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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3)화 (13/164)
  • 13화. 그대가 정말로 괜찮아질 때까지

    2020.04.16.

    "드디어 일어났군."

    "……."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얼굴에 알리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수마 탓인지, 정신이 혼미했음에도 저 선명한 금안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지? 많이 아픈가?"

    "……."

    알리시아는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카벨레누스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되짚었다. 분명 벨리타의 습격을 받았었고, 엘레나가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으며, 분명 끝에는 저 남자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알리시아의 눈이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침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평온했다. 그 사실에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의사를 불러오지."

    알리시아의 침묵을 오해한 카벨레누스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가지 마세요."

    알리시아는 나가려는 카벨레누스의 옷깃을 급하게 잡았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건지,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깔깔했다.

    "……몸은 괜찮은 건가?"

    "네에……."

    일단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긴 했지만 사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이 와중에도 거짓말은."

    카벨레누스가 혀를 차며 알리시아의 뺨에 손을 댔다. 따뜻하다. 알리시아는 온기를 찾는 변온동물처럼 카벨레누스의 손에 기댔다. 평소 같았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몽롱한 정신은 많은 걸 가능케 했다.

    "그대는 꼬박 사흘을 잤어."

    "사흘이라면……."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래 잤다고? 알리시아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사흘을 꼬박 잤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어쩐지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평소보다 퀭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건 아주 미약한 변화라서 그 생각을 하면서도 긴가민가했지만.

    "오늘까지 그대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 의사의 목숨은 장담하지 못했을 거야."

    "죄, 죄송해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대가 죄송할 건 없지. 내가 성 내 경비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탓이니까."

    카벨레누스는 사라진 온기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전하께서는 바쁘시잖아요."

    "바쁜 것과는 다른 문제지."

    카벨레누스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반란군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노이슈타인의 정규군을 떠올리면 반란군들의 수준도 뻔했고, 어설픈 군대는 괜히 들쑤셔 흩트려 놓는 것보다 스스로 꼬리를 보일 때까지 내버려 두는 편이 소탕에 유리했다. 늘 그래왔듯이 내린 판단은 알리시아의 목숨을 위협했다.

    "……손바닥에 흉터가 남을 수 있다고 하더군."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카벨레누스가 뱉을 수 있는 건, 사과와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흉터는 항상 있었는 걸요."

    "……."

    "……제가 또, 실수를 한 건가요?"

    알리시아의 콧잔등이 찡그려졌다.

    "아니."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하지만……."

    "더는 눈치 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도 도대체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군."

    "죄송, 아니, 아니……. 음……."

    알리시아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카벨레누스는 가만히 누운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또 한 번 한숨을 뱉었다.

    "갈 길이 멀군."

    "……."

    "그래도 괜찮겠지. 시간은 충분하니까. 재촉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하도록 하지."

    그대가 정말로 괜찮아질 때까지. 카벨레누스는 뒷말을 묵음으로 처리하며 움츠린 알리시아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다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제르페누스가 내건 조건을 전부 이행하고 알리시아를 대공비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일이 필요했다.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시선도, 작은 손짓에도 화들짝 놀라는 태도도 천천히 바꾸면 그만이었다. 앞으로 그녀가 제 곁을 떠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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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상처를 입은 곳이 있다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아, 아뇨. 더는 없어요."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순백의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들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치유의 능력을 가진 사제는 넓은 제국에서도 몇 되지 않은 귀한 몸이고, 덕분에 그들이 한 번 걸음 할 때마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알리시아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카벨레누스가 사제를 노이슈타인까지 데려오는 데에 얼마의 값을 치렀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눈치 보지 말고 제대로 말해."

    카벨레누스가 인상을 쓰며 알리시아의 손을 잡아챘다. 최대한 빨리 오게 했지만 수도에서 노이슈타인까지의 거리 탓에 알리시아가 깨어나고서야 사제가 도착했다. 덕분에 그녀가 깨어나지 않았던 내내 속을 끓여야 했지만, 이 김에 알리시아의 몸에 있는 흉터들을 전부 지워버릴 셈이었다.

    "하지만, 사제의 치유는……."

    사제를 부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상처를 한 번 치료할 때마다도 그에 따른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고 들었다. 이제는 다 나아서 아프지도 않은 흉터를 치료하는 데에 거금을 써야 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기부터 바로 치료하도록 해."

    알리시아의 반항을 가볍게 묵살한 카벨레누스가 그녀의 상처를 사제에게 내보였다. 사제는 군말 없이 카벨레누스가 가리키는 흉터들을 치유해나갔다.

    "일단 보이는 곳은 다 치유한 것 같은데, 다른 곳은 더 없으신가요?"

    "그, 그게……."

    알리시아가 머뭇거리면서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더는 치료 받지 않겠다는 말을 할 거면 차라리 하지 마."

    "그게 아니라……."

    "분명 말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했을 텐데."

    "그러니까, 흉터가 옷 안쪽에 있어서……."

    알리시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당황한 시선으로 알리시아를 보다가 겨우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을 깨닫고 이마를 짚었다.

    "내가 실수했군. 나는 나가 있을 테니, 하나도 빠짐없이 치료하도록 해. 나중에 확인……."

    카벨레누스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소 거칠게 숨을 크게 뱉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대공 전하께서도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네요."

    카벨레누스가 나가자마자, 사제가 싱긋 웃었다.

    "네?"

    알리시아는 잔뜩 당황해 눈만 껌벅거렸다.

    "아닌가요?"

    "그게……."

    알리시아는 웬만하면 모든 의견을 수용하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벨레누스와 귀여움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전하께서 급하게 절 부르시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런 아가씨를 숨겨두고 계셨네요."

    "전하를 잘 아시는 것 같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지금은 아니지만, 어릴 적에는 자주 치료하러 오셨거든요."

    "그렇군요."

    알리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사제의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속이 쓰린 것 같았다.

    "제 이름은 나탈리예요. 플라임 신전의 열두 번째 사제죠."

    "아, 저는……."

    알리시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성직자야, 신께 모든 것을 바치는 의미로 성을 쓰지 않지만 일반인들은 아니었다.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나, 천민 정도였다. 여기서 노이슈타인이라는 성을 밝히면 몰락한 왕조의 왕족이라는 게 들통나고, 반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노예라는 게 드러날 것이었다.

    "괜찮아요. 당신에 대해선 대충 들었는걸요."

    나탈리가 다 안다는 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알리시아의 등을 어루만졌다. 나탈리의 손을 감싼 새하얀 빛이 닿은 흉터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쉽게 사라졌다.

    "저에 대해서 들으셨다고요?"

    "네."

    역시,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카벨레누스겠지. 알리시아는 방금 전 나간 사내를 떠올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실망할 이유 같은 건 없는데, 나탈리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을 카벨레누스를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제가 노예인 걸 아신다는 말씀이시죠?"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네?"

    "나도 모르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충분히 불쾌할 만하잖아요. 아가씨가 제게 화를 낸다고 해도 저는 할 말이 없어요."

    진심으로 사과하는 나탈리에 알리시아의 두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치유 능력을 가진 사제는 웬만한 귀족 못지않은 신분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탈리가 알리시아의 뺨을 때린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저도 당신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 사람에겐 대화할만한 상대가 없어서요. 혼자 끙끙 참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을 때, 절 찾아와 온갖 이야기들을 털어놓곤 하거든요."

    "……."

    나탈리의 말에 문득 그녀와 함께 있는 카벨레누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카벨레누스는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눈앞의 사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쏟아지는 봄볕의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가 잘 어울렸다.

    "정말로 미안해요.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많이 화났나요?"

    "아뇨. 화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사제님께서 노예를 치료한다는 게 불쾌하지 않을까 해서요."

    "노예라 해서 다를 게 뭐 있나요. 신 앞에서는 다들 똑같은 사람인 걸요."

    일체 흔들림 없이 신념에 찬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수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단연 눈에 띌 정도의 미인이었지만, 그녀를 빛나게 하는 건 단지 외형이 아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두 사람 다 고집이 세긴 해도, 언제나 이기는 쪽은 한 명이었거든요.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좋은 사람이다. 말 몇 마디를 나눈 것만으로도 그런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나탈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알리시아의 마음은 더욱 울적해졌다.

    "……사제님께서는 전하와 정말로 친해 보이시네요."

    "그렇게 보이나요? 사실 그건-"

    "언제까지 계속 치료할 셈인 거지?"

    "거의 다 했으니, 방문 밖에서 기다리는 건 그만 하세요. 너무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거든요."

    "……."

    아무렇지 않게 카벨레누스를 대하는 나탈리에 괜히 알리시아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도, 나탈리도 누구도 무례한 발언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공께서는 여자들끼리의 시간이 싫으신가 봐요."

    나탈리는 아쉽다는 듯 입을 삐쭉 내민 후, 마저 알리시아의 흉터를 치료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더는 그녀를 보며 웃을 자신이 없어졌다. 카벨레누스와 나탈리가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 * *

    "몸은 어떻지? 더 아픈 곳은 없나?"

    "네, 괜찮아요. 사제님이 꼼꼼히 돌봐주셔서 이제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 걸요."

    치료가 끝나자마자, 나탈리는 볼일이 있다면서 급히 돌아갔고 카벨레누스도 딱히 그녀를 잡진 않았다. 얼핏 봐도 둘 사이에는 별다른 감정이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녀의 실력은 확실하니까."

    그렇지만, 익숙한 듯 서로에 대해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알리시아는 종종 나탈리를 떠올리곤 했다. 만약, 카벨레누스가 결혼해 아내를 들인다면 나탈리 같은 사람일 것만 같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시선에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알리시아가 다소 거칠게 손사래를 쳤지만 과한 반응은 오히려 사내의 의심을 살 뿐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아뇨. 그런 건 없어요."

    사제님과는 무슨 관계세요? 그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밀려왔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은 노예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있어."

    "네?"

    "그대는 내게 궁금한 게 없을지 몰라도 나는 있다고."

    "……."

    카벨레누스가 보란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알리시아는 곤란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다소 뒤늦은 질문이긴 하지만, 혹시 좋아하는 사내가 있었나?“

    "네,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알리시아는 당황한 나머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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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품었던 사내가 있었냐고.“

    "아, 아뇨……. 제게 그럴 새는……."

    "그럼, 조금이라도 호감을 품었던 상대는?"

    "당연히, 그런 사람도 없지만……."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걸까. 알리시아는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입술만 우물거렸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혼란케 한 카벨레누스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뭐가 다행인 거죠?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질문을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카벨레누스의 행동이 달라진 건 어제 일이 아니었다. 벨리타의 습격 이후, 그는 알리시아를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호사가들은 카벨레누스가 더는 무작정 알리시아를 위한 물건들을 사들이지 않는다고 총애가 다 떨어진 모양이라고 쑥덕거렸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덤덤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리시아 쪽만 그랬다. 떠들썩하던 소문을 들은 카벨레누스는 그날부터 성 안의 블랑셰 군인들을 무장시켰다. 소문을 잠식시키기 위해 굳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다.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 갑주를 입고 경비를 선 군인들의 위용을 본 사람들은 평화 속에서 잊고 지냈던 공포를 떠올렸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카벨레누스가 노이슈타인을 다스리면서 빈민이 줄어들고 나날이 국고가 나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가 한 나라를 멸망케 한 침략자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가 베풀고 있는 자비가 언제 날카로운 칼이 될지 모를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카벨레누스에 대한 소문을 말하길 꺼리기 시작했고 알리시아에 대한 소문도 잦아들었다. 카벨레누스는 더는 알리시아가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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