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원치 않은 존재
2020.06.22.
"아직 낯설어서 그러실 거예요."
모르코 부인이 알리시아의 등을 다독였다. 알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아이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건 카벨레누스, 하나면 충분했다. 지금으로선 그 이상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낯선 존재가 갑자기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 만하잖아요."
"……."
"무엇보다 아직 임신이라고 확정된 것도 아니고요."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못되게도 모르코 부인의 말을 듣는 순간, 임신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부터 먼저 들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알리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군가 말하길, 모성애는 본능이라고 했다. 제 자식이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 당연하다는 감정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아이의 존재를 곱씹어도 소용없었다.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제 움트기 시작한 생명을 순수하게 축복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는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었다. 오랜 생각 끝에 알리시아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일이 아니잖아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당연히 좋은 일이죠."
모르코 부인이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태어날 아이에게 잘못은 없었다. 아이는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축복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분명 사랑스러울 거예요."
"……."
"전하를 닮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가씨를 닮을 수도 있겠죠."
"전하를 닮아……."
알리시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모르코 부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줬다.
"어느 쪽을 닮든 사랑스러운 아이일 거예요. 두 분 사이의 결실이기도 하고요."
"……."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그만큼 훌륭하게 성장하시겠죠. 슈바르한의 차기 주인답게요."
모르코 부인이 열심히 설득했음에도, 알리시아는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가 보아온 부모는 두 부류뿐이었으니까. 가치를 재고 따지든, 아니면 자식을 위해 제 모든 걸 희생하든. 알리시아는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불현듯 끼어든 이물질 같은 존재의 가치를 재단하는 건 물론, 그 존재를 위한 삶을 사는 것도 싫었다.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의사는 나중에 부르도록 해요. 아가씨의 마음이 편해진 후에요."
모르코 부인이 걱정 어린 눈으로 알리시아를 살폈다. 하나, 표정이 사라진 알리시아의 얼굴에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의사를 불러줘."
"아가씨."
"나중에 확인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잖아. 그냥 확인할래. 그게 좋겠어."
알리시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반복적으로 배를 쓸어내렸지만, 아이를 향한 감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동 없는 아이는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임신이 아니길 간절하게 바랄 정도로.
* * *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어보세요."
"이렇게?"
"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의사는 능숙하게 알리시아의 상태를 확인한 후,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차트를 적어나갔다. 알리시아는 긴장 어린 눈으로 의사의 기색을 살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안하고 죄스러웠지만 할 수 없었다. 죄책감을 감내하더라도 알리시아는 자신이 임신이 아니길 바랐다.
"어떻지?"
"큰 문제는 없어보이십니다. 다만……."
의사는 알리시아의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모르코 부인이 앞으로 나섰다. 의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임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소리에 알리시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기쁨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임신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음에도 정작 아니라는 말을 듣자, 기분이 이상했기에.
"초기라서 확인되지 않는 건 아닌가."
모르코 부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제 짧은 소견으로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니라고?"
"잠이 부쩍 느신 것도, 입맛이 변하시거나, 헛구역질을 하시는 것도 분명 임신일 때 보이는 증상이 맞습니다. 그런데 진단해본 결과론 아가씨께는 임신이라 확정내릴 만한 소견이 보이지 않습니다."
"확실한 건가?"
"절 못 믿으시겠다면, 다른 의사들을 불러보십시오. 다들 같은 소리를 할 겁니다."
의사는 모르코 부인의 눈초리에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하지만-."
"괜찮아."
알리시아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의사를 노려보던 모르코 부인은 알리시아의 제지에 결국 한숨을 푹 쉬며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너무 성급하게 말씀드린 것 같군요."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 있었잖아. 이해해."
알리시아는 웃었지만, 어쩐지 몸에 힘이 없었다.
'이제와서 아쉬운 마음이라도 드는 건가.'
알리시아는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지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그렇다면, 아가씨께선 왜 그런 증상을 보이시는 거지?"
모르코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제프의 추측대로 카벨레누스의 부재로 인해 알리시아가 그런 행동을 보였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알리시아는 어느 순간부턴 특정 음식의 냄새만 맡아도 역겨워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모르면 도대체 누가 자네를 믿고 진료를 맡기겠나."
"송구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이상이 있는 건 아닙니다. 아가씨께선 마르신 편이긴 하지만, 충분히 건강하십니다."
모르코 부인의 매서운 기세에 의사는 몸을 움츠렸지만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슈바르한에서 제일 가는 의사였다. 제 진단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알리시아가 보이고 있는건 임신 초기 증상이었지만, 그녀에게선 약간의 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임신을 갈망하면 상상으로도 증상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다곤 들었는데……."
의사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눈치를 살폈다. 귀족의 심기를 거슬려서 좋은 건 없었다.
"그럴 리 없네."
"그렇다면, 저로선 내릴 수 있는 진단이 없습니다."
냉담한 모르코 부인의 반응에 의사의 어깨가 더욱 움츠려들었다. 그 역시, 알리시아의 증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말씀해주신대로 너무 임신 초기라서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후에 한 번 더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모르코 부인은 아쉬움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알리시아를 슬쩍 확인했다.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알리시아는 아직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보였다. 이 김에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 * *
"임신이 아니었다고?"
"네. 의사의 진단으론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가. 잘됐군."
카벨레누스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제프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서류에 서명하는 카벨레누스의 손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가제프는 상관의 무덤덤함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아가씨께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직 일이 덜 끝났다만."
"실망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실망?"
"아가씨께서도 임신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으셨을 테니까요."
카벨레누스의 손이 겨우 멈췄다. 가제프는 살짝 초조해진 기분으로 곧장 말을 이었다.
"보통은 그러니까요."
"……."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춰주시면 좋을 겁니다. 아가씨께서는 전하께 많이 의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가제프가 어색하게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주인이었고, 가제프는 여전히 제 상관을 존경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한 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카벨레누스는 이미 아이에 대한 처분을 결정내렸고 남은 건 실행뿐이었다. 그걸 알기에 가제프는 알리시아가 임신이 아니라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가 부쩍 두려워졌다. 추후에 두 사람의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그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 카벨레누스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아이를 치워버릴 수 있었다. 아이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다름 아닌 아이의 친부가 될 것이었다.
"어쩌면, 남몰래 울고 계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이미 알리시아의 반응을 전해들었음에도 가제프는 애써 모른 척 굴었다. 카벨레누스는 이례적이라 해도 좋을만큼 알리시아에겐 너그러웠고, 그녀에게 맞추기 위해 애썼다. 카벨레누스에게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선 알리시아를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알리시아에게 아이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걸 인지시켜주면 진짜 아이가 생겼을 때는 지금보단 나은 반응을 기대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것이 가제프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
다행히 핑계가 통했는지, 카벨레누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부족하지만 제가 잠시 자리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
"……왜 그러십니까."
가제프가 조심스럽게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은 원래 이렇게까지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건만, 삐딱하게 기울어진 카벨레누스의 입매를 보니 괜히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냥 가는 것보다 기분이 좀 나아질 만한 걸 준비해가는 편이 나을 듯한데."
"아, 네. 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가제프는 일단 다급하게 고개부터 끄덕였다.
"좋아할 만한 게 뭐 있을까."
카벨레누스는 턱을 괸 채 검지로 툭툭 책상을 두들겼다. 가제프는 그 모습을 살피며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이렇게 긴장한 건 정말로 오래간만이었다. 아니, 궁지로 몰렸던 마르카타 전투 때조차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때조차 대답을 재촉하듯 툭툭 울리는 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느껴지진 않았으니까.
"아가씨에 관한 일은 아무래도 전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나쁘지 않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빤히 바라보는 상관의 표정은 썩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가제프는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정정했다.
"이모님께 한 번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는 게 좋겠군. 다만……."
이번에는 정답일 줄 알았는데 이것도 아닌가. 가제프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의 감각이 서늘하다 못해 오싹했다.
"왜 그러십니까?"
가제프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억지로 양 입술 끝을 올렸지만, 상관의 표정은 쉬이 풀어질 줄을 몰랐다.
"……."
"……."
침묵이 이어지는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건 단지 착각일까. 가제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상관의 눈치만 살피며 연신 눈만 굴렸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부하의 사정을 봐줄만큼 너그러운 상관이 아니었다. 가제프가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 기다림이 지옥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가제프는 한시라도 빨리 상관의 입이 열리길 고대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아니야. 됐어. 신경쓰지마."
가제프의 바람이 통한 건지, 다행히 카벨레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상관하지 말고, 일단 모르코 부인에게 연락부터 넣도록 해."
카벨레누스는 대충 손을 휘저으며 의자에 상체를 기댔다. 오늘 아침까지만해도 퍽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는데, 불현듯 찾아온 의문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알리시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엔 그는 여전히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알리시아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세어봐도 손가락을 다 접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건 산책과 공부, 그리고 그림 정도인가…….'
창밖을 확인하는 카벨레누스의 반듯한 이마에 미약하게 주름이 잡혔다. 굳이 나가보지 않아도 알 정도로 오늘은 눈발이 거셌다. 이런 날씨에 산책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공부하자는 것도 우습고.'
카벨레누스의 주름이 좀 더 깊어졌다. 우울한 상대에게 공부를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만, 애당초 사내는 가르치는 데에 소질이 없었다.
'남은 건 그림 정도인데…….'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카벨레누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놈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알리시아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화가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불쾌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벨레누스는 고심했지만, 제임스는 제 재주로 얼마든지 알리시아를 웃게 해줄 수 있었을 테니까.
'……우습군, 정말로.'
무거운 거라곤 캔버스 정도나 들어봤을 유약한 화가 나부랭이가 부러워질 줄은 몰랐는데. 카벨레누스는 입술을 이죽거리며 조소했다. 그의 이마 주름은 이제 눈에 확연해질 정도로 깊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