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88)화 (88/164)
  • 88화. 상처

    2021.01.04.

    "로아킨 놈들이 움직였다고?"

    "네. 전하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것처럼 굴고 있습니다."

    "내가 그 야만인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뻔히 알면서 이용해먹다니, 내 아우님은 참 못됐군."

    "아무래도 로아킨은 폐하의-."

    퍽-! 거칠게 날아간 펜이 펠시온의 뺨을 스쳤다. 펜촉에 긁힌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펠시온은 신음 하나 없이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미욱한 제가 실수했습니다."

    "실수가 아닌, 잘못이겠지."

    제르페누스는 낮게 으르렁거렸고 펠시온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언급할 일이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제르페누스는 로아킨 이야기만 나오면 답지 않게 예민해졌다. 그에게 있어서 로아킨은 자신에게 결함을 안겨준 원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말뿐인 사과는 의미 없지."

    제르페누스가 겨우 표정을 가다듬으며 한숨을 뱉었다. 감정적으로 굴지 않으려고 해도 야만인 소리만 들으면 자다가도 열불이 났다. 황실도 검은머리와 금안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수를 썼는데, 정작 로아킨은 잘도 녹색 눈의 혈통을 이어왔다. 그딴 열등한 종족들은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버리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때, 카벨레누스가 멈춰선 안 되는 거였어."

    "……."

    "노이슈타인에서 멈출 게 아니라, 로아킨까지 전부 쓸어버렸어야 했다고."

    "……."

    "정말이지, 그 계집은 여러모로 걸림돌이었어. 그 계집이 끼어드는 바람에 카벨레누스의 진군이 멈춰버렸고, 결국 그 벌레들이 다시금 제국 땅을 밟았잖아."

    제르페누스가 거칠게 탁상을 내리쳤다. 노이슈타인도, 그 전의 국가들도 전부 로아킨을 멸하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이슈타인에는 알리시아가 있었고 그녀는 카벨레누스를 멈춰 세웠다.

    "그 계집만 없었더라면, 이미 내 계획은 완성되었을 텐데. 그때 잠깐의 유희로 여기지 말고 당장이라도 목을 베지 않았던 게 정말로 한이 되어버렸어."

    "폐하답지 않으십니다."

    "나다운 게 뭐지?"

    "후회하지 않으시는 거 아닙니까."

    "후회라……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을 테니까."

    제르페누스의 입술이 뒤틀렸다.

    "펠시온."

    "네, 폐하."

    "그 노예 계집 때문에 할 일이 많아졌다고 해서 내 목적은 달라지진 않아. 나는 대륙을 전부 손에 넣을 거고, 결국 모든 것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 대단하다는 선대 황제들도 하지 못한 업적을 내가 세우게 되는 것이지. 제르페누스의 얼굴 위로 드디어 사라졌던 미소가 번졌다.

    "사람들은 나를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나는 카벨레누스의 자리를 빼앗은 자라고, 결함투성이라고 말이야."

    "……."

    "하지만 그 누구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진 않았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하든, 성과를 내든 간에 아무것도 의미 없었지."

    자신도 이딴 녹색 눈을 갖고 싶지 않았다. 제 이복동생이 그러하듯, 찬란한 금색 눈동자에 적통 후계자로 태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에게 덧씌워진 건 하자품의 낙인일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어리석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까맣게 모르지."

    "가진 자의 오만이죠."

    "맞아. 가진 자의 오만이지. 자기 스스로 피를 더럽히는 짓을 할 정도로 말이야. 나이가 그렇게 들었음에도 그 녀석은 너무 어려."

    얌전히 있으면 절로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있건만. 제르페누스는 비아냥거리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형의 미덕으로 다정하게 이끌어주기에는 카벨레누스는 너무 많은 선을 넘었다.

    "대신관 쪽은 어때?"

    "신전 측에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이제 곧 폐하와 약속했던 일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모양입니다."

    "좋아. 그들은 이런 일에 익숙하니 금방 끝나겠군. 카벨레누스가 붙여놓은 불과 함께, 대신관이 얹은 불까지 더해져 불길이 아주 거세질 거야."

    제르페누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예전의 수를 끄집어낸 대신관의 심보는 고약했지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늙은이가 만든 소문이 퍼지면, 내 아우님은 꽤나 곤란한 입장이 될 거야. 완벽한 후계자라는 틀이 오히려 그를 옭매고,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밟게 하겠지."

    "운이 나쁘면, 아예 미쳐버리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없어. 미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내 뜻에 따르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차라리 이성을 잃게 해서 목줄을 단단히 매어두는 편이 상대하긴 쉽지 않겠어?"

    애당초 대륙의 진짜 주인은 오로지 나뿐이니까. 제르페누스가 느긋하게 웃었다.

    "폐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상황에 따라 바로 움직일 수 있게 병사들을 준비해두겠습니다."

    "상태가 아슬아슬한 개들을 넉넉히 준비해두록 해. 어차피 죽을 목숨들인데 알차게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지."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제 슬슬 족쇄 채운 병사들을 양산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족쇄를 채우라는 건, 마물의 피를 주입한 병사들을 원하신다는 뜻이십니까?"

    "카벨레누스가 황제가 되면, 출전하기 어려워질 테니 대체품을 준비해둬야지. 이제 연구는 거의 완성 단계잖나."

    처음에야 불완전한 부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의 족쇄는 여러 실험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낸 상태였다. 지금은 생명을 소진하며 억지로 힘을 끌어오는 정도지만, 언젠가는 카벨레누스처럼 강인한 전사를 만드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었다.

    "펠시온, 네 잘못을 용서받고 싶다면 내 앞에 완벽한 군대를 완성해와. 그리고, 그것들로 내 앞을 막는 모든 것들을 처리해버려."

    물론, 가장 먼저 내 앞에 가져와야할 건 그 노예 계집의 목이겠지만. 제르페누스는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조명 아래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에는 광기인지, 열기인지 알 수 없는 흥분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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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알리시아는 굳게 닫힌 방문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미카엘이 안에 있을 테니 노크를 해야겠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제임스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다 만 이야기가 나올 텐데, 굳이 그걸 꺼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문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

    "……."

    "언제 왔어?"

    "방금. 문을 두드리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문을 열어버려서 당황한 참이었어."

    어설픈 변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할 말이 없다.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제임스와의 관계가 나빠지질 원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알리시아에겐 몇 안 되는 가까운 이들 중 하나였다. 지금껏 쌓아온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미카엘은 아까 잠들었어. 그림 그리는 게 너무 힘들었나봐. 오늘도 스케치를 몇 번이나 고쳤는지 몰라."

    "미카엘이 귀찮게 한 모양이네."

    "잠깐 시간내봐주는 것뿐인 걸."

    "그래도 미안한걸. 나와 미카엘 때문에 시간을 빼앗긴 게 아닌가 해서."

    "아냐. 나도 좋았어. 요즘 신작을 구상하다보니 너무 예민해져 있었거든.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알리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제임스가 굳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더욱 입장이 조심스러워졌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는 건데. 나는 당분간 그림 작업에 전념할 거야."

    알리시아의 반응을 눈치 챈 제임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도 슬슬 내 본업을 찾아야지."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괜찮지 않으면? 그러면 어떡할 건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결국 제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상황이 오든 간에 자신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잃을 게 두려웠다.

    "내가 계속 여기서 머물 순 없잖아."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고."

    "내가 떠나면 너와 미카엘만 남게 되잖아."

    제임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제 그 사람 많이 달라졌으니까."

    "언제 돌변할지 몰라. 그런 사람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미카엘을 지키는 데에는 그 사람이 가장 적임자야. 그리고……"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한 후, 다시금 천천히 입을 뗐다.

    "솔직히 말하면, 네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야. 네 말대로 상처 입은 와중에도 나는 계속 그 사람을 기다려왔고, 그리워했으니까."

    "……."

    "이곳에 남고 싶다는 마음이 꼭 미카엘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지 모르겠어."

    알리시아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나, 미련이 남아버렸어."

    "미련?"

    "내 목숨 같은 거, 미카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살고 싶어졌어.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제임스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다가 알리시아의 떨리는 어깨를 보고는 말을 삼켰다.

    "그 사람이 내겐 그런 사람이야. 예전에도, 지금에도 항상 그랬어. 그는 어떤 식이든 나를 살고 싶게 만들어."

    "……."

    "그러니까 정말로 나는 괜찮아.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굳이 나 때문에 네 인생을 허비할 필요 없어."

    "……내가 뭘 걱정한 줄 알고 괜찮다는 소리를 해."

    제임스는 이를 꽉 다물었다.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는 가련했지만 제게만큼은 그 모습이 비수보다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거 알아? 너는 내게 항상 괜찮다고만 했어. 무슨 일이든 다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이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제임스."

    "너는 배려였겠지. 너 나름대로는 선을 지킨 걸 거야. 하지만 나는 그 배려에 말라갔어. 네가 그어놓은 선 앞에서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느라 바빴지."

    제임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차라리 이기적으로 굴었으면 원망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알리시아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역겹게 느껴져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그거 알아? 너는 항상 애정에 목말라 있어. 그래서 타인이 베푼 호의에 쉽게 흔들리고, 네게 절대적인 애정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거야."

    "……."

    "그런데, 그거 정상적인 거 아니야."

    머릿속으로는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악의에 찬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상처라도 내고 싶었다. 자신은 이렇게 혼자 추한 꼴로 남겨두고 등을 돌린 여자를 어떻게서든 상처 입히고 싶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렇지 않고선 누굴 원망해야할지 모르기에.

    "네가 하고 있는 건 사랑도 뭣도 아니고, 그냥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뿐이니까. 애당초 제 아들조차 그런 존재로 보고 있는 네가 무슨 사랑을 하겠어?"

    "……."

    이 분노는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걸까. 시뻘겋게 물든 눈으로 자신을 향해 분노를 토해내는 제임스를 바라보며 알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슈바르한 대공은 자기 수준에 맞는 여자를 맞이할 테고, 미카엘을 아들로 받아들여주지도 않을 거야."

    "……."

    "너도 내 누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겠지. 귀족과 평민이라는 건 결국 그런 거거든."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뭐?"

    "너는 네가 믿고 싶은 걸 믿어. 나도 그럴 테니까."

    알리시아는 두 손을 힘주어 깍지 꼈다. 울음을 억지로 참아내는 그녀의 눈에는 핏발이 벌겋게 서 있었다. * * * 괜찮은 척 포장해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상처 받는 법은 익숙했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상처 주는 자들에게 반격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상처는 아팠다. 기대가 없던 상대라면 모를까, 충분히 관계를 쌓고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믿어왔기에 더욱 상처가 크게 느껴졌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자신의 방문 앞에 주저앉았다. 눈가가 시큰거렸지만, 방 안에는 잠든 아이가 있어서 차마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알리시아?"

    그때였다.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리시아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조명을 등져 어둡게만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금색 눈동자는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아니. 그 전에 그 얼굴은……."

    카벨레누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곧장 몸을 굽혔다. 알리시아와 시선을 맞추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울음을 참아내느라 발갛게 물든 알리시아의 눈가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갑자기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꽉 다문 잇새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에는 노기가 섞여 있었다.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팔을 뻗어 카벨레누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참으려고 했던 눈물은 타인의 온기에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카벨레누스는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죽여 우는 알리시아를 지켜보다가 이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혹시라도 아이에게 울음소리가 들릴까,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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