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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27)화 (127/164)

127화. 꿍꿍이

2021.05.20.

"전하, 왜 그러십니까?"

"……약해졌어."

"네?"

"거의 느껴지지 않아."

고개 든 알리시아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뭐가 느껴지지 않으신다는-."

가제프가 말을 잇기도 전에 알리시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리시아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방 안을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았지만, 한 번 구겨진 그녀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전하."

알리시아의 이상행동에 당황한 가제프가 급히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가까이서 바라본 알리시아의 낯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전하."

가제프가 다시금 알리시아를 불렀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가제프를 응시했다.

"역시,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뇨."

"아무래도 카벨레누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알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팔을 잡아주는 가제프가 아니었다면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을 뻔했다.

"무슨 일이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카벨레누스가 떠난 후부터 쭉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기척이 너무 희미해졌어."

"대공 전하께서는 강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족쇄가 남아 있잖아."

알리시아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이렇게까지 걱정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아직도 그를 억압하는 족쇄가 남아 있었다.

"대공 전하께 묶인 족쇄는 선황제의 것이라 그리 효력이 세진 않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따로 봐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한 게 정말로 도움이 될지는 몰라."

"대공 전하께선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가제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클라우드 경은 카벨레누스가 걱정되지 않아?"

"걱정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곳에는 전하와 도련님이 계시니까요. 두 분이 계시는 한, 대공 전하께서는 꼭 돌아오실 겁니다."

확신 어린 말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알리시아의 주먹이 풀렸다. 가제프는 싱긋 웃으며 알리시아를 부축해 도로 자리에 앉게끔 도왔다.

"대공 전하께서 없으실 때야말로 전하께서 굳건해지실 때입니다."

"……미안해. 약한 모습 보여서."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대공 전하와 같은 전장에 서보신 적이 없으시고, 무엇보다 전하를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주시는 거니까요."

다들 카벨레누스를 향해 괴물이라고 말하며, 그가 쌓아 올린 업적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당연한 것은 없었다. 가제프는 카벨레누스가 괴물이라 불리기까지의 시간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카벨레누스를 동등한 인간으로 여겨주는 알리시아의 시선은 달가운 것이었다.

"……나는 역시, 카벨레누스를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하지만 클라우드 경처럼 카벨레누스를 좀 더 믿어보고 싶기도 해."

알리시아는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다. 문제를 풀기 위해선 차분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고 싶으십니까?"

"내가 카벨레누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사실 족쇄 덕분이었어."

"족쇄 덕분이요?"

가제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첼시 말로는 족쇄라는 건 강제적으로 둘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는 거래. 그런데, 카벨레누스는 한쪽의 연결이 끊겨 있으니, 나와 연결할 수 있을 거라 했거든."

"그 말씀은……."

"응. 맞아. 선황제가 아니라, 내가 카벨레누스의 주인이 된 거야."

알리시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카벨레누스는 별일 아닌 것처럼 첼시의 의견을 수용했지만, 알리시아는 아니었다. 말이 연결일 뿐, 족쇄를 풀지 않고 이용하는 건 사실상 새로운 주종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카벨레누스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우리의 연결이 약해졌다는 걸 뜻해."

"그렇다면 황제 측에서-."

"황제는 아닐 거야."

알리시아가 단호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황제였다면, 카벨레누스에게 새로운 족쇄를 채웠을 테니, 기존의 족쇄가 남아 있을 수 없잖아."

"하지만 족쇄와 연관된 건 황실뿐입니다."

"신전일 수도 있어."

"……."

가제프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미 그는 알리시아와 함께 신전의 수상한 행적을 파악한 바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찬가지야. 신전은 분명 마물을 가지고 실험을 했어. 그리고, 그건 황실보다 오래전의 이야기지."

"신전도 족쇄를 알고 있을 확률이 있다는 거군요."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아가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어."

신전이 황실의 실험을 도왔을지도 모른다고. 알리시아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황실에서 실험을 시작한 건, 신전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못 했던 것일 수도 있어."

"……."

"무엇보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대로라면 신전과 황실, 둘 다 실험을 하고, 같은 결과물을 냈다는 소리잖아. 이게 우연일 거라고 생각해? 나는 아니야."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가제프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계획을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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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왜, 펠시온이 돌아오지 않는 거지?"

제르페누스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건 고개 숙인 부하들의 침묵뿐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입이 없나? 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거지?"

"실은 사람을 더 보냈지만, 그들 역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제르페누스의 이마골이 눈에 띄게 깊어졌다.

"현재 신전에 잠입한 자들, 모두 실종된 상태입니다."

"몇 명이지?"

"펠시온을 포함해 다섯입니다."

"내 그림자들이 다섯이나 들어갔는데, 돌아오지 못했다고?"

제르페누스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제 손으로 직접 골라 키워낸 그림자들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들이었다. 다섯이나 잠입했음에도 아무런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현재 저희 측에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보내지마."

"네?"

"지금껏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돌아올 수 없다는 거다."

"하나……."

"펠시온이 당한 마당에 너희들도 뭐 다르겠느냐. 이대로라면 아까운 그림자들만 잃을 뿐이야."

제르페누스는 이를 갈면서도 억지로 의자에 상체를 눕혔다. 당했다는 사실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지금으로선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었다. 신의 대리자를 앞세우고 있다 한들, 자신의 입장은 썩 좋지 못했다. 카벨레누스를 손에 넣기 전까지는 신전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어. 궁지에 몰린 영감이 무슨 수를 쓸지 몰라.'

제르페누스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많은 정보들을 쥐고 있음에도 정작 중요한 정보들은 하나도 건지지 못하니 너무도 초조했다.

"신전은 아직도 문을 닫고 있나."

"네. 덕분에 신도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신도들 사이로 숨어 들어가긴 글렀겠군. 그럼 사제들은 어떻지?"

"대부분 신전 안에 있으며, 밖에 있는 자들도 전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사제들, 전부? 한 명도 빠짐없이? 마란 교구도?"

"네. 그렇습니다."

제르페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우리는 그 늙은이에게 감쪽같이 당한 거군."

"네?"

"그 많던 사제들은 물론, 대신관과 척을 지고 있던 마란 교구까지 이제 와서 대신관의 말을 듣는다고? 듣기만 해도 웃기지도 않는군."

"그렇다는 건……."

"보여주기 위해서 사이가 안 좋은 척을 해왔던 거다."

잠깐 사이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같은 행동을 보이다니. 그런 반응을 보이려면 웬만한 결속력 가지곤 되지 않았다. 지금껏 평가했던 것과 달리, 신전은 생각보다 단단한 결집력을 자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신전에 대한 정보들도 다시 검토해야겠군. 일부러 신전의 정보를 팔아서 지금껏 날 속여왔을 테니 말이야."

제르페누스는 짜증을 토해내며 이를 드러냈다. 지금껏 줄을 대놓았던 신관들이 헤르만의 개들일 거라고 생각하니 그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대신관의 속임수라고 하기엔 저희가 매수한 사제들의 정보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 사실이라서 우리는 이득을 봤고, 반대로 신전은 손해를 입었지."

"그렇다면, 역시 대신관의 속임수는-."

"예전부터 영감은 손해를 입으면 항상 딱 필요한 만큼만 대처했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네? 저, 저는……."

펠시온이라면 바로 알았을 텐데. 제르페누스는 대놓고 혀를 쯧쯧 차며 턱을 어루만졌다.

"그 영감은 처음부터 내게 이길 생각이 없었어."

"이길 생각이 없을 리가요."

"카벨레누스가 전장을 휩쓸면서 영감의 기세가 꺾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

완벽한 거짓말은 사실과 거짓을 얼마나 잘 섞냐에 달렸기에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손해 볼 것도 감안해야 했다. 하지만 헤르만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정보를 팔았다.

"그 영감은 처음부터 져줄 생각이었던 거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글쎄. 그 영감 속을 누가 알겠어. 다만……."

제르페누스는 짜증을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신경을 가장 거슬리게 하는 건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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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감추려고만 했던 영감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어."

"신의 대리자로 인해, 상황이 불리해져 보이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아니라고요?"

"꿍꿍이를 감출 필요가 없다는 건, 결국 원하는 바를 손에 넣었다는 뜻이니까."

슈바르한의 성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어 정보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항상 카벨레누스의 아이를 욕심내왔고, 언제나 기상천외하게 상황을 이끌어 원하는 바를 쟁취했다. 어쩌면 벌써 카벨레누스의 아이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병사를 모으도록 해."

"군대를 만드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병사들을 전부 무장시키도록 해."

무모한 방법은 선호하지 않지만, 헤르만이 목적을 이루게 둘 순 없었다. 어떻게서든 신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폐하께서 신전과 싸우시면, 슈바르한 측에 허점을 보이게 되는 것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우리가 꼭 싸울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대신관이 문을 열어줄 리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특별한 존재가 있지 않나."

제르페누스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자를 선봉에 세우고 신전으로 보내. 마치 신이 강림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를 우러러볼 수 있도록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서 말이야."

그동안 즐기게 해준 파티가 몇 개인데, 슬슬 제 밥값은 해야지. 제르페누스는 턱 끝을 추켜세우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헤르만에게 꿍꿍이가 있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비밀이 있다면, 전부 파헤쳐 버리고 승리를 거머쥐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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