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83)화 (83/164)
  • 83화. 불청객

    2020.12.17.

    "오래전의 정혼이지 않으냐. 심지어 그 공주는 네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고."

    "그 정도는 나도 압니다."

    "안다는 녀석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

    "물론 동정이야 가질 순 있어. 그땐 너도 어렸고, 학대 받던 공주가 얼마든지 가여워 보일 순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지난 일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어린 펜리르를 데리고 노이슈타인에 가지 않았을 테지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마저도 지난 일이었다.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너는 이미 할 만큼 했잖아."

    "할 만큼 했다고 하기엔 내겐 딱히 뭔가를 해본 기억이 없는 걸요."

    오고 가던 정혼은 흐지부지되었지만, 마음은 변치 않았다. 성년이 되면 다시금 청혼서를 넣어볼 생각에 부풀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꿈은 노이슈타인의 멸망으로 끝이 났다. 그뿐이었다.

    "과거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널 데리고 노이슈타인으로 가지 않았을 거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었다면, 저는 그때 그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을 겁니다."

    "그놈의 싸구려 동정심은 참 오래도 가는구나."

    "굳이 구분하자면 동정심이라기보다는 수치심에 가까운 감정이지만요."

    아이를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저 몰래 숨어서 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잿더미를 끌어안고 서럽게 엉엉 울던 아이의 모습이 파편처럼 가슴에 박혀 빠질 줄 몰랐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영감님이 내 형제들을 제치고 날 선택한 건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잖아요?"

    "혹시 모르지. 네놈이 거하게 내 뒤통수를 쳐줄지도."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은 마쇼. 내가 정말로 대공에게 복수심이 있었으면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않을 테니까요."

    펜리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체르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펜리르가 무의식적으로 가슴에 품은 검을 어루만지는 걸 본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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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뭘 그렇게 열심히 찾는 거야?"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알아보고 싶은 거?"

    "나는 제국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잖아.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알아보는 거야."

    알리시아는 제임스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벨레누스는 원하는 정보는 얼마든지 알려주겠노라고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정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제국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했다.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물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있으면 더 좋고.'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마물의 삽화를 만지작거렸다. 할 수 있다면 카벨레누스의 족쇄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소원을 이루어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카벨레누스의 족쇄를 풀어달라는 소원을 빌어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아니, 실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겠지만.'

    알리시아의 손끝이 꼼지락거렸다. 혹시라도 오게 될 최악의 상황에서 망설이고 싶지 않았기에 미련을 가질 일은 더는 만들지 않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미련이 하나 더 생겨버렸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지만 달라진 관계는 미련을 남겼다. 무작정 제 생명을 깎아먹기보다는 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보고 싶었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지금은 죽는 게 두려웠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나도 도와줄게. 내가 보고 요약해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잖아."

    "아냐. 이왕이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요약본을 보면 놓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잖아."

    "그러면, 책 목록들을 정리해주는 건 어때?"

    "그것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마음만 받을게."

    "그러면-."

    "제임스."

    알리시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고 제임스는 마주친 시선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응, 왜? 도와줄 게 있어?"

    "마음은 고맙지만, 굳이 날 도우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네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그랬지."

    "휴식은 충분히 취하고 있어."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제임스는 슬쩍 알리시아의 옆에 섰다. 알리시아는 책 위에 드리워진 그늘에 얼굴을 찡그렸다.

    "애당초 네가 이럴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그 사람이 알아서 해줄 텐데."

    "……그 말, 무슨 뜻이야?"

    알리시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다들 그래. 슈바르한 대공과 황제가 붙으면 당연히 슈바르한 대공이 이길 거라고."

    제임스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이 미카엘을 지켜주고 있는데, 굳이 네가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네가 미카엘에게 애착이 크다는 거 알지만, 네 몸도 챙겨야지."

    "나는 최선을 다할 뿐이야. 낙관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그러다가 미카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분명 후회할 테니까."

    "너는 너무 걱정이 많아."

    "나는 그저 내 아이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을 뿐이야."

    미카엘이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하니까. 알리시아는 애써 뒷말은 삼켰다.

    "……그럼, 그 후엔?"

    "그 후?"

    "모든 일이 끝나고 떠나는 건 확실한 거지?"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먼 미래 일을 지금 운운하기보단 현재에 집중하고 싶어."

    "그러면 이곳에 영영 남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야?"

    "……."

    책장을 넘기던 알리시아의 손이 멈췄다. 제임스는 그제야 아차 싶어 조심스럽게 알리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말했잖아. 나는 현재에 집중하고 싶다고."

    "미안해, 나는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시선을 피하는 제임스에 알리시아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제임스의 본성 자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서 죽은 누이를 투영했고 자신을 도우는 것으로 쌓였던 죄책감을 풀곤 했다. 예전이라면 다 알면서도 받아주던 그 마음이 머릿속이 복잡한 지금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이러지 않으면 너는 널 아끼지 않잖아."

    "잠은 충분히 자고 있어. 틈틈이 쉬고 있고, 식사도 잘해. 문제될 건 없어."

    미카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분위기에 예민했다. 아이에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었던 뿐더러, 그런 건 카벨레누스가 용납하지 않았다.

    "날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나 어린애 아니야. 내 상태는 내가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어."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뭐?"

    "너는 계속 미카엘의 안전을 운운했지만, 나는 이제는 다른 생각도 들어."

    제임스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은발 아래로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다른 생각이 뭔데?"

    "미카엘을 핑계로 그 사람과 다시 잘해보고 싶은 거잖아."

    "……."

    "잊지 못했잖아. 계속 그리워했잖아. 그리고, 이젠 그 사람이 미카엘도 받아들여줬으니까-."

    "그만해. 더 말하면 나 정말 화낼 거야."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어찌되었든 간에 제임스는 알리시아에게 있어선 은인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알리시아가 자립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도움이 컸으니까.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화낸다는 건, 찔리는 게 있다는 뜻 아냐?"

    "찔리는 게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말을 할 거면 제대로 해."

    "말하면 싸우게 될 테니까."

    알리시아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싸워? 왜? 너 정말로 그 사람과-."

    "그 사람, 결혼했다면서!"

    알리시아는 울컥해서 외쳤다가 이내 이마를 짚었다. 그 문제에 대해선 조용히 덮을 셈이었지만, 한 번 뱉은 말을 되돌릴 순 없었다.

    "너, 내게 거짓말했잖아. 그 사람, 결혼했다고."

    "그건 나도 그냥 소문을 들은 거라서-."

    "정말 소문을 들은 것뿐이야? 단지 그것뿐이야?"

    "……."

    "내가 눈 먼 장님이라서 모른 게 아니야. 귀가 멀어서 아무런 말도 듣지 않은 게 아니라고."

    그냥 모른 척 해준 거지. 알리시아는 헛웃음을 뱉었다. 미카엘을 키우는 데에만 급급해 그녀는 소문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아는 대부분의 소식들은 수도를 왕래하는 제임스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고, 또 슈바르한에 오고 알았어. 내가 아는 것과 사실이 꽤나 다르다는 거 말이야."

    "알리시아, 그건!"

    "일부러 지적하지 않았어.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아니까. 그냥 날 위한 거라고 그렇게 넘어갈 참이었어."

    "……."

    "네가 거짓말한 건, 그 사람에 관한 것들뿐이었잖아. 내 미련을 끊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

    알리시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반대로 제임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보다는 내 마음을 외면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너는 항상 그렇잖아. 다 알면서도 모른 척 고개를 돌리지."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니까."

    "그 정도가 뭔데?"

    "네가 나를 통해 누이를 보는 거."

    알리시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소중한 이를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괜히 입안이 썼다. 제임스에게 마음이 갔던 건 같은 아픔을 공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이라고?"

    "비난하려는 건 아니야. 나도 아는 걸.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기력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거잖아."

    "……."

    "하지만, 나는 네 누이가 아니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나도 알아! 네가 내 누이가 아닌 것 정도는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어!"

    제임스가 거칠게 소리쳤다. 알리시아게서 죽은 누이를 봤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었다. 그녀는 단지 누이로만 여겼다면 이런 감정이 들 리도 없었다.

    "나는 네가 내 누이가 아니라……."

    제임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음 말을 하면 그동안 쌓아왔던 관계는 끝이었다. 그나마 알리시아의 옆에 있을 수 있었던 건, 선을 지켜왔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제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끝이었다. 알리시아는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모를 테고, 자신도 그 자리에 머물 뿐이니까.

    '나는 뭐든 할 수 있지만 네놈은 그렇겐 못 하거든. 혹시나 지금의 관계조차 잃을까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지.'

    제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벨레누스과 알리시아의 관계는 바닥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아무것도 잃을 게 없었기에 그만큼 그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며 자위했지만 내심 알고 있었다. 같은 상황이었다고 해도 자신은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거. 그래서 더 속이 타고 미칠 것 같았다. 치미는 감정을 어쩔 수 없었다. 쨍그랑-! 그때였다. 갑자기 끼어든 의문의 소리에 누가 먼저라 할 것없이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살짝 벌어진 서재 문 사이론 급히 브로치를 줍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불청객은 카벨레누스 못지 않게 키가 무척이나 큰 사내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해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짧은 머리가 퍽 잘 어울렸고, 햇빛이 그을린 갈색 피부는 이질적이었지만 그만큼 눈길을 끌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엿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쏟아진 시선에 금방 사내가 멋쩍게 웃었다. 알리시아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표정을 풀었다. 처음 보는 사내였지만 그가 누군지는 대충 짐작은 갔다. 어설프게 코트를 두르고 있긴 하지만 외투 안쪽으로 보이는 옷은 슈바르한의 것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의 눈동자는 짙은 녹색이었다.

    "전하의 손님이신가보군요."

    "아, 절 아십니까?"

    "네, 조금은요."

    알리시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호기심 섞인 사내의 눈빛을 알았지만 일부러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손님의 방과는 떨어져 있을 텐데요."

    물론 사내의 수상한 행적을 모른 척할 생각도 없고. 알리시아가 머무는 서고는 성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지만, 낯선 사내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방인이 방에서 멀찍이 떨어진 서재를 찾을 만한 이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잠자리가 바뀌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아서요. 지루한 책이라도 읽으면 잠이 오지 않을까 싶어 서재를 찾은 건데……."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어설픈 웃음만 흘렸다. 제 변명이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정말로 몰래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아서 조용히 나가려다가 그만……."

    "괜찮아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제 실수 아닙니까."

    "귀빈께서는 책을 찾으러 오신 거고, 그 시간대 우연히 제가 있었을 뿐이니까요."

    알리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수상하다 해도 단지 그것만으로 꼬투리를 잡는 건 무리였다. 지금은 의뭉스러운 구석을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금세 표정이 밝아진 사내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책을 찾으러 오셨다고 하셨죠? 편히 둘러보세요. 슈바르한의 서고에는 책이 무척 많아 원하는 책을 고르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리거든요."

    알리시아는 사내를 바라보면서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사내가 아군이 될지, 적군이 될지는 모르나, 적어도 확실한 건 오늘의 독서 시간은 끝났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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