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31)화 (31/164)

31화. 개와 늑대

2020.06.18.

"제 부적이 전하의 마음에 안 들면요?"

"그럴 리 없지."

"제가 뭘 드릴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세요."

"상관없어. 그것이 무엇이든 내겐 달가울 뿐이니까."

진심이었다. 어떤 물건이든 큰 차이는 없었다. 결핍과는 거리가 먼 사내에게는 이미 물건은 차고 넘쳤다. 중요한 건 알리시아가 그것을 고르기 위해 얼마나 절 생각했느냐일 뿐이었다. 사내는 항상 여자의 조그마한 머릿속이 저로 꽉 찼으면 했기에. 카벨레누스는 와인과 함께 감춰둔 속내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계속 생각해볼게요."

살짝 달아오른 뺨이 한 입 깨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보기 좋았다.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알리시아의 입술을 매만졌다. 화들짝 놀란 알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벨레누스를 바라봤지만, 사내는 모른 척 웃었다.

"소스가 묻어서."

카벨레누스가 느긋하게 냅킨에 손을 닦았다.

"말씀해주셨으면, 제가 닦았을 텐데요."

알리시아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색한 몸짓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카벨레누스는 수확철의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물든 알리시아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소스 같은 건 묻지 않았지만, 태연한 사내의 낯에선 거짓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언제까지 내게 존칭을 사용할 셈이지?"

알리시아가 진실을 알아차리기 전에, 그녀의 관심을 돌리는 건 카벨레누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지금껏 살아온 세월 중, 전쟁터에서 지낸 날이 많다 해도 그는 황족이었다. 굳이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그는 사교 문화에 충분히 익숙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짓을 말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 전하시니까……."

"습관은 고치기 어려우니, 꾸준히 연습하는 편이 좋지. 시작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 그건……."

새빨갛게 물들었던 알리시아의 얼굴이 이제는 새하얗게 질렸다. 카벨레누스가 뭘 요구하는지 알았다 해도 차마 고개를 끄덕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슬슬 편히 불러도 될 것 같은데."

"……."

"아니면, 서로 존중하는 의미로 경어를 쓰는 편이 취향이십니까?"

알리시아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얼마나 놀랐던지,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 아예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십니까."

"……."

"말을 낮추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높이면 되는 일인데요."

덤덤하게 말을 잇는 카벨레누스와 달리, 알리시아는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양 몸을 파르르 떨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벨레누스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낯설고 어색했다. 그는 위에서 군림하는 모습이 어울리는 사내였다.

"……하, 하지 마세요."

결국 참다 못한 알리시아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하지만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는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뭘 말씀이십니까."

"제, 제게 말을 높이시는 거요."

"상대에게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부인. 낮게 읊조린 목소리는 작았지만 파장은 컸다. 알리시아는 여유로운 사내를 바라보며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저와 달리, 사내는 너무도 능숙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팍 가라앉았다.

"저희는 아직 부부가 아닌 걸요."

"금방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다가 피가 다 말라버릴 것 같거든. 카벨레누스는 뒷말을 삼키며 표정을 유지했다. 귀족에게 있어서 혼전 관계는 명예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와서 명예를 찾기에는 늦은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흠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귀족들은 보이는 것을 중시했고, 그럴싸한 모습일수록 그들의 사회에 쉽게 스며드는 법이었다.

"익숙해지세요. 앞으로는 당연해질 일이니까요."

"……전하께서는 이런 일이 익숙하신가봐요."

"익숙하다기보다는……."

부쩍 어두워진 알리시아의 표정을 알아차린 카벨레누스가 하던 말을 멈췄다.

"……내가 이러는 게 별로인가보군."

도가 지나쳤나.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 알리시아는 흘끔 카벨레누스를 살피며, 잠시 눈을 굴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

단호한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하지만 카벨레누스와 달리, 알리시아는 입술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능숙하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다는 거니까요. 그게 싫어요."

"……."

"불가능하다는 거 알지만, 전하께서 제가 처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그런 것처럼. 알리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고심 끝에 용기를 내긴 했지만 잔뜩 굳은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것이 잘한 일인지 불안해졌다.

"……처음이야."

"네?"

"나도 처음이라고, 그대가."

절 자극하는 법을 어디서 배워오는 건가.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으며 참았던 숨을 뱉었다. 저보다 한참 작은 여자의 말 하나, 하나에 흔들리는 꼴이 어이없는데, 정신 차리고나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안고 싶었던 사람도, 아내로 맞고 싶다 생각했던 사람도, 그리고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도 전부. 그대가 처음이라고."

"아……."

"이제 마음이 좀 풀렸나."

카벨레누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면서도 웃음이 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대가 질투할 줄은 몰랐는데."

"……이제 제 것이잖아요."

"그대의 것?"

"네."

알리시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살면서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쥐어본 적이 없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항상 망가지고 사라져서 아예 욕망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나, 이제는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가져본 제 것이라서 아직도 얼떨떨하고 이상했지만,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서든 손에 꼭 쥔 채 놓지 않을 셈이었다.

"전하께서 제게 전하를 주셨잖아요."

욕망 어린 시선.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숨을 뱉었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버티는 알리시아는 일단 우악스럽게 쥔 후에 무작정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등골이 오싹하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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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은 알리시아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부터는 정정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힘껏 치켜뜬 잿빛 눈동자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무덤덤한 시선보단 탐욕 어린 시선이 훨씬 잘 어울렸다. 사내는 그 사실이 미치도록 좋았다. 결국, 그녀가 품은 탐욕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에. 저 욕망이 족쇄가 되어 저 작은 여자를 제 옆에 붙들어놓게 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소유권을 주장당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카벨레누스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본능을 억누르는 데에 익숙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아쉬워해야 할지 몰랐다.

"하, 하지만 이제와서 무르실 수 없어요."

겁 먹은 얼굴로도 잘도 그런 말을 한다. 아니, 애당초 겁먹은 게 맞는 건가.

'아가씨는 나약하지 않으십니다.'

카벨레누스는 모르코 부인의 말을 떠올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돌이켜보면, 알리시아는 항상 그랬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가냘픈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버텨냈다.

'만약, 그녀가 자란 환경이 달랐다면…….'

지난 과거는 되돌릴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만약의 일을 가정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제대로 대접 받고 자랐으면 좋았을 거라고.

"무를 리 없잖아."

물론, 그건 그녀가 아직 가공되지 않은 원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에 안도하는 마음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지만.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잔뜩 힘이 들어간 알리시아의 손등을 덮듯이 쥐었다. 한 손으로도 두 손이 전부 쥐어질 정도로 알리시아의 손은 작았지만, 예전처럼 무작정 약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절대 놓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꽉 쥐고 있어. 그대의 것은 그대가 지켜야 하는 법이잖아."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소유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 편이 낫다. 알리시아가 원하는대로만 따른다면, 적어도 제 손으로 그녀를 망가트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자진해서 목줄을 차고 길들여진 개 흉내를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해도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겉모습이 흡사해보여도 결국 늑대는 늑대이고, 개는 개일뿐이었다. 목줄을 차고 있다 해도 늑대는 개가 될 수 없는 법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사내는 모른 척 손에 힘을 줬다. * * *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시네요. 아가씨."

"그야, 오늘은 전하께서 오셨으니까."

"좋은 시간을 보내셨나 봅니다."

"응. 좋은 시간이었어."

모르코 부인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노련한 노부인은 알리시아에게 심경 변화가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이제 슬슬 수업 계획표를 바꿔도 되겠군요."

모르코 부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아직은 하대하는 게 어색하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알리시아는 끈질겼다. 조만간 말을 놓는 것도 익숙해져 제법 윗사람처럼 보일 것이었다.

"배울 것이 많으니 서둘러 준비해야겠습니다. 아가씨께 알려드리고 싶은 게 아주 많거든요."

"……모르코 부인은 내가 대공비가 되어도 괜찮아?"

너무도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르코 부인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알리시아는 다소 불안한 눈으로 모르코 부인을 올려다봤다.

"물론입니다."

알리시아의 걱정과 달리, 모르코 부인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냐?"

"제가 아가씨를 보아온 시간은 얼마되지 않지만, 아가씨께서는 단 한 번도 절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니까요. 항상 잘 해내셨죠."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였어. 모르코 부인이 잘 가르쳐주기도 했고."

알리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신경쓰곤 있지만 아직은 모르코 부인에게 말을 낮추는 것이 어색했다.

"할 수 있는 것과 하는 건 다른 법이죠. 생각보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답니다. 온갖 핑계를 대며 일을 미루고 회피하는 경우가 많죠. 그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일이라면 더욱요."

"……."

"아가씨. 어깨를 펴세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충분히 대단한 일이에요. 그리고, 제 경험으로 그런 사람들은 실망시키는 일이 없더군요. 그뿐입니다."

"……고마워."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에 알리시아의 표정이 좀 더 편해졌다. 버팀목처럼 알리시아를 받쳐주는 모르코 부인의 응원은 큰 힘이 됐다.

"아가씨를 보필하는 게 제 몫인 걸요."

"나, 최선을 다할게. 지금은 미흡할지 몰라도 정말로 열심히 노력할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만, 지금은 그 열의를 잠시 거둬주세요."

의욕을 불태우는 알리시아를 보며 모르코 부인은 싱긋 웃었다. 그녀는 알리시아를 볼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새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은? 그게 무슨 소리야?"

"공부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보다는 확인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무슨 확인?"

순박한 눈동자에 모르코 부인은 잠시 고심했다. 자라온 환경이 정상적이 아닌 만큼, 알리시아의 상식이 어디까지인지는 몰랐다. 임신이 의심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알리시아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출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이야 초기라서 티가 나지 않는다 해도 배가 불러오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알리시아는 아이를 품고 있는 당사자였다. 그녀에게는 알 권리가 있었다.

"제 추측이긴 하지만, 아가씨께서 최근 보여주셨던 증상들이 초기 임신 때 보이는 것과 유사해서요. 한 번 확인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방금 뭐라고 했어?"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 들었는데, 모르코 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임신이요."

"다시 한 번 말해봐."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재촉했다.

"아가씨의 배 속에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알리시아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모르코 부인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임신 사실을 고했지만 도무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데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많이 놀라셨나봐요."

모르코 부인은 알리시아의 손을 잡고 토닥토닥 다독였다. 크게 놀란 모양인지 알리시아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아니, 나는……."

알리시아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곧장 배가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바라봐도 육안으로는 아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로 아이가 있는 거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 경험과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제 아이를 가졌을 때, 아가씨와 증상이 흡사했거든요."

"……."

"걱정되세요?"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새 생명의 탄생을 기뻐해야 하는데, 그보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별 생각과 이유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는 생각은 하나였기에. 알리시아는 제 배를 감싸듯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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