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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28)화 (128/164)
  • 128화. 변수

    2021.05.24.

    "지금 저 보고 선봉에 서라는 겁니까? 저는 진짜가 아니-."

    "그대는 진짜야. 그래야만 하지."

    "……."

    제임스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제르페누스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그는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었다. 명령하는 것이었다.

    "긴말은 하지 않겠어. 그저 그대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홀려주면 되는 거야."

    "신전이 절 반겨줄 리 없습니다."

    "신전은 주변의 시선을 꽤나 신경 쓰거든. 신의 대리자가 직접 찾아왔는데, 반기지 않을 리 없지."

    "만약, 그들이 먼저 공격이라도 해온다면……."

    "그대도 반격하면 되지."

    제르페누스가 별거 아닌 양 간단히 대답했다.

    "저 보고 싸우라는 겁니까?"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 말해주는 걸세."

    "……."

    "걱정하지 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신전이 그럴 리 없고, 무엇보다 그대는 그동안 마녀를 해치운 영웅이잖나. 군대 하나를 이끌 정도의 실력은 되겠지."

    "저는……."

    영웅은 무슨. 제임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신전의 마녀들을 처리했던 건, 펜리르와 그의 수하들이었다. 제임스가 한 거라곤 모든 일이 끝나고, 얼굴을 드러내며 영웅 행세를 했을 뿐이었다. 자신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못 한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나서죠."

    제임스는 텅 빈 손목을 꽉 쥐었다. 팔찌를 빼앗겨 펜리르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었을뿐더러, 로아킨이 부각된 이후부터 제르페누스의 태도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지금으로선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그저 펜리르가 하루라도 빨리 약속을 지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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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부탁하신 곳에 마정석을 설치해뒀습니다. 이제부턴 문제없이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큰 도움을 주셨군요.>

    "제 노고를 아시면 대공 전하께 말이나 잘 해주십시오."

    펜리르는 능청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젠 슬슬 로아킨으로 돌아가 카벨레누스의 승리를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선뜻 통신구를 끌 수 없었다. 저 너머, 얼어붙은 땅에는 그녀가 있었다.

    "저어…… 그분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그분이요?>

    "영애님 말입니다."

    <아, 대공비 전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대공비 전하. 그 짧은 단어에 펜리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일이 끝나면 알리시아의 입장이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귀로 직접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대공비 전하가 되시는 거군요."

    <상황에 따라선 다른 호칭으로 불리게 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요.>

    블랑셰 제국의 황위는 카벨레누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현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차기 황제가 누가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요."

    <이제라도 제자리를 찾는 것이죠. 두 분 모두요.>

    "제자리를 찾은 후에도 로아킨을 잊지 않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전하께서는 받은 일은 잊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뭐든 말이죠.>

    가제프는 돌려 말했지만 펜리르는 그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었다. 슈바르한 대공의 유능한 부관은 사심을 눈치채고 있었다. 펜리르는 괜히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멋쩍게 웃었다.

    "흠, 흠, 어쨌든 그동안 즐거웠고, 나중에 뵙도록 하죠."

    펜리르는 제 발 저려 재빨리 인사를 하고 통신구를 조절했다. 누가 슈바르한 대공의 사람 아니랄까봐, 대공이나 그 부하나 눈빛이 만만치 않았다. 오래 상대해봤자, 제 기만 빨릴 뿐이었다.

    <지금, 로아킨 소대공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거야?>

    통신구를 조절하려는 펜리르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그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전하, 오셨습니까?>

    <미안해. 미카엘이 잠들지 않아서 조금 늦었어.>

    <아닙니다. 이리와 앉으시죠.>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펜리르는 바짝 귀를 기울였다. 베르베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지만, 지금 사내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마음 정리를 하겠다 다짐해도 알리시아의 등장에 절로 눈이 갔다.

    <여길 보고 말하면 될까?>

    <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바로 그냥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남은 연료를 고려하면, 한 이십여 분 정도 통신이 가능할 것 같으니 참고해주시고요.>

    <알았어. 고마워.>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통신구를 통해 얼굴이 보였다. 펜리르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서둘러 헛기침도 몇 번 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저야 늘 잘 지내죠."

    왜,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지? 펜리르는 마주친 시선에 꼴깍 침을 삼켰다. 딱히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애정이 덧씌워진 사내의 눈에는 내로라하는 미인보다 알리시아가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수고스러우셨을 텐데, 이번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무보수로 일한 것도 아닌데요! 충분한 대가를 받고 한 것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펜리르가 다급히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리 대가를 받아도 모자라다며, 악랄하게 상대를 뜯어먹었던 자신의 과거는 지금만큼은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서요.>

    "부탁이요?"

    <지금 카벨레누스와 연락이 되지 않아요.>

    "카벨…… 대공 전하께서 말씀이십니까?"

    하마터면 슈바르한 대공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뻔했다. 펜리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알리시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아까 부관의 매서운 눈빛으로 봐선 실수하면 분명 카벨레누스에게 이를 기세였다.

    <수도로 들어간 이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는데, 거기에 걱정스러운 정황도 포착되어서요.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적진 속으로 들어갔는데, 당연히 위험이 있겠……지만! 슈바르한 대공 전하 아닙니까? 분명 큰일은 아닐 겁니다."

    펜리르는 평소처럼 짓궂게 말하려다가 마주친 시선에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알리시아에게 미움받을 만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카벨레누스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어떤 거죠?"

    <그게…….>

    알리시아의 낯에 곤란한 기색이 서렸다. 펜리르가 아군이라 해도 족쇄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냥 들은 거로 치죠. 아무래도 우리 대공 전하께서는 비밀이 많으신 것 같으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알리시아의 미소에 펜리르의 입가에도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것보다 그녀의 호감을 샀다는 사실이 훨씬 뿌듯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

    <황제가 카벨레누스의 계획에 넘어간 건, 소맹주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어요.>

    "그건 대공 전하께서 제 계획을 좋게 봐주셨기 때문이죠. 물론, 기본적으로 제가 짠 계획이 좋았던 게 가장, 윽! 뭐 하는 거야, 베르베."

    펜리르가 인상을 쓰며 베르베를 노려봤다.

    "적당히 하세요. 자기 자랑 심한 남자는 별로입니다."

    베르베는 검집 끝으로 한 번 더 펜리르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펜리르는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랑하는 거 별로야?"

    "대공 전하 쪽만 하더라도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잘난 게 보이지 않습니까."

    "네 상관은 나인데, 어째 네 평가는 대공 전하 쪽에 더 후한 것 같다?"

    "저는 원래 거짓말 못 합니다."

    "거짓말. 내가 너 거짓말하는 걸 얼마나 많이-."

    "통신 안 하십니까? 기다리고 계신 것 같은데요."

    "아!"

    펜리르가 다급하게 몸을 돌려 다시 통신구를 찾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 부하가 급하게 소식을 가져와서요."

    <급한 건가요?>

    "그런 건 아닌데. 그래서, 저희 어디까지 이야기를 나눴죠?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부분까지 했었죠?"

    <고향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분들을 다시 한번 잡는 게 폐가 될 거라는 걸 알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저희가 보통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격식 차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따지면 그렇게 대단한 사이는 아닐 텐데. 뒤에서 중얼거리는 베르베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펜리르는 눈에 힘을 바짝 줬다.

    <최근 저희 측에선 기존 계획을 수정하자는 의견을 냈어요>

    "훌륭하네요. 원래 계획은 수정하면서 완벽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계획이 만족스럽지 않아요.>

    "어째서죠?"

    <계획이 뻔해요. 이런 계획이라면 적도 쉽게 눈치챌 거예요.>

    "대공 전하의 밑에는 훌륭한 책사가 있지 않습니까?"

    함께 계획을 짜봐서 알았다. 카벨레누스 못지않게 가제프도 머리가 좋았다. 그라면 충분히 짜여진 계획을 수정할 수 있었다.

    <클라우드 경의 실력은 훌륭해요. 하지만 문제는 상대예요.>

    "상대요?"

    <카벨레누스도, 황실도, 신전도 다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만큼 서로 균형을 지켜올 수 있었던 거고, 서로의 허점을 노리는 것도 힘들었던 거예요.>

    알리시아는 짧게 숨을 뱉곤 곧장 말을 이었다.

    <클라우드 경은 카벨레누스와 시각이 비슷해서 카벨레누스가 짠 계획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독이에요.>

    "그래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는 거군요."

    눈치 빠른 사내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네. 로아킨은 변수, 그 자체니까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뗐다. 어떤 식으로 계획을 수정할까 고민했지만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이기기 위해선 상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할 수가 필요했다.

    <앞서 계획을 한 번 비틀어주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계획을 수정해주셨으면 해요.>

    "어떤 식으로 비틀어드리면 될까요? 원하시는 모양이 있으신가요?"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볼 겸, 펜리르가 일부러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로아킨의 참전이요.>

    "그건……."

    유창하게 이어지던 펜리르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리 알리시아에 대한 호감이 있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뒤에서 보조해주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만했지만, 직접적으로 참전하는 건 너무나 위험부담이 컸다.

    <쉬운 결정이 아니실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참전을 요구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진 않지만, 지금의 부탁은 웬만한 대가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펜리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당초 알리시아가 꺼낸 이야기는 더 논의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도와주신다면, 로아킨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드릴게요.>

    "로아킨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많은 문제들이 있겠지만,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은 메마른 땅에서부터 시작되었죠.>

    알리시아의 시선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똑바로 펜리르를 향했다.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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