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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2)화 (12/164)
  • 12화. 결혼하겠습니다

    2020.04.13.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습니다. 흉터가 좀 남을 순 있겠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깨어나지 않는 거지?"

    "아무래도 그런 일을 겪었으니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단지 그것뿐인가."

    짐승을 닮은 눈동자는 단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의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조만간 깨어나실 겁니다. 영 불안하시면 제가 밤새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됐으니 이만 나가봐."

    "아, 네! 알겠습니다."

    카벨레누스의 손짓에 의사는 성급히 의료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카벨레누스의 악명은 유명했다. 괜히 더 머물었다가 화를 입고 싶지 않았다.

    "후우……."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은 채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여자는 항상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누운 모습은 더욱 그랬다. 게다가…….

    ‘살고 싶어요.’

    의사에게 상태를 보이는 와중에도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안은 팔을 놓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순간에도 풀리지 않은 깍지 낀 손이 너무도 간절해 안쓰러울 정도였다.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붕대로 감긴 알리시아의 손에 닿았다. 상처를 보는 건 건 익숙한 일이었기에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원래는 그게 당연한 것인데, 알리시아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화가 났다.

    '살렸어야 했는데.'

    왕궁 내부 깊숙이 침입할 정도면 단순히 우발적인 건 아니었다.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력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침입자들을 바로 죽이는 게 아니라, 산 채로 잡아서 뭐라도 실토하게 만드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새는 없었다. 지나치게 고요한 복도에서 옅게 묻어나오는 피 냄새를 맡았을 때는 이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천천히 그녀의 이마부터 코, 입술, 턱까지 천천히 그리듯 어루만졌다. 예전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꾹 다물린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떨렸다. 문득, 처음으로 알리시아와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날이 떠올랐다. 아직 통이 트지 않은 새벽녘, 움직이던 여자에 카벨레누스는 잠에서 깼다. 오랜 전쟁에 예민해진 몸은 작은 소리, 미약한 움직임에도 쉽게 반응했으니까.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자는 척을 했다. 자신을 염탐하는 시선도, 어설픈 손짓도, 그리고…….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꽤나 기분 좋은 것이었기에. 꿀꺽.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단 한 번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자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냘팠지만 듣기 좋았다. 혹시나 한 번 더 불러주지 않을까 기대할 만큼.

    "……그거 알고 있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움직이는 입술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초라한 게 싫어. 나약한 건 더더욱 끔찍하고, 감정에 휩쓸려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건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 정말이지, 그대는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잔뜩 모아서 빚어놓은 것 같아."

    "……."

    "그런데, 우습게도 그대의 존재는 싫지 않아."

    여자는 제게 있어서 오점이 될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걸 알았기에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에 대한 감정을 분명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그럴 자신이 없어졌다.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알리시아의 얼굴을 감쌌다.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절 바라보던 잿빛 눈동자를 본 순간 깨달았다. 이제 와서 멈추기엔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아니, 처음부터 멈출 생각 따윈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잊지 마. 당신이 시작한 거야. 그대의 입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어."

    카벨레누스의 손끝이 알리시아의 입술에 닿았다. 살갗을 맴도는 여자의 숨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미약해서 더욱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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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너무 약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닫자, 그간의 고민 같은 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실로 간단한 것이었다. 버리거나, 혹은 완벽하게 소유하거나. 하지만 버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졌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맹세하지. 오늘부로 누구도 그대에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게, 죽음조차 감히 그대를 노리지 못하게끔 만들어주겠노라고. 대신, 그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텅 빈 여자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라 억지로 물건들을 안겼지만, 그럴수록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꽃은 너무 빨리 시들고 보석은 쉽게 깨질 뿐이니까.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 같이 위태로운 여자를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지금은 푹 쉬도록 해."

    그대가 깨어나면 아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테니까. 카벨레누스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선명한 금안은 어느 때보다 곧게 빛나고 있었다. * * *

    <네가 먼저 연락을 하다니 별일이구나.>

    "드릴 말씀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그거라면 나도 마찬가지지. 사랑스러운 아우님이 노이슈타인 공주와 재미를 보고 있다는 소식에 요즘 내가 밤잠을 설치고 있거든.>

    제르페누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거울 쪽으로 더욱 몸을 기울였다. 카벨레누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제 이복형을 응시했다.

    "결혼하겠습니다."

    <결혼이라고?>

    "네."

    제르페누스의 눈이 천천히 카벨레누스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장난한다 여겼을 테지만, 상대는 재미라곤 모르는 목석 같은 동생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은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갑작스러운 발언이 놀랍긴 하지만,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너도 이제 그만 방황하고 정착하면 좋겠지. 다만, 슈바르한의 주인에 걸맞은 여자를 찾으려면 시간이 꽤->

    "다른 여자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이후, 제 말에 제르페누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지만 상관없었다. 카벨레누스는 한 번 정하기로 한 일은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그 소리는 미리 내정해둔 적임자가 있단 소리냐?>

    제르페누스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눈치 빠른 황제는 눈치껏 상황을 알아차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머리로 이해한 것과 그걸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저는 노이슈타인 공주와 결혼할 겁니다."

    물론,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는 무심한 동생은 아무렇지 않게 제르페누스의 외면을 무시할 뿐이었지만. 제르페누스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내 사랑스러운 아우님이 내게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노이슈타인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노이슈타인 공주? 그 노예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제르페누스는 헛웃음을 뱉었다. 목석 같던 동생이 여자에게 흥미를 갖게 된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임에도 지나치게 담백한 감이 있는 동생에겐 유희를 즐기는 법을 배워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노이슈타인 공주를 눈감아준 건, 이번 기회에 여자를 접하면서 잠깐의 유흥을 즐기라는 것이었지 저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내라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결혼을 문제라고 표현하는 건 세상천지에 너밖에 없을 거다.>

    "상관없습니다."

    <물론 너야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아우야.>

    제르페누스는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놨다. 그는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평생 폐하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 정도는 요구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네가 한 일들을 생각하면 무슨 소원을 들어줘도 아깝지 않지. 하지만 어떤 일에도 항상 예외가 있는 법이야.>

    "이번 일이 예외가 되면 됩니다."

    <아니. 안 돼. 어떤 미친 황족이 한낱 노예 따위와 결혼한단 말이야.>

    노이슈타인 왕국이 건재했다고 해도 성에 차지 않는 상대였다. 하물며, 모든 걸 잃고 노예로 전락한 여자를 황족의 아내로 들일 순 없었다. 특히나 그것이 카벨레누스라면, 더더욱. 제르페누스에게 있어서 카벨레누스는 누구보다 각별했다. 동생이 자진해서 진흙탕으로 들어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노예 신분은 임시일 뿐입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네가 가장 알고 있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카벨레누스를 노려보던 제르페누스는 결국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쭉 봐오던 동생의 고집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가 저런 눈을 할 때는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럴 거면 그딴 내기를 하는 게 아니라, 카벨레누스에게 노이슈타인 공주를 죽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뒤늦은 후회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제르페누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긴 한숨을 토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번복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너는 그런 애였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많은 일들이 꼬여버릴 거고, 그만큼 겪을 필요 없는 일들에 휘말리게 될 거야.>

    "전 이미 결정했습니다."

    금색과 녹색. 각기 다른 색을 띤, 그럼에도 묘하게 닮은 두 사내의 시선에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카벨레누스는 이미 결심을 굳혔고, 제르페누스는 반대의 뜻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후우……, 아우야, 네가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되어서 아무래도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팽팽한 신경전 속 먼저 입을 연 건 제르페누스 쪽이었다. 그는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남은 차를 홀짝였다.

    "착각이 아닙니다."

    <아니. 그건 착각이다. 설령 아니더라도 그래야만 해.>

    "……."

    <너는 어린애가 아닌, 다 큰 성인이야. 그러니 네가 어떤 여자와 재미를 보든 내가 간섭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은 다르지. 결혼이란 후계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후계는 그녀에게서 보면 됩니다."

    카벨레누스가 당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알리시아가 아닌, 다른 여자를 안을 생각은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원래도 여자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알리시아를 안은 후부터는 더욱 흥미가 식은 터였다.

    <바로 그게 문제인 거지.>

    제르페누스는 결국 차를 다 마시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놨다. 평정을 유지하는 건 역시 무리였다. 젊은 황제에게 있어선 산처럼 쌓인 서류나, 말이 통하지 않는 대신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얼굴도 모르는 노이슈타인 공주를 품에 안고 결혼식장에 서 있는 동생을 상상하는 쪽이 훨씬 끔찍했다.

    <제국의 관례 상, 한 남자가 혼인할 수 있는 여자는 단 한 명뿐이야. 그 여자를 아내로 들이게 되면,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점 없는 후계자를 가질 수 없게 되는 거다. 노예 출신 어미에서 태어난 어설픈 후계자나,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나지 못한 사생아 후계자밖에 얻을 수 없게 되는 거라고.>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런 걸 결점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야, 당연히 너는 모르겠지.>

    제르페누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고작 핏줄 따위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폐하.“

    <어설픈 혈통은 결점이 되는 게 맞아. 귀족에게 있어서 혈통이야말로 대대로 이어져 온 권력의 상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니까. 혈통은 무슨 노력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거든.>

    "……."

    <누구보다 날 가까이서 지켜본 너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생각한다.>

    제르페누스가 황제가 된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카벨레누스가 황좌에 앉길 바랐다. 카벨레누스가 황태제 자리를 내려놓고, 슈바르한의 주인이 되고, 온갖 악명들을 뒤집어쓰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선황제에게 공물로 바쳐진 무희의 아들. 그 낙인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평생 제르페누스를 괴롭혀왔다.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옆에 둔다 해도 뭐라 하지 않으마.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제르페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폐하께 의견을 물어본 게 아닙니다."

    <의견을 물어본 건 아니더라도, 내 동의는 필요하겠지. 제국의 모든 귀족들은 내 승인 없인 절대 혼인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굳이 내게 연락한 거잖니.>

    "승인받기 위해선 한 번쯤은 이야기 드려야 하니까요."

    <내가 승인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제르페누스가 비아냥거리면서 고개를 까닥거렸다.

    "저는 단 한 번도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카벨레누스는 오만한 웃음을 지었다.

    <잘 됐구나. 이번 기회에 너도 실패라는 걸 배워두면 좋겠지.>

    "그딴 것은 블랑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건 폐하시죠."

    또 한 번, 두 사내의 시선이 맹렬히 맞부딪혔다.

    <…….>

    "……."

    <……누굴 닮아서 이리도 고집이 센 건지.>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하아…….>

    제르페누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가는 눈으로 카벨레누스를 살폈다. 노예와의 결혼을 허락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이런 식으로 카벨레누스를 자극하는 건 곤란했다. 본디 사람이란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불타오르는 법이었다. 좀 더 부드러운 해결책이 필요했다.

    <좋아. 그렇다면 결혼하도록 하렴. 네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무슨 꿍꿍이십니까?"

    카벨레누스의 얼굴에 의심의 기색이 서렸다. 제르페누스가 그러하듯, 카벨레누스도 제 형을 잘 알았다. 제르페누스는 쉽게 물러날 사내가 아니었다.

    <꿍꿍이라니, 섭섭하구나.>

    "폐하께서 그런 얼굴을 할 때는 항상 뭔가 꿍꿍이가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어쩌겠냐.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게 드래곤의 레어라도 들어가 봐야지.>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말씀해주시지요."

    <그때 했던 내기 기억하지? 네가 노이슈타인 공주에게 넘어갈지, 안 넘어갈지 했던 내기 말이다. 그것의 연장으로 내기 하나를 더 하자꾸나.>

    제르페누스는 능글맞게 웃었다. 어차피 카벨레누스가 노이슈타인 공주에게 보이는 건 단순한 흥미였다. 그 짧은 흥미만 가신다면 노예와 결혼한다는 소리는 다신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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