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멈춰 있었다
2021.07.22.
"누나!"
"잭!"
서로를 부둥켜 끌어안은 남매를 보며 펜리르는 싱긋 웃었다.
"훈훈한 광경이군. 안 그래?"
"감탄은 나중에 하시고 일단 움직이시죠. 여기 있다간 그대로 매장당할 것 같습니다만."
"이런 감동의 순간에도, 냉정하긴."
"소맹주께서 위기의식이 없으신 겁니다."
베르베는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아이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둘 다 네가 안으려고? 그건 무리지 않나."
"소맹주가 호위를 제대로 해주시면…… 아닙니다. 한 명씩 안도록 하죠."
"나 못 믿어?"
"네."
"차갑군."
펜리르는 장난스럽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베르베가 안고 있던 아이를 넘겨받았다.
"진짜 빠르게 움직일 테니, 잘 잡고 있어."
끄덕끄덕-. 누나를 구한 덕분인지, 아이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펜리르는 피식 웃으며 재빨리 밖으로 나섰다.
"이런. 손님이 와계셨군."
펜리르는 미간을 찡그렸다.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냄새를 맡고 찾아온 괴물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제가 주의를 끌 테니, 소맹주께선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가십시오."
"그럴까?"
"……."
"농담이야. 농담. 내가 설마 소중한 부하를 놓고 가려고."
펜리르는 가볍게 웃고는 베르베의 품에 아이를 떠넘겼다.
"뭐 하시는 겁니까."
베르베의 두 눈이 싸늘해졌다.
"이렇게 멋있는 건 내가 해야지."
펜리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베르베의 어깨를 두들겼다.
"저보다 소맹주의 목숨이 더 값집니다."
"목숨에 값을 매길 수 없지. 그리고, 나보다 네가 더 빠르잖아. 네가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이는 게 낫지."
"소맹주."
"명령이다."
"……."
펜리르는 단호히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베르베는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아무리 그녀라도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다.
"아, 아저씨 조심해요!"
"아저씨라니. 애가 큰일 날 소리를 잘도 하네."
펜리르는 혀를 쯧쯧 차면서 그대로 실험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들이 빠져나갈 틈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챙-! 단단한 발톱이 검에 부딪히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베르베는 상황을 주시하다가 빠르게 틈을 노려 그대로 내달렸다. 두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랜 경험으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어딜 가시려고!"
펜리르가 도망치는 베르베 일행을 공격하려는 실험체의 다리를 벴다. 숨통을 끊기 위한 공격이라기보다는 발을 잡기 위함이었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달려!"
춤을 추듯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힘은 적이 앞설지라도 빠른 속도는 로아킨의 자랑이었다.
"자자!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펜리르의 외침에 반응한 실험체들이 몰려들었다. 펜리르는 눈으로 실험체의 수를 세면서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는 실험체는 다섯. 그 정도라면 어떻게서든 시간을 끌다가 도주할 수 있었다.
"……저놈들 머리를 쓸 수 없었던 게 아니었나."
마치 일행이 쪼개지길 기다렸다는 듯, 골목 안쪽에서 하나둘 튀어나오는 실험체들이 없었다면. 펜리르는 황급히 베르베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에서도 실험체가 나오고 있었다. * * * 바람이 분다. 알리시아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마물들이 최선을 다해 막고 있지만, 밀려오는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알리시아는 빠르게 심호흡을 하고는 눈을 감았다. 마물과 잦은 교감을 한 덕분인지, 이제는 정신을 집중하면 마물의 눈을 통해 주변 풍경을 살피는 것도 가능했다.
[펠시. 오른쪽에 있는 산을 공격해.]
[설산?]
[눈사태를 일으키는 것 정도로는 죽일 순 없겠지만, 시간을 벌기엔 충분할 거야. 틈틈이 눈사태를 일으켜 적들의 이동을 방해해줘.]
[알았다.]
눈에 파묻히는 적들을 확인하고 알리시아는 눈을 떴다. 적은 한둘이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저 개체는 힘은 세지만 움직임이 둔해. 무작정 맞서 싸우기보다는 급소를 노리도록 해.]
[알았다. 노력한다.]
[그리고 이쪽은…….]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마물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괴물은 지금껏 본 실험체 중에서 가장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와 가장 비슷한 개체다.]
[너희와?]
마물의 말과 달리, 팔다리가 여럿으로 쪼개진 괴물은 전혀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의 심장을 조각내서 만든 것 같다.]
[……정말로 심장을 실험에 쓴 모양이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연결이 미약하게 된다.]
[연결이 된다고?]
[저자, 괴로워하고 있다.]
[…….]
알리시아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런 끔찍한 모습이 되기 전까지는 실험체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었다.
[……다른 말은?]
[죽여달라고 말하고 있다.]
[……이성이 남아 있다는 거야?]
[일단 목소리는 들린다.]
우리 동족의 것인지, 실험당한 인간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덧붙여진 말에 알리시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새삼스럽게 참혹한 현실에 입안이 썼다. 그때였다.
[사, 사……살…….]
[…….]
알리시아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보이는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미약하게, 그리고 한둘 정도로 들렸던 목소리가 빠르게 들기 시작했다. 그건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절규였다.
"아아……."
알리시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절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안 된다. 저들에게 집중하지 마라. 듣지 말아라.]
[듣지 말라고? 왜?]
[우리는 조절할 수 있지만, 그대는 아니다. 저들에 감정에 동화되면 무너질 거다.]
알리시아는 마물의 경고에 입술을 꽉 깨물며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한 번 느낀 감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고 있었다.
[주의해라. 저들 계속 말하고 싶어한다. 그대가 들을 수 있다는 걸 눈치챈 이상, 끊임없이 말을 걸 거다.]
[…….]
[마음 쓰지 마라. 어차피 끝난 자들이다. 돌아올 수 없다.]
펠시가 빠르게 위로를 던졌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푹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유지했다.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냐?]
[예전에 그랬잖아. 힘을 쓰는 데에는 대가가 없다고. 그리고, 내 힘은 이 세상 무엇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맞아. 그랬다.]
[그러면, 이상하지 않아?]
고개를 든 알리시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독초를 먹지 않은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변함없이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어떤 점이 이상하지?]
[아무런 제약도 없고, 심지어 이 세상 무엇보다 위대한 힘인데, 왜 나는 이렇게 약한 걸까.]
[그건 그대의 그릇이 유독 작으니까…….]
[그릇의 크기는 누가 정한 건데?]
[그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다. 펠시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프라임의 말. 그건 다시 말해 결국 시작이 나였다는 게 아닐까?]
[…….]
[그릇의 크기는 내가 정한 거야. 내가 내 한계를 규정짓고, 그렇게 살아와서 내 그릇이 그랬던 거야.]
알리시아는 헛웃음을 뱉었다.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힘이 없길 바랐어.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지.]
[…….]
[나는 내가 참 싫었어. 모두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카벨레누스를 만나기 전까진.]
오래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돌이켜보면 힘을 원하지 않는 순간에는 힘이 사라졌고, 반대로 간절하게 원했을 때는 힘이 돌아왔다.
[나는 계속해서 힘을 사용하고 있어. 하지만 이상하게 예전처럼 괴롭지 않았어. 독초를 먹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릇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꼭 힘을 억지로 그릇에 담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단 생각을 했거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매듭도 한 번 시작점이 시작하면 단숨에 풀렸다.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가슴 위로 두 손을 올려놨다. 정말로 자신이 정답을 찾았는지는 모르나, 시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설령 내가 찾은 힘에 대한 해답이 정답이 아니더라도 괜찮아. 내가 정말로 마물의 왕이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대, 설마…….]
[저들에게 내 목소리를 들을 이성이 있다면, 내가 누구인지는 구분하겠지. 저들의 바탕에는 결국 너희들이 있으니까.]
알리시아는 나아가 쭉 펼쳐진 설원을 바라봤다. 이제는 더 이상 추위가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이곳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걸 이제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 * *
"나는 여기서 죽어선 안 되는 사람인데 말이지."
펜리르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는 실험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베고, 또 베어도 어디선가 실험체는 나타났고, 또다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펜리르는 이를 꽉 다문 채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이 싸움을 이어갔는지는 모르나, 이제는 하도 휘두른 팔이 저릿했다. 녹슨 기계처럼 다리가 슬슬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드는 생각은 결국 하나였다.
"내가 죽으면 베르베가 내 묘지에다가 불을 지를 텐데."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쉬어버린 목소리는 조금도 경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펜리르는 숨을 크게 뱉으며 베르베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한시라도 빨리 베르베를 쫓아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암담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서든 버티면서 베르베 일행이 무사하길 비는 것뿐이었다.
"이런 데서 죽을 줄 알았으면, 앞뒤 안 가리고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나 해보고 올 걸 그랬네."
펜리르는 끝까지 밝은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한계에 다다른 팔은 더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채앵-! 맞부딪힌 검이 사내의 손에서 벗어나 그대로 바닥에 꽂혔다. 펜리르는 더는 밝은 목소리를 내는 걸 포기하고 육두문자를 곱씹었다. 머리로는 공격을 피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힘이 풀리기 시작한 다리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저 놈 배 속에 들어가면 시체도 못 찾는 거 아닌가. 이러다가 내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르면 어떡하지. 머릿속에 든 생각에 펜리르는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죽을 때가 되면 진지해질 줄 알았는데, 정작 떠오르는 건 그런 생각뿐이라는 게 우스웠다.
"……."
펜리르의 감긴 눈꺼풀이 떨렸다. 분명 고통스러워야 하는데,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펜리르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의 코앞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서 있었다.
"이게 무슨……."
펜리르는 허탈한 숨을 뱉으며 주저앉았다. 멈춰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실험체가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