정도라면 위험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카벨레누스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입안에서 피 맛이 났다. 억지로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했다. 그녀의 옆을 지켜야 했다.

    [무리하지 말아요.]

    몸의 긴장이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단숨에 풀렸다.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길게 숨을 뱉었다.

    [알리시아.]

    [혹시나 했는데, 당신에게도 들리나봐요. 다행이네요.]

    [몸은 괜찮아? 이렇게 힘을 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괜찮아요. 예전에 비해 몸도 많이 좋아졌고요.]

    [……다행이야.]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마물에서 비롯된 자들은 다들 움직일 수 없을 거예요.]

    [비롯된 자? 그럼 실험체 모두가 멈췄다는 건가.]

    [아직 힘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래서 의도치 않게 당신도 포함된 거죠.]

    목소리에도 온기가 있는 걸까. 떨어져 있는데도 어쩐지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아 카벨레누스는 잠시 숨을 멈췄다. 뻣뻣했던 몸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이런 것도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카벨레누스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지금으로선 이 정도가 고작이에요.]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덕분에 일이 더 빨리 끝날 수 있게 되었거든.]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돌렸다. 자유를 되찾은 자신과 달리, 헤르만은 여전히 속박되어 있었다.

    [서둘러 오시지 않으셔도 되니까 무리만 하지 마세요.]

    [서둘러 가야지. 그대는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거든.]

    […….]

    [보고 싶어. 아주 많이.]

    [……저도, 보고 싶어요. 아주 많이.]

    수줍게 속삭여지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지금쯤 얼굴이 새빨개졌을 텐데. 그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슈바르한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그 대화를 끝으로 더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누그러졌던 카벨레누스의 눈매도 차갑게 식었다. 슈바르한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오지 마십시오!"

    "……."

    "제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아직 힘이 남아 있는데, 왜, 어째서……!"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헤르만의 가슴을 꿰뚫었다. 헤르만은 너덜너덜해진 가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아직 제게는 힘이, 커억!"

    그대로 목덜미를 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벨레누스의 손이 헤르만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프라임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헤르만의 몸은 외부 공격에는 빠르게 재생되었지만 반대로 스스로 낸 상처는 회복이 느렸다. 연결된 상태로 공격하면, 헤르만의 재생력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다.

    "크어어억, 컥!"

    그대로 심장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멈추지 않고 또 한 번 힘을 줘 심장을 터트렸다. 힘이 남아 있는 한, 헤르만의 몸은 계속해서 재생했다. 그를 완벽하게 죽이기 위해서는 더는 재생할 여력이 남지 않게끔 만들어야 했다.

    "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날카롭게 방 안을 울렸다. 하지만 죄책감이나, 동정 같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재생하는 심장에 그저 긴 시간이 될 것이라는 걸 예감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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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카벨레누스는 차갑게 식은 시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손안에서 쿵쿵 뛰던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바닥에 피가 찐득하게 묻어났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마비된 후각은 이미 피 냄새에 익숙해져 있었다.

    [목숨 한 번 질기군요.]

    "……."

    카벨레누스는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다. 외면하려고 해도 짐승처럼 예민한 청각은 가냘픈 숨소리를 알아차렸다.

    [어설프게 붙어 있는 목숨이라 더욱 고통스러울 겁니다. 지금쯤이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하지만 저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이젠 반항 한 번 하지 못하는 상대였다. 죽이는 건 아주 쉬웠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동도 없이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제 형제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당신이 가장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리고 마지막까지 고통 속에서 죽는 편이 당신에게 어울리는 최후니까요.]

    점점 더 숨소리가 약해진다. 카벨레누스는 가냘픈 신음 속 침묵을 지켰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유는 잘 몰랐다. 그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

    제르페누스의 숨이 완전히 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더는 미동도 없는 형제를 바라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드디어 악의로 가득 찼던 어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걸. 카벨레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눈만큼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 죽어가던 와중에도 어머니는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향해 울분을 토했으니까.

    '약속해주렴, 그 여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네 아버지가 바란 대로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올려주고, 그 아이가 가장 행복할 때, 나락으로 떨어트려주렴.'

    어머니는 족쇄와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의 머릿속에 깊숙이 박힌 명령은 너무나 절대적이라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이 자신의 손으로 죽인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도리라고 여겼으니까. 어차피 별 의미 없는 삶이라면 어머니의 바람 정도는 들어주고 죽을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카벨레누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그는 죽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폐허가 된 방 안은 엉망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말하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사내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 끝이 났다는 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군.]

    내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카벨레누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 * *

    "전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벨레누스를 발견한 가제프가 힘껏 달려갔다.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지, 다행히 카벨레누스는 별 탈 없이 무사해 보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가제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카벨레누스는 카벨레누스일 뿐이었다.

    "이번에 비 전하께서 큰 도움을…… 전하?"

    답지 않게 잔뜩 들떠 떠들던 가제프의 표정이 굳었다. 걸어오던 카벨레누스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가제프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그대로 몸이 무너졌다.

    "전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다. 가제프는 급히 달려가 카벨레누스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흔들고 소리쳐도 짐승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가제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을 뻗었다.

    "맙소사……."

    코에 손을 댔지만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제프는 떨리는 손으로 맥을 짚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만지든 간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카벨레누스에게선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가제프의 손이 더듬더듬 카벨레누스의 몸을 훑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느는 건 공포뿐이었다. 카벨레누스에게선 맥은커녕, 심장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제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 쓰러진 사람이라 하기엔 카벨레누스의 몸이 너무나 차가웠다. 마치 오래전에 이미 죽은 것처럼. 순간 떠오른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도 따지고 보면 실험체였으니까. 실험체는 자신의 생명을 소진해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카벨레누스 역시 그래왔다. 힘을 쓰는 대가로 카벨레누스 또한, 생명을 사용했을 확률이 있었다.

    "……아닐 겁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추측은 추측일 뿐, 사실이 아니었다. 가제프는 애써 두 손에 힘을 줬다. 하지만 손바닥에 느껴지는 냉기는 자꾸만 좋지 않은 생각만 떠오르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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