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84)화 (84/164)
  • 84화. 미워하지 않아요

    2020.12.21.

    "안녕하세요! 저희 저번에 봤었죠?"

    "……."

    "그때, 서재에서 말입니다.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지만, 그때 제가 서재에 들어가서 영애를……."

    사내가 어설프게 손을 휘적거리며 자신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알리시아는 빤히 그를 올려보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뇨. 기억나요."

    "정말입니까?"

    "네. 기억하고 있어요."

    흐물흐물 풀어진 사내의 입가를 보며 알리시아는 슬쩍 등 뒤를 만졌다. 사내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정작 그녀는 친근한 척 구는 사내가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이방인 사내가 자신에게 친한 척 할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카벨레누스의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반가운 얼굴이 보여서요."

    "반가운 얼굴이요?"

    "영애께서는 제가 아는 사람을 많이 닮았거든요."

    "……."

    "으음, 이렇게 말하니 뻔한 수작을 거는 것 같군요."

    사내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큼직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사내의 미소는 어린 아이의 것처럼 해맑았다.

    "미리 말해두지만, 수작을 걸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좀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데요?"

    "그게, 다소 외람된 말씀인 줄은 알지만, 일단 영애의 이름을 듣고 싶은데……."

    "제 이름이요?"

    알리시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로아킨에선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일단 서로의 이름부터 알아야 하거든요."

    "그건 어렵겠는걸요."

    "네?"

    알리시아가 표정을 굳히자, 사내는 당황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는 신사께 이름을 들려드릴 때에는 먼저 신사분의 이름을 들어야 한다고 들은 터라서요."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이름도 이야기하지 않았네요. 제이름은 펜리르…… 아니! 그게 아니라!"

    펜리르는 당황한 나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는 능숙한 편인데, 절 똑바로 올려다보는 잿빛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마치 겁쟁이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긴장하세요?"

    "아, 네! 네! 제가 너무 긴장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알리시아는 싱긋 웃었고 펜리르의 입꼬리는 실룩거렸다. 그저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갈색 머리카락도, 잿빛 눈동자도 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아이를 연상케 하는 것들을 보고 있자면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가 누굴 닮았기에 그러시는 걸까요."

    "그게……."

    "말씀하기 곤란하신가요?"

    "영애께서 듣기에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말씀하기 어려우시다면 안 하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예의상 꺼낸 말이었다. 알리시아는 사내와 오래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아이입니다."

    "아이요? 젊어보이시는데, 벌써 결혼을-."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펜리르가 황급히 소리치며 알리시아의 말을 막았다. 알리시아는 토끼눈으로 펜리르를 빤히 올려다봤다. 펜리르는 그녀가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미혼입니다. 애당초 제가 말하는 아이는 옛날에 만난 사이인 걸요."

    "그럼에도 기억에 남을 정도면 꽤 깊은 사이셨나봐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펜리르는 자신도 모르게 알리시아의 눈을 피했다. 여자의 반짝이는 잿빛 눈동자는 그가 기억하는 아이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같은 색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괜히 갈증이 치밀었다.

    "……그 아이에게 사과해야 하는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사과요?"

    "네. 사과요."

    펜리르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그때였다. 알리시아의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기껏 표정을 고쳤는데 도로 물거품이 되었다. 펜리르는 가쁜 숨을 내쉬는 알리시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자신이 얼떨결에 그녀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굳었다.

    "아, 네. 괜찮아요."

    알리시아는 웃으며 잡힌 손을 뺐다. 펜리르는 한순간에 멀어진 온기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아뇨. 최근 무리를 해서 그럴 뿐이지, 큰 문제는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몸에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니, 의사를-."

    "괜찮아요, 정말로."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뒤로 물러났다. 펜리르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상처 입은 짐승이 그러하듯 경계 어린 시선에 괜히 목이 탔다. 머리카락색이나, 눈동자색을 제외하곤 여자와 아이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눈빛이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가 공주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을 가졌던 것처럼.

    16638395163642.jpg

    * * *

    "자꾸 로아킨 사람과 만난다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주 겹쳐서요."

    알리시아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번 어디선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웃어 보이는 사내는 여러모로 수상해보였다.

    "젊은 사내였나, 아니면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였나?"

    "젊은 사내였어요. 당신보다 살짝 어려 보이는."

    "그럼 호위 쪽인가보군."

    "호위요?"

    "정확히는 그렇게 소개만 한 거지만."

    카벨레누스는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 이렇게 감추지 않으면 먼저 손이 나갈 것 같아서였다.

    "그럼 다른 정체가 있다는 건가요?"

    "그자는 자신을 펜릴이라고 소개했지만, 그건 제국식 이름이거든. 제국을 증오하는 로아킨이 쓸 리 없는 이름이지."

    "호감을 살 생각일 수도 있잖아요."

    "우리 측에 잘 보일 심산으로 제국식 발음을 썼다면, 호위가 아니라 주요인사 쪽이 썼어야 했지."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로아킨 맹주의 아들 중, 펜리르라는 이름을 쓰는 자가 있더군."

    "맹주의 아들이라면……."

    알리시아는 무의식적으로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 전의 정혼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정혼 이야기에서 언급된 인물은 자신보다 세 살 어린 맹주의 막내 아들이었다.

    "일반적인 국가로 표현하면, 왕자인 셈이지."

    "그가 진짜 왕자일까요?"

    "그건 모르지. 본인이 직접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상, 그건 추측에 불과하니까."

    "……."

    "걱정돼?"

    "네, 아무래도 속내를 모르는 상대는 불안하니까요."

    알리시아는 스스로를 끌어안듯 두 팔로 자신을 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적어도 이 성 안에선 그대와 미카엘이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어."

    "……."

    "말했잖아. 이 성에선 무엇도 내 눈과 귀를 피해가지 못한다고."

    속눈썹 아래에 그늘진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쥐새끼에게 당한 건 한 번이면 족했다. 다신 제 둥지가 털리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지난 8년은 결코 가벼운 시간이 아니었다.

    "괜찮아. 숨을 필요 없어. 그대는 평소처럼 일상을 보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걸 가져. 얼마든지 그래도 돼."

    그렇게 해줄 자신이 있어서 찾은 거니까. 카벨레누스는 그 말과 함께, 손을 좀 더 주머니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안 보이면 보고 싶고, 보면 만지고 싶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손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끝낼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손대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그나마 안심이 되네요. 그리고 사실 그 사람 인상은 나쁘지 않아 보였거든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풀렸으면 하는 마음에 던진 말이었는데, 가벼운 농에도 사내의 입매는 쉽게 삐딱해졌다.

    "좋은 인상이었나?"

    "잠깐 본 게 다지만, 잘 웃는 편이라서 보기 좋았어요."

    "보기 좋았다라……."

    카벨레누스의 오른쪽 눈썹이 살짝 위를 향했다.

    "키가 당신과 비슷해 보여서 더 신기했던 것도 있어요. 슈바르한에서도 당신만큼 큰 사람은 드물잖아요."

    "그 사내를 관심 있게 봤나보군."

    "아무래도 수상하단 생각이 드니…… 설마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알리시아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그녀의 말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는 듯,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나는 질투가 많다고."

    "지금은 질투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잖아요."

    "내겐 중요해. 아쉬운 건 내 쪽이니까."

    카벨레누스가 슬쩍 알리시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알리시아는 다가온 사내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나는 그른 듯해. 처음에는 그냥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점점 더 욕심이 나."

    "욕심이요?"

    "그래. 욕심. 그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대가 내게 웃어줄 때마다 점점 더 많은 걸 바라게 되거든."

    미안. 성질이 고운 사내가 못 돼서.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사내는 여자를 알았다. 알고 있는 만큼 더 안달이 났고, 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

    "뭘 원하시는데요?"

    "그대가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그 이상의 것."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알리시아는 가까워진 시선에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숨결이 살갗에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듯한데 사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양 가만히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쿵쿵 뛰는 가슴을 달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절 잡아먹을 듯 흉흉한 눈을 한 주제에 애써 참아내는 모습이 기꺼웠다.

    "이번에도 그대 말이 옳았어."

    "뭐가요?"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대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으니까."

    "미워하지 않아요. 이렇게 노력하시는데 어떻게 미워해요."

    알리시아의 손이 카벨레누스의 뺨에 닿았다.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알리시아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그 말은 반칙이지."

    "왜 반칙인데요."

    "그런 말을 들으면 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잖아."

    카벨레누스가 어울리지 않게 힘없이 중얼거렸다. 알리시아는 양 입술을 끌어올리며 부드럽게 카벨레누스의 뺨을 쓸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단단한 몸을 가진 사내라도 얼굴은 말랑거렸다. 그 모순에 괜히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제 말이 항상 맞는 건 아니에요. 저도 틀린 게 있는 걸요."

    "뭐가 틀렸는데."

    "당신이요."

    알리시아의 양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당신이 영영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틀렸죠."

    "……."

    "카벨레누스."

    "……."

    "나는 이제 당신을 믿어요.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고 앞으로 더 나아질 거잖아요."

    알리시아는 두 팔을 뻗어 카벨레누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카벨레누스는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설프게 허리를 굽히고 그대로 굳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나와 미카엘을 지켜주겠죠. 그리고, 미카엘에게도 분명 좋은 아버지가 되어줄 거예요."

    카벨레누스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알리시아는 눈을 감았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말에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말 하나에도 조심해야 하고, 어떤 소원이든 간절하게 말하면 이루어지는 법이라고. 알리시아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말에 힘이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16638395163647.jpg

    * * *

    "푹 쉬었나?"

    "대공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그래?"

    카벨레누스는 삐딱하게 턱을 괸 채, 옆에 선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는 능숙하게 테이블에 준비한 차를 내려놓았다.

    "라프산 차네. 수면에 도움이 되는 차지."

    "……."

    "나는 이런 건 별로지만, 그대에겐 필요한 것 같아서."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펜리르에게 닿았다. 펜리르는 닿은 시선에 잠시 고심하다가 이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전하의 궁에는 눈과 귀가 많으신 모양입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객은 조심할 필요가 있어서."

    "이미 제 정체에 대해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안다기보다는 추측한 것뿐이니 아직은 확신이 필요하지."

    카벨레누스는 태연하게 엄지로 턱을 어루만졌다. 마치 사냥을 코앞에 둔 맹수 같은 시선이었다.

    "확신이라. 확실히 전하께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신중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펜릴을 로아킨식으로 발음하면 펜리르, 그리고 마침 로아킨 맹주의 막내 아들 이름도 펜리르였으니까."

    "로아킨에선 흔한 이름입니다."

    펜리르는 능청스럽게 웃었지만 카벨레누스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펜리르를 천천히 훑으며 탐색하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건네받은 초상화 속 외형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군."

    "……."

    "성인식 때 그린 초상화니 당연한 건가. 로아킨은 성년도 빠르니, 지금 나이와 비교하니 더욱 차이가 있어 보여."

    "초상화는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내 부하들은 그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유능하거든."

    카벨레누스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로아킨의 성년은 열다섯 살이고, 올해는 맹주의 막내 아들이 성인식을 치른 지 딱 십 년이 되던 되는 해이다. 십 년의 시간만큼 청년의 얼굴은 초상화 속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모습이 완벽하게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