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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89)화 (89/164)

89화. 정상의 기준

20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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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건가?"

알리시아의 울음이 잦아든 후, 카벨레누스는 물잔을 건넸다. 알리시아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젖은 눈으로 카벨레누스를 빤히 올려다봤다. 사내의 어깨는 흠뻑 젖어 있었다.

"죄송해요, 못난 모습 보여서."

"내게 사과할 일은 아니지."

"……."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로 인해 그녀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잔으로 떨어졌다.

"별일 아니었어요."

"정말?"

"네."

"내가 모른 척하길 바란다면 얼마든지 해주지."

카벨레누스는 의자를 끌고와 알리시아의 앞에 마주앉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그녀를 지켜봤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숙였음에도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애꿎은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둘 사이에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

"……."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미카엘이 깨어났을지도 몰라요."

알리시아는 표정을 고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벨레누스는 다른 말없이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보지."

"미카엘에겐 제가 필요해요. 제가 안 보이면 울 거예요."

"미카엘에게 울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잖아."

"……."

"그대 얼굴. 누가 봐도 운 얼굴이야. 눈가도 발갛고 얼굴도 부었지."

카벨레누스가 손끝으로 툭툭 자신의 얼굴을 건드렸다.

"하지만, 미카엘은 항상 자다가 깨면 절 찾아서-."

"책에서 그러던데, 이제 슬슬 혼자 자도 되는 나이라고."

"……책이요?"

알리시아는 자신이 들은 단어를 이해할 수 없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벨레누스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육아책 말이야."

"……."

"왜? 그런 거 읽으면 안 되는 건가?"

"아뇨. 그럴 리가요."

알리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것치곤 많이 놀란 얼굴인데."

"……실은 당신이 그런 책을 읽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요."

"모르는 게 있으면 배우는 게 당연하잖아."

"……."

맞는 말이긴 하지만, 카벨레누스가 하니 이상하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려고 해도 눈앞 사내의 투박한 손에는 책보다는 검이 잘 어울렸다. 하물며 육아를 위한 책을 읽는 모습을 떠올리는 건 더욱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도 알아. 이런다고 해서 내가 여느 평범한 아버지처럼 굴 순 없을 거라는 거."

"……평범한 아버지요?"

"알잖아.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

"……."

"그래도 그냥 둘 생각은 없어. 내 아들로 키우기로 한 이상, 어설프게 키울 생각은 없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벨레누스에 알리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신의 생각했던 것보다 카벨레누스는 훨씬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부모라는 건 뭘까요?"

"제대로 키우는 거?"

"제대로 키운다는 게 뭔데요?"

"어른이 될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으음……."

카벨레누스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턱을 괬다. 돌이켜보면 딱히 정상적인 부모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기에, 정상적인 부모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군."

결국 카벨레누스는 짤막한 숨을 뱉었다.

"그럼 저는요?"

"그대?"

"저는 어떤 엄마로 보여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뿐인가요? 제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알리시아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여자를 외면할 순 없었다.

"솔직히 살짝 과한 감이 있다고도 생각했어."

"과해요?"

"물론 그게 꼭 나빠 보였다는 건 아니야. 그대는 좀 특수한 경우였잖아. 미카엘은 특별한 아이였고, 나도 있었고……,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아까보다 더 일그러진 알리시아의 표정에 카벨레누스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나는 정상적인 부모가 뭔지는 몰라. 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그대는 제대로 된 어머니였어."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카엘을 생각하잖아. 카벨레누스가 쓰게 웃었다. 알리시아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굳게 다물려있던 입술을 뗐다.

"……그런 말을 들었어요."

"무슨 말?"

"제가 정상이 아니래요."

"정상?"

"저는 애정에 목말라 있어서 절대적인 애정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거라고요. 제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요."

알리시아는 웃었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었어요. 내심 찔렸던 거죠."

"……."

"저는 항상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미카엘에게 있어서 좋은 엄마인지도 모르겠고요. 제가 아는 부모는 필요에 따라 이용해먹는 거나, 아니면 자식을 위해 희생할 뿐이었거든요."

"……."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요.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감정을 쏟아부어왔죠. 그런데 막상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띵하더라고요."

알리시아의 잇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맞는 소리잖아요. 어머니에서 당신으로, 그리고 당신에게서 미카엘에게로. 저는 항상 애정을 줄 수 있는 상대를 필요로 했으니까요."

그런 게 과연 정상일까요? 알리시아의 양 어깨가 젖은 잠자리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카벨레누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럼 어떤 게 정상인데?"

"네?"

"그대 나름대로 생각한 정상의 모습이 있을 거 아니야."

"그건……."

알리시아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말하지 못하겠지?"

"……."

"나도 그대가 물을 때 그랬어. 정상의 기준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나는 보통 사람과 당연히 다르다고만 생각했어."

"……."

"그냥 처음부터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나는 보통 사람의 범주 안으론 절대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당연하게 배제하고 있었던 거지."

카벨레누스의 손이 흐트러진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머리카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작은 귀도 그녀의 몸과 함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대와 나는 의외로 닮은 부분이 많을지도 모르겠어."

"……제가 당신과 닮았다고요?"

"물론 나보단 그대가 훨씬 낫지."

나는 그대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거든. 굳은 살이 박힌 손이 귓불을 스치는 감각이 묘했다. 알리시아는 무의식적으로 카벨레누스의 눈을 피했다.

"나는 위로에는 재능이 없어. 그리고, 나 역시 스스로를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터라 그대가 정상이니, 아니니 할 자격도 없지."

"……."

"다만, 가제프가 그러더군. 미카엘은 신기할 정도로 참 잘 컸다고."

"……."

"미카엘도 그러더군. 그대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라고."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알리시아의 눈물을 훑었다. 알리시아는 우두커니 선 채 가냘픈 숨을 토했다.

"나는 제대로 된 부모의 기준은 몰라. 하지만 그대를 나쁜 엄마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어째서요?"

"그대가 나쁜 엄마였다면, 미카엘이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을 리 없잖아."

"……."

"그런 아이를 있게 한 애정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이의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미카엘은 누가봐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다.

"……그럼, 당신 눈에도 미카엘이 잘 큰 것처럼 보여요?"

"지나칠 정도로 잘 컸지."

오늘도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어보이던 미카엘을 떠올리며 카벨레누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자책하진 마. 솔직히 그대는 그럴 만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거잖아."

"……그럴 만했다고요?"

"그래. 그럴 만했지. 학대 속에서 유일하게 보듬어주는 어머니도, 대신 어머니의 복수해준 구원자처럼 보였던 사내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혈육도. 전부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가질 만한 상대들이었잖아."

단 한 번도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알리시아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저 손끝만 꼼지락거렸다.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알리시아의 작은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로 올려놓았다.

"가만 보면 그대는 스스로에게 박한 편이지. 그런데, 그거 알고 있어?"

"뭘요?"

"무엇보다 그대가 결핍을 채워줄 상대를 원했던 것뿐이라면, 8년 전 그대가 미카엘을 살리기 위해 내게 목소리 낼 수 없었을 거라는 거."

과거를 끄집어내는 게 자신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덤덤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흔히들 과한 애정은 독이 된다고 하지.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잖아."

"……."

"그대가 품었던 감정들은 나쁜 게 아니야. 그저 남들보다 좀 더 절박했고, 그만큼 각별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내가 보기엔 그래. 카벨레누스의 마지막 말에 결국 알리시아는 무너졌다. 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 * *

"엄마아, 나아 너무……."

눈을 뜨지도 않고 통통한 손으로 이불을 해치던 아이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당연하게 느껴져야 하는 온기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카엘은 당황해 가만히 있다가 이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위로 올렸다. 밀려오는 졸음보다 엄마의 유무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다.

"엄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수마에 취해 흐리멍덩했던 아이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미카엘은 눈을 비비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착각이 아니었다. 옆에 있어야 할 엄마가 없었다. 미카엘은 금세 울상이 되어서 엉금엉금 침대 위를 기어가며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열심히 이불을 들추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도 엄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없어."

결국 미카엘은 엄마의 부재를 참지 못하고 낑낑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방 안에는 엄마는 없었다. 미카엘은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삼키며 굳게 닫힌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꿀꺽-. 미카엘은 문고리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까치발을 세워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한 문고리는 슈바르한에 온 후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잡아당겼지만, 밤에 마주하니 괜히 무섭게 느껴졌다. 문고리에 새겨진 늑대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자신을 공격할 것 같았다.

"무서워하면 안 돼. 엄마를 찾아야 해."

미카엘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이에겐 사방에 깔린 어둠보다는 엄마가 옆에 없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물론, 그렇다고 어둠이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끼이이익-. 미카엘은 열린 문 틈새로 보이는 복도의 풍경에 심호흡을 길게 했다. 벽에는 군데군데 마나석으로 만든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오히려 조명 때문에 만들어진 일렁거리는 그림자가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미카엘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참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제대로 된 걸음을 뛰기 시작했다.

"안 무서워. 나는 조금도 안 무서워."

미카엘은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지 않았음에도 아이의 심장은 이미 뜀박질을 한 것처럼 거세게 뛰고 있었다.

"얼른 엄마를 찾아서……."

일순간, 미카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카엘은 금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리며 그대로 굳었다. 찰나였지만, 방금 전 기이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내, 내가 잘, 잘못 들은 거겠지?"

미카엘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더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 그제야 미카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순간이었다. 키이이이이익-! 미카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도 잘못 들었다고 넘기고 싶었지만 방금 전 소리는 너무 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도 기괴해서 한 번 들으면 쉽게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쇠를 긁는 것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으며, 또 한 번으로는 내지르는 사람들의 비명 같기도 했다. 미카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바들바들 떨었다. 분명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어디선가 자꾸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어, 엄마……."

미카엘은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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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은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의 낯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때였다.

"미카엘?"

미카엘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미카엘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두 귀를 막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아이의 귓가에서는 기괴한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흐읍, 흑, 흑……"

"……미카엘?"

"아……."

어깨 위로 온기가 닿고서야 미카엘은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떴다. 구슬처럼 반질거리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익숙한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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