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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26화 (26/92)
  • 26화. 평생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오 여사님의 딸이 아닌데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으니 염치가 없다고? 고백할 수도 없는데 양심이 생생하게 살아서 자꾸 따끔거린다고? 살아 있는 양심이 귀찮아서 또 마음이 아프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동생들이 향시에 합격하도록 돕는 것뿐이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서 안씨 집안을 지키자.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저, 내일 동생들을 좀 봐주세요. 그동안 학업에 진전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내가 가보고 싶은데, 어머니가 저보고 학당에 가지 말래요.”

    “한 공자 때문에?”

    목선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한인수와 나와의 관계를 전혀 걱정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목선후의 표정에 심술이 났다. 그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겠지?

    “그렇죠 뭐, 공자님이 정 싫으시다면 내가 갈게요. 내가 한 공자랑 만난들 별일 있겠어요? 학당에 보는 눈도 많은데.”

    쿨한 척 어깨도 으쓱했다. 잊었던 현대사회의 제스처랄까.

    “생각해 보니 나도 천자문을 배우다 말았네요. 다시 시작해야겠어요.”

    사실 이미 다 외웠다. 내 손에 착 감기는 필기도구만 있다면 앉은 자리에서 천자를 다 써낼 수도 있다. 하지만 목선후가 알게 되면 내 정체를 의심할까 봐 모르는 척했다.

    “내가 가르쳐 주겠소.”

    남편에게 공부를 배운다고? 태산이 닳아 없어져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 학원에 오는 학부형들이 모두 영알못은 아니었다. 아빠 중에는 고등학교 현직 영어 교사도 있었고 누나나 형이 미국 교환학생인 애도 있었다. 몇 년간 자녀의 영어교육을 위해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온 가족도 있었다.

    그런데 자녀나 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대신 돈을 들고 내게 왔다. 자신의 애를 가르칠 때는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싸움만 한다면서.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왜?”

    “틀리면 혼낼 거잖아요. 손바닥도 때리고요.”

    “정 공자는 안 때렸소?”

    동생들은 때렸지만 나는 안 때렸다. 내가 아씨여서 안 때린 게 아니라 틀린 게 없어서 못 때렸다. 틀렸다면 때렸을 거다. 확실하다.

    내가 선생을 지나치게 잘 뽑았다. 정 공자는 차별을 전혀 안 했다. 따지자면 내가 재단 이사장급인데 가르칠 때는 넷째와 똑같이 취급했다.

    공부하면서 손바닥 맞는 게 당연한 시대라 선생이나 학생이나 폭력이라고 못 느끼고 때리고 맞는다.

    나는 처음에 정 공자가 안신이의 손바닥을 때릴 때 두 눈이 앞으로 튀어 나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귀여운 넷째까지 때리고서야 매질이 끝났다. 두 대씩이었기에 망정이지, 세 대씩이었으면 나는 정 공자를 안씨 학당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진심이다. 두 대와 세 대의 차이가 크다.

    “동생들은 때렸어요.”

    “안용.”

    또 한 톤 내리는 중후한 음성.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나한테 맞는 것이 낫지 않소? 외간 사내보다는.”

    “나를 때리고 싶어요?”

    목선후, 오늘 밤부터 잠잘 때 조심해라. 나는 21세기 여성이야.

    한때 다이어트를 위해 권투도 배웠고 호신술도 했었어. 게다가 놀이공원에서 사격을 하면 꼭 곰인형을 탔다고. 나 알고 보면 무서운 여자야. 이럴 줄 알았으면 태권도도 배워둘걸.

    목선후의 커다란 손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이 뒤로 물러났다.

    “뭐, 뭐 하려고?”

    “그대는…….”

    하얗고 긴 손가락이 내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서늘한 눈매가 가늘어지며 웃음기가 대롱거렸다.

    “흠, 어떻게 이렇게 예쁜 거요?”

    어, 어, 어.

    숨이 턱 막혔다.

    오 여사님, 죄송해요.

    마마걸보다는 이쪽이 더 끌리네요. 내 몸이 버터가 아니라 꿀이 되어 흐르고 있어요.

    “그대가 과거를 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과거를 봐야 한다면 때릴 건가요?”

    왜 나는 손바닥을 맞는 문제에 이렇게 집착하지? 답을 찾는 일이 내 직업이었는데 이 문제는 답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풀려고 할수록 더 혼란스럽다.

    애초에 설정이 틀렸기 때문이다. 여자인 나는 과거를 볼 수 없다. 과거를 볼 수 없으니 공부할 필요도 없고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손바닥을 맞을 일도 없다.

    그런 뜻이겠지, 목선후? 결국 어떤 경우에도 때리지 않겠다는 뜻이지? 응?

    대답 대신 목선후가 내 한 손을 잡더니 손바닥을 펴서는 자신의 뺨에 댔다. 깎은 듯이 단정한 뺨과 긴 속눈썹에 내 손끝이 닿았다.

    살다 살다 내 손바닥을 질투할 줄이야.

    “아까는 열이 없더니 지금은 좀 뜨겁군. 누우시오. 물수건을 가져오라 해야겠소.”

    이 상황에서 열이 안 오르는 게 이상한 거얏!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목선후가 방을 나가 버렸다. 이쯤 되면 저 샌님이 나를 놀리는 거라고 봐야겠지?

    그치, 원래의 안안용? 너와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령 네가 목선후와 보낸 초야에 대한 기억 같은 거. 목선후와 안안용만이 아는 그날 밤의 기억 말이야.

    그럼 이렇게 복잡하지 않을걸.

    정오와 말순이 대야와 수건을 들고 들어왔다.

    “아씨, 뺨이 빨개요.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하녀가 주인아씨인 나를 개에 비유했다. 기분이 나빠야 되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정말로 머리가 아파서 털썩 자리에 누웠다.

    ***

    얼마 후 반옥금이 양주로 내려갔다. 본인은 창피해서 조용히 내려가고 싶었겠지만 열 명이 넘는 첩들이 울고불고 싸우면서 하나뿐인 반옥금의 마차에 매달렸기 때문에 온 환성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 시대는 구경거리가 별로 없어서 그런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든다.

    부친인 양주자사는 임지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모친이 아들을 데리러 왔는데 장남에게 마음이 약한 모친은 마차에 탈 수 있는 첩은 데리고 가겠다고 했단다.

    양주에 본처가 엄연히 있는데도.

    그러자 젊은 여인들은 온 힘을 다해 마차 안으로 기어 들어갔고 결국 반옥금과 모친이 마차 밖으로 밀려났다.

    화가 잔뜩 난 모친이 첩들을 모조리 쫓아 버렸고 반옥금은 꽃처럼 예쁜 첩을 한 명도 양주로 데리고 가지 못했다.

    그 재밌는 광경을 못 봐서 너무 아까웠다. 막장 드라마를 라이브로 볼 수 있었는데.

    “그럼 그 첩들은 어떻게 됐어? 갈 데가 있어? 불쌍하잖아.”

    “아씨, 갈 데가 왜 없어요. 반옥금의 첩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젊어서 환성의 한량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줄을 섰대요.”

    “그렇구나. 갈 데가 있으니 다행인 건가?”

    “그래서 만 냥 아씨에 대한 소문은 사라졌어요, 아씨.”

    “엉, 그래?”

    더워서 헥헥거리며 대답했다. 팽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에 앉아 있는데도 덥다.

    “올해는 유난히 더위를 타시네요, 아씨.”

    정오가 내 등에 부채를 세 개 부치며 말했다. 정오야, 나도 에어컨이 없는 여름은 처음이거든. 내 몸은 안안용이지만 정신은 현대인이라 더위를 참기가 어려웠다.

    “혼인하시더니 허약해지셨나 봐요. 아유, 식은땀 좀 봐요.”

    말순이 수건으로 내 목과 이마의 땀을 훔쳤다.

    “포목점에 등을 달았다고 민아가 아씨께서 언제 오시느냐고 물었대요. 빨리 보여 드리고 싶다고요.”

    “어머니가 아직 못 나가게 하시니 며칠 후에 가자. 나도 보고 싶어.”

    “그 등 이름이 상등이라면서요. 위에 다니까 상등인 거예요?”

    샹들리에라서 상등이야. 샹등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응.”

    “그런데 아씨, 언제 시댁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이렇게 지내도 괜찮을까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혼인한 여자라는 사실을 까먹고 벌써 두 달이 넘게 나와 목선후는 친정에 눌러앉아 있다.

    “그러게, 나도 모르겠어.”

    “아, 공자님 오시네요.”

    정오와 말순이 벌떡 일어섰다. 별당으로 들어오는 목선후가 보였다. 그가 매일 학당에 잠깐씩 들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궁금해진 나도 반듯이 앉아서 기다렸다.

    “정오야, 시원한 수박을 좀 가져와.”

    “네!”

    우렁차게 대답한 정오는 뛰어갔지만 팽문을 의식한 말순은 조신하게 중문 쪽으로 가는 허리를 비틀며 걸어갔다. 눈을 감아도 말순이 팽문을 좋아하는 게 보일 지경인데 팽문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안 한다.

    “팽문아, 중문에 가서 계피과자 좀 사와.”

    팽문이 목선후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다녀와도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다녀오너라.”

    “말순이를 데려가. 그 애가 잘 고르거든.”

    목선후의 말에 내가 재빨리 덧붙였다.

    “네.”

    마지못해 팽문이 나가고 팽나무 아래 평상에는 나와 목선후가 마주 앉았다.

    부채를 부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등줄기로 주르륵 땀이 흘렀다. 현대에서는 울트라 쿨링 원피스 하나로 여름을 버티곤 했는데 지금 나는 팬티 역할을 하는 속속곳에 속바지에 속치마에 겉치마까지 입고 있다.

    현대보다 없는 거라곤 브라 하나뿐이다.

    목선후가 커다란 종이부채를 펴더니 내게 부쳐 주었다.

    “무슨 땀을 이렇게 많이 흘리는 거요?”

    설명하기도 귀찮고 설명한대도 알아듣지 못하겠지.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기 전이라 현대보다 시원한 여름이긴 하지만 에어컨에 익숙한 내가 참을 정도는 아니다.

    정오가 수박을 예쁘게 잘라서 작은 상에 받쳐 들고 왔다.

    “공자님과 할 얘기가 있으니 부를 때까지 오지 마.”

    “네, 아씨.”

    정오까지 나가자 넓은 별당에는 우리 두 사람만 남았다. 팽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스스 스스 소리를 냈다.

    ***

    북행궁은 일 년 중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절이다. 한낮을 제외하고는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시원하다. 화원에는 화려하고 향기로운 여름 화초들이 벌과 나비를 불러서 대가의 풍경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화원 한편 팔각정에 비스듬히 누운 노부인이 화려한 날개를 펄럭이는 호랑나비를 바라보았다.

    “마마, 왕비 마마께서 오신다는데 왜 말리셨습니까?”

    김 상궁이 얼음을 띄운 식혜를 대비에게 올리며 물었다.

    대비는 작년 여름 왕궁이 참을 수 없이 덥다면서 북행궁으로 거처를 옮기더니 추운 겨울까지 보내고 다시 여름을 맞이했다.

    며느리인 왕비 입장에서 계속 시종들만 보냄은 불효라고 생각했는지 올여름에 여기로 와서 대비를 모시며 피서를 하겠다고 알려왔다.

    “왕비가 오면 선후가 못 오지 않느냐?”

    대비는 작년 봄에 손자의 존재를 알았다.

    ‘혹시나 소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마마마께서 선후를 돌보아주십시오.’

    ‘그렇게 중요한 일을 지금까지 어미인 내게 숨겼단 말이오? 그렇게 나를 못 믿었소이까?’

    ‘그게 아니옵니다. 평생 선후를 보지 않고 목씨 집안 아이로 살게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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