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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27화 (27/92)

27화. 가출

‘그런데요? 왜 끝까지 그대로 두지 않고요?’

‘우연히 한 번 봤는데 눈앞에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보았습니까?’

‘선후가 열다섯에 관례를 올린다기에 밀행을 나가서 봤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요.’

아이를 보는 순간 왕은 아이의 어미에게 한눈에 반한 것처럼 또 사랑에 빠졌다. 그 뒤로 아이를 볼 때마다 젊은 날의 사랑이 생각났다.

목선후는 무거운 옥좌에 흘러들어오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왕에게 은밀하고 작고 애틋한 기쁨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죽은 어미를 닮았던가요?’

셋째 왕자의 첫사랑은 대비도 당연히 기억했다. 후궁 소생의 첫째가 세자로 책봉되던 해 역시 후궁 소생의 둘째와 자신이 낳은 셋째 왕자는 각기 궁 밖에 왕자궁을 마련해서 독립했다.

원래는 셋째도 관례를 올리던 열다섯에 혼인을 시켜야 했는데 세자가 폐위되고 그 뒤를 이은 둘째 왕자도 폐위되는 비극이 연이어 일어나는 바람에 셋째의 혼사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셋째 왕자는 자유롭게 살면서 평민 여인을 사랑했다. 하지만 과부에다 평민의 여식이 세자빈이 될 수는 없는 일.

대비로서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 여인을 먼 곳으로 보낸다는 선왕의 말에 동의를 했었다.

그 여인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줄은 정말 몰랐다. 그 사실은 선왕도 몰랐다.

대비는 그 오랜 세월 자신의 핏줄을 숨겨온 왕의 옆얼굴을 새삼스레 살폈다. 나이를 먹어도 어쩌면 이리 중후하게 잘 생겼는지.

왕들이 대체로 잘생겼지만 역대 가장 잘 생겼다는 왕이 미소를 짓자 왕을 낳은 대비까지도 눈이 부실 지경이다.

‘선후는 그 사람을 하나도 닮지 않았습니다.’

왕의 말을 들은 대비는 왕이 심계가 깊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첫아들을 십오 년 동안 보지 않은 인내심이나 그 비밀을 스무 해까지 철저히 지킨 자제력은 후궁이 낳은 첫째나 둘째에게서는 볼 수 없는 품성이었다.

‘어마마마, 선후는 소자를 꼭 닮았습니다.’

대비는 손자의 존재를 알고 나자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구중궁궐에 외부의 사내가 비밀스럽게 드나들기가 쉬운가.

왕은 민심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밀행을 나가 가끔 아들을 보고 오지만 대비는 핑곗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북행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행궁 중에서 환성과 제일 가까우면서도 한가롭고 고요해서 손자를 비밀리에 만나기에 안성맞춤이다.

손자가 혼인을 한 후에는 손자며느리도 보고 싶었다.

북행궁에서 한참 내려온 곳에 있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손자며느리를 기다렸다.

“그 애가 손끝이 야무져. 골고루 아픈 데만 골라서 힘을 주더라. 조 상궁보다 나아.”

조 상궁은 전국에서 안마를 제일 잘한다고 자부하는 대비마마 안마 전담 상궁이다. 아무려면 허깨비처럼 연약해 보이던 아씨가 더 잘했을까. 하지만 김상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에 땀이 밸 정도로 열심히 하시던데요. 정성스러운 마음씨가 곱습니다.”

“그렇지?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텐데.”

시중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는 귀한 패물을 내렸으니 이제는 알지도 모르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에 꽂힌 산호 뒤꽂이가 눈에 선하다. 또 보고 싶다.

북행궁은 심심하고 고적하다. 여름이 되니 나른해서 기분도 처진다. 대비는 손자며느리를 부를 구실을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부르면?”

“공자님께서는 몰라도 아씨는 오시지 않을까요?”

“그놈이 아내를 혼자 보내겠나.”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입속에서만 웅얼거렸다. 오라고 했다가 안 오면 더 마음이 상할 것도 같다.

“유주를 주겠다고 했는데 바로 거절한 놈이다. 유주는 내 친정 가문이 대대로 터를 잡고 다스린 땅이라 숨겨진 왕자가 살기에 안성맞춤이거늘.”

“욕심이 없으신 건 마마를 닮았사옵니다.”

자신이 한 말이 너무 모순이라 김 상궁은 고개를 꼬고 웃음을 참았다. 공자님은 욕심이 없지만 대비마마의 욕심은 유명하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올까?”

아이고, 대비마마. 그 연세에 손자에게 거짓말을 하시게요? 김 상궁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

냉장고에서 갓 꺼낸 수박만큼은 아니어도 우물에 담갔다 꺼낸 수박도 시원하고 맛있었다. 자연스럽고 상큼해서 맛은 좋았는데.

“씨가 왜 이리 많아?”

두 번 베어 먹고 투덜거리는 나를 목선후가 수박 처음 먹어 보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 씨 없는 수박을 만드신 박사님은 20세기분이지. 씨가 거의 없는 수박에 길들여져서 삼 분의 일은 까만 씨로 덮여 있는 수박이 낯설다. 씨를 뱉어 내다 볼 장 다 보겠어.

문득 눈앞에 아이돌급 미모의 남편을 두고 평상 아래로 틱틱 씨를 뱉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먹지 말자. 수박을 내려놓았다.

“그대가 안안용인 걸 잊을 뻔했군.”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대는 새우도 껍질을 까 주기 전에는 안 먹었고, 구운 생선 위에 파리가 잠깐 앉았다고 음식을 버렸지.”

안안용이 나랑 비슷한 점이 많네? 현대에서 늘 바빴던 나는 껍질을 벗겨야 되는 대하나 꽃게는 일 년에 한 번도 안 먹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다. 시간이 있어도 빨리 먹어야 된다는 강박에 길들여져서 나중에는 먹기 편한 음식만 먹게 되었다.

파리가 앉은 생선? 그 잠깐 사이에 파리가 무슨 짓을 한 줄 알고 먹는단 말인가. 이 시대는 구충제도 없는 시대인데.

잘했어, 안안용. 네 몸은 속까지 깨끗하겠구나. 고맙다.

만족스러운 내 표정을 본 목선후가 오해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프로. 협상의 테이블에 앉았으니 상냥하게 웃자. 귀밑머리를 올리며 고개를 세 시 방향으로 틀었다.

“씨를 뱉는 모습은 보기 흉하잖아요. 공자님 앞인데.”

멍하던 목선후가 먹던 수박을 내려놓았다.

“나도 그렇게 흉했소?”

곱창 기름을 흘리며 먹은들 네가 흉하게 보이겠니?

내심을 감추고 한술 더 떠서 손을 뻗어 목선후의 입술 끝을 쓱 문질렀다. 마치 수박씨를 떼듯이.

수박씨는 당연히 없었지만 내가 말을 안 하는데 어찌 알겠어? 목선후는 당황해서 상위에 얌전하게 놓인 수건을 들어 입을 닦았다.

그런 다음 내 입을 닦아 줄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공중에 붕 뜬 손과 오갈 데 없이 헤매는 눈동자 때문에 숨이 막혔다. 그의 시선이 내 눈과 코를 흘러내려서 입술에 닿았다.

뭘 망설이는 거야? 여기는 아무도 없다고.

그 순간 팽나무에서 스스 스스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목선후는 위를 힐끗 올려다보고는 손을 내려서 내 입술에 묻은 수박 물을 닦았다.

이제는 목선후가 씨 없는 수박이거나 게이거나 테스토스테론 결핍증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사실이면 어떡해? 이 시대는 이혼과 재혼이 하늘의 별 따기던데.

내 표정이 너무 심각했는지 목선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시종들을 내보낸 거요?”

“아, 그거요. 저, 친정에 너무 오래 있다고 어른들께서 걱정하지 않으실까요?”

“그 문제는 아버님과 상의해 보겠소.”

목선후가 시어머니와 상의하는 것을 한 번도 못 봤다. 모든 일을 시아버지하고만 논의한다. 이게 유교의 남녀유별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시어머니와 목선후 사이는 투명한 유리 벽이 있는 것 같다. 시어머니가 자식을 키우면서 장남만 편애했던가? 갑자기 목선후가 가엾어졌다.

“감사해요. 그리고 동생들 학업 문젠데요. 어떻게 보셨나요?”

“진실을 듣기를 원하오?”

“네. 그럼요.”

“첫째 처남은 포기하시오.”

예상했지만 그래도 꿀꺽 침이 넘어갔다.

“둘째는 아직 어리니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반반이오. 현재는 셋째가 가장 가능성이 있소.”

“오, 그래요? 잘하나요?”

“그런 건 아니고, 공부에 관심은 있더군.”

당이 필요해. 나도 모르게 수박을 들어 씨까지 크게 베어 물었다. 턱으로 수박 물이 주르르 흘렀다.

“저런, 안용.”

목선후가 수건을 내밀었다. 턱을 닦으며 나는 목선후의 등급을 감싸고 있는 황금색 고리를 떠올렸다.

“공자님은 특별하니까, 공자님이 가르치시면 다를지도 몰라요. 일 년만, 일 년만 도와주세요.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할게요.”

내가 일 년이라고 말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학원에 새로 들어온 학생들의 성적은 그다지 변하지 않을 때가 있고 수직으로 상승할 때가 있다.

속으로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계단식 형태를 보이기 때문에 수직상승할 시기에 학원을 옮기면 새 학원 덕분이라고 착각하는 학생들이 많다. 반면 학원을 옮겼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강사의 실력 탓을 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일 년 정도가 지나면 결과가 확실히 드러난다. 일 년 이전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왜 삼 년이 아니고 일 년이라는 거요?”

안 되는 공부를 삼 년이나 붙잡고 있으면 애들이 너무 불쌍하잖아. 안씨네 아들들에게는 안씨 상가를 물려받아서 번창시켜야 되는 중요한 임무가 있다. 세상에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동생들을 가르치는 건 일 년도 힘들 거 같아서요.”

“지난번에 하루 가르쳐 봤더니 재미있었소.”

“하루니까요. 계속 가르치면 재미없을 거예요.”

“오히려 할 일이 생겨서 기쁘오.”

노량진과 고시원에서 라면만 먹고 구르다가 삼 년 만에 공시에 합격한 사람 같은 표정이다. 무슨 일이든 할 테니 맡겨만 주쇼, 라는 눈빛.

이런 사람이 사주팔자 때문에 아무 일도 못 하고 있다니 국가적인 낭비다.

“공자님, 왜 과거를 보지 않으세요? 열세 살에 이미 향시에 합격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럼, 국자감에 들어가시거나, 전시를 보시는 게…….”

“그 일은 더 이상 거론치 마시오.”

“그건 너무 비합리적이에요. 사람의 운명은 사람이 결정하는 거예요.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뭐하러 노력하겠어요? 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장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될 텐데요.”

열변을 토하는 내 말에 목선후가 깊은 한숨을 쉬는데 잘생긴 남자가 애처로운 표정을 하니 세상이 다 슬퍼 보인다. 내 열변이 다 미안해.

“안용…….”

그 순간 중문 안으로 넘어지듯이 하며 정오가 뛰어 들어왔다.

“아씨, 아씨! 큰일 났어요. 큰 도련님이 학당을 뛰쳐나갔대요. 집을 나가겠다고 하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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