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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4화 (4/92)

4화.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야

저건 안안용을 무시하는 비웃음 같아.

뭐 어때. 안팎으로 저 정도 영재면 다른 사람을 무시 안 하기가 더 힘들 거다.

내 눈빛이 점점 더 뜨거워졌는지 목선후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며 시선을 돌렸다.

목선후, 수능 영어 시험지를 펴 든 네 앞에 스톱워치를 들고 서 있고 싶어.

커다란 영어 시험지 위를 사선으로 달리는 네 눈동자를 보면서 말이야. 너는 몇 분에 펜을 놓을까?

영어 듣기를 빼고 읽기 문제는 45분 정도에 풀어야 하는데 우리 학원에서 제일 빨리 푼 학생이 25분이었다.

목선후 정도면 20분 이내에 풀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똑똑한 사람에게 무조건 호감을 느끼는 뇌섹남 콤플렉스가 있다. 오랫동안 수능 영어를 가르치다 발전한 습관인 듯하다.

목선후의 희고 반듯한 이마와 붉은 입술을 습관처럼 불타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모두 식사를 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느낄 정도로 내 목과 뺨이 뜨거워지고 있었으니까.

목선후와 나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목이후가 고개를 들고 나와 동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목이후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등급도 떠올랐다.

사 등급.

그의 나이와 경력으로 볼 때 높은 등급이지만 목선후와는 차이가 꽤 컸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끝나고 과일을 깎아서 식탁에 올리자 시부모님은 우리끼리 먹으라며 먼저 자리를 떴다.

“제수씨,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앉아서 드세요.”

목이후가 사람 좋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네, 아주버님.”

냉큼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다. 장양란과 목선후의 날카로운 시선을 이마와 뺨에 느끼면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음식이 식었겠습니다. 다시 데워 오라 하지요.”

목이후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합니다.”

현대에서는 수업이 너무 많아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쉬는 시간 십 분 동안 김밥 한 줄을 잘 씹지도 않고 후다닥 목구멍에 넘기고 이까지 닦은 후 강의실에 들어가야 했다. 오 분 밥 먹기, 오 분 씻기, 오 분 커피 마시기에 익숙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이 세상은 0.8배속으로 보는 막장 아침드라마라고나 할까. 적당히 막장이고 적당히 느리다.

나는 밥과 국, 그리고 세 가지 반찬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지난번에는 잘 못 드시더니 어느새 우리 집의 빈한한 찬에 익숙해지셨군요.”

목이후의 말에 장양란이 초를 쳤다.

“별채에서는 매일 구첩반상을 들인다던데 하루 한 끼는 이리 먹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도련님?”

“네, 형수님.”

처음으로 듣는 목선후의 음성은 낮고 풍부했지만 태도는 얄미웠다. 마누라를 까는 형수 편을 드는 거야, 지금?

“동서, 자네 외숙의 아들이 이번 향시에 또 떨어졌다면서?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 열넷? 열다섯?”

장양란의 말에 씹던 나물을 꿀꺽 넘겼다. 대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맛이 떨어져서.

“서른이요.”

이 나라에는 세 가지의 과거 시험이 있는데 향시는 제일 먼저 보는 시험이라 대개 열다섯 이전에 시도해서 이십 대 초반에 통과한다. 이 시기가 넘으면 합격하더라도 다음 시험에 도전하지 않고 낙향해서 학당을 차리거나 다른 생업을 찾는다.

즉 관리가 되거나 학자가 되려면 이십 세 전후로 향시에 합격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 서른인 외사촌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세상에, 그 나이에 향시에 떨어졌단 말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수하게 놀란 척을 해 봤자 이 자리에서 그걸 믿어 줄 사람은 없다…… 가 아니구나.

진지한 눈빛으로 장양란에게 수긍하는 두 남자에게 입이 떡 벌어졌다. 믿을 수가 없어. 이 집 남자들은 공부는 잘하는지 몰라도 사람에 대한 이해도는 바닥이구나.

“자네 집에는 오촌까지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더니 이번에도 어렵겠네. 저를 어쩌나.”

남자들이 호응해 주자 장양란은 아예 대놓고 나를 긁어댔다.

“괜찮습니다. 먹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매끼 구첩반상 받고 산답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마세요, 형님.”

“맞습니다. 사람은 다 자기 몫이 있지요.”

목이후가 내 편을 들었다. 이런 사람에게서 천자문을 배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매일 출근하는 목이후는 시간도 없고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이니 제수씨와 머리를 맞대고 공부를 할 수는 없다.

나는 눈앞의 블링블링한 일 등급을 살펴보았다.

잘생기고 실력 좋은 과외선생. 강남에 세워 놓으면 한 밑천 땡기겠는데.

스스로 공부하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가르치기도 잘한다.

내가 눈으로 범생이의 값어치를 따지는 사이, 동서를 편든 남편에게 화가 난 장양란이 먼저 가겠다고 일어섰다. 목이후도 따라 일어서고 결국에는 목선후와 나만 남게 되었다.

장양란이 안 보이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국물 한 방울까지 맛있게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이가 안 좋아도 의리상 식탁머리에 남아 있던 신랑이 입을 열었다.

좀 전과 달리 목소리가 아주 차갑다.

“오늘 책을 가져간 이유가 뭡니까?”

“어, 저기. 공부를 좀 하려고요.”

나는 감정을 누르고 평범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해 다행인 남자가 계속 까칠하게 시비를 걸었다.

“지금 나를 놀리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지난달에 내가 가르쳐 주겠다고 했을 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기억 안 나니 어찌 된 일이냐고 말해 달라고 할까? 정오나 말순이도 이런 얘기는 안 했는데? 결혼식 이후에 신부를 완전히 방치한 신랑이라고만 말해 주었다.

어째 새로운 관계를 시작도 하기 전에 이전에 진 빚이 발목을 잡는 느낌이다. 대충 얼버무리자.

“그, 그게 어때서요?”

“책 한 권이 얼마나 비싼지 아십니까? 가격을 떠나서 귀한 책을 그렇게 찢어발기는 사람은 학문이라는 고귀한 문에 들어갈 자격이 없지요.”

“나는 학문을 하려는 게 아니라 글자를 배우려는 건데요. 완전히 실용적인 이유로요.”

“그렇다면 그때는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글자를 몰라도 잘만 산다면서요.”

“사람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겨우 보름 전 일입니다.”

“생각은 한순간에도 바뀔 수 있어요.”

“나를 화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요?”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다시 배우시겠습니까?”

“왜 저를 가르치려는 건가요?”

“그 이유를 또 듣고 싶습니까?

“네.”

목선후의 검푸른 눈동자가 일렁이고 미세한 주름살이 입가에 서렸다.

“그대는 독선이라는 말도 몰라서 독을 탔다고 화를 냈으니까요.”

안안용이 그랬어? 헤, 귀엽네. 솔직히 그거 하나 모른다고 뭐 세상이 무너져? 국어 수능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독선을 독을 탔다는 말로 해석하다니 참신하고만.

“그럴 수도 있죠. 오히려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게 얼마나 치사한 일인지 아시나요?”

“반성이라고는 도무지 할 생각이 없군요.”

목선후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매를 휙 한 번 떨치고 성큼 방을 나가버렸다. 입을 벌린 채 목선후가 열어놓은 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했나?

이 시대 남자를 화나게 하는 건 너무 쉬웠다. 이 시대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면 안 되는가 보다.

***

다음 날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만 하고 안채로 건너가니 중문 앞에서 목선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 새벽빛에 젖은 남자의 얼굴은 어제와는 또 달랐다. 좀 더 초연하고 고아한 느낌이지만 나와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나도 체면을 차리느라 모른 척했다.

누가 봐도 사이 나쁜 부부처럼 우리는 널찍이 떨어져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어머님,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목선후가 묻자 시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어머니가 답을 했다.

“평안했다. 너희도 잘 잤느냐?”

“네. 오늘 형님은 서청에 가야 돼서 일찍 나갔습니다.”

“어제 들었다. 오늘 아침은 너희도 여기서 먹지 그러느냐?”

시어머니의 권유를 목선후가 미소를 띠며 사양했다.

“소자가 할 일이 있어서 간단히 먹고 나가야 됩니다.”

“알았다. 할 수 없지. 가 보거라.”

대답하는 시어머니의 음성이 실망으로 잦아들었다. 그 순간 시어머니의 등급이 머릿속에 툭 떠올랐다.

사 등급! 세상에.

친정어머니가 지지리 궁상이라고 했던 시어머니는 관직에 오른 아들과 맞먹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조금 잘난 체 해도 된다. 시어머니가 남자로 태어나 끝까지 공부를 했다면 큰아들보다 더 높은 관직을 받았을 터.

더구나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누르며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할지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오씨 부인을 무시해도 되는 건 아니지만.

안채에서 물러 나오는데 걷잡을 수 없이 하품이 나왔다. 수능 강사일 때는 주로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아침에는 늦잠을 잤다. 정오까지 잘 때도 많았다.

식빵이나 계란프라이 하나로 아점을 때우고 오후에는 수업 준비를 하고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빵빵하게 먹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것은 내 생체리듬을 완전히 깨는 것이다. 눈앞에 안개가 낀 듯 희미하고 이마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 너무 졸리네요. 가서 다시 자야겠어요.”

또 엉뚱한 말을 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목선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서둘러 안채를 벗어났다.

별채로 돌아와서야 동녘 하늘에 뿌옇게 황금빛이 어렸다.

미치겠다. 이런 아침 문안을 일 년이나 해야 한다니 안안용이 꾀병을 부리는 게 이해가 되는 아침이었다.

***

며칠이 지나 봄볕이 뜨거워질 무렵 친정에서 또 사람이 왔다.

아버지께서 굉장히 급한 일로 나를 찾는 것이라 했다.

정오를 시켜 시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은 후 반쯤 잠에 취한 채로 마차를 탔다.

저녁식사 때는 시중을 들고 새벽마다 문안 인사를 하는 것도 그럭저럭 적응이 됐다. 어쨌든 낮에는 온전히 혼자 쉴 수 있으므로 그다지 나쁜 상황은 아니다.

목선후는 그 후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그가 또 시비를 걸면 최대한 상냥하게 응대해야겠다는 내 결심도 점점 시들해졌다.

당분간은 목선후가 안안용의 신랑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기로 했다.

안안용 거라고 침 발라 놨으니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다. 상표 등록을 해 놨단 말이지.

친정에 가 보니 안안용의 부친과 다섯 남동생 외에도 몇 사람이 더 앉아 있다가 나를 맞이했다. 분위기가 장례식처럼 음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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