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35. 뭐든지 배워두면 써먹을 데가 있다. =========================
여름이 다가와서 그런지 대낮이 되니 쪄 죽을 것 같다. 우리나라 사계절은 ㅂ 여어어어어어어르으음 ㄱ 겨우우우우우우우우울 이라더니 그 말이 정확한 것 같다. 봄 날씨 즐긴 게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덥냐. 초여름인데도 이러면 대체 한여름에는 얼마나 더울지 벌써 걱정스럽다.
바깥에서 땡볕과 씨름하던 우리는 결국 자연의 힘에 패배하고 아무 카페나 들어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니 좀 살 것 같다. 도란이가 주문하려고 일어나길래 커피는 내가 사겠다고 말하며 일어났다.
“뭐 마실래?”
“음, 글쎄. 네가 보고 적당하다 싶은 거 골라줘.”
“오케이.”
“아, 이쏘 누님. 여기 와플 있으면 와플도 사 주세요. 아이스 와플.”
“알았어.”
주문하려고 돌아서면서 터져 나올 것 같은 흐느낌을 억누르려고 입을 틀어막았다. 인간적으로 부탁할 때 저렇게 존댓말로 애교스럽게 말하는 거 반칙 아닙니까. 이 카페에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아이스 와플을 먹여야겠다고 열의에 불탔지만, 이내 내 요리 실력이 얼마나 수준 이하인지를 자각하고는 체념했다.
다행히 카운터로 가니 아이스 와플을 판매한다고 되어있다. 오, 핑크 레모네이드도 있네. 나는 이거 마시고, 란이는 모카 프라푸치노 시켜줘야지. 우리처럼 더위를 피해 온 손님들이 많은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지만, 도란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진동벨이 금세 울렸다.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갔는데 생각보다 화려한 아이스 와플의 비주얼에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문제는 반은 아이스크림이고, 반은 생크림이네. 란이는 생크림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부분은 내가 먹어야겠다. 큭, 이번 여름에는 다이어트 안 해도 되겠다 싶었는데 머지않아 원상복귀 되겠는걸.
아냐, 자고로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랬어. 그러니까 이것도 0칼로리였으면 좋겠다. 흑흑.
아이스 와플도 바닥을 보인 지 오래고, 내 레모네이드도 어느덧 얼음만 남았지만, 밖이 얼마나 뜨거운지 잘 아니까 나가기가 싫다. 에어컨 바람 때문에 시원하고, 눈앞에는 란이가 보이고. 이런 지상낙원을 어떻게 벗어나겠어.
뭐, 지상낙원 조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란이가 아저씨 전화 받는다고 바깥으로 나가버리긴 했지만. 프랑스는 지금 아침일 텐데. 깨자마자 아들에게 전화 거시는 걸 보면 진짜 란이를 애지중지하고 계시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보다 통화를 오래 하네. 같이 수다 떨 상대가 없으니 급격히 심심해졌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금세 지겨워져서 그만뒀다. 스마트폰 배터리도 별로 없어서 게임을 하기도 그런데. 뭘 하며 도란이를 기다려야 하나 생각하다 가방 안에 십자수 하던 게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런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만들면 더 빨리 완성하겠지. 십자수 하는 걸 란이가 보면 조신한 매력을 어필할 수도 있을 테고. 크, 완벽해.
한창 낑낑대며 십자수에 열중하는데 통화를 마친 도란이가 왔다. 딴 거에 열중하면서도 도란이가 오는 걸 단박에 눈치채다니, 나 진짜 란이 전용 레이더라도 달렸나.
“왔어? 아저씨랑 무슨 얘기를 나눴길래 그렇게 통화를 길게 해?”
“여느 때처럼 간단한 안부랑 …이제 곧 장마철이니까 난초 관리 잘하라는 잔소리.”
…아, 아들과 난초를 동시에 챙기셨구나. 난초 쪽에 상당히 많은 비중을 둔 거 같긴 하지만. 잔소리를 어지간히도 들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는 도란이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근데 그거 뭐야? 손에 들고 있는 거.”
“이거? 십자수.”
“십자수? 취미로 하게?”
역시나 내 의도대로 도란이가 십자수에 호기심을 가진다. 거기다 넌지시 널 좋아한다는 걸 티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나는 도란이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아니, 완성하면 너 주려고.”
“…나? 아아, 생일 선물로 주려는 거구나.”
그걸 그렇게 받아치냐! 이 눈치 없는 놈아! 망할 거지 같은 타이밍. 웬일로 적재적소의 타이밍이다 싶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왜 하필 2주 뒤에 란이 생일인 건데. 진짜 생일 날짜까지 나를 안 도와주네!
아, 힘 빠져.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온다.
“재밌어?”
“응.”
도란이의 물음에 툴툴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학창시절 때만 해도 이런 거에 소질도 없었을뿐더러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가정 과목은 수행평가든, 성적이든 모든 걸 내려놓았었지.
그런데 어른이 되고 하니까 또 색다른 것 같다. 그때랑 다르게 조금은 차분해져서 그런 걸까. 해보니까 조금 재밌긴 하다. 새하얀 원단이 알록달록한 자수로 하나하나 채워질 때마다 뿌듯한 성취감도 느껴지고.
란이가 왔으니까 하던 부분만 마저 하고 다시 수다 떨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열심히 하는데 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고 도란이를 보니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갑자기 왜 웃어?”
내 물음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던 도란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자리에 앉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해서 그대로 바짝 굳어버린 나다.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도란이가 씩 웃는다.
“바늘에 찔릴까 봐 조심조심하는 게 귀여워서.”
…엄마, 지금 내 심장 뛰고 있어? 순간적으로 과부하 걸려서 멈춘 것 같은데. 도란이랑 연애도 못 해보고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굳어버린 손을 필사적으로 가슴 위에 올려 제대로 뛰고 있는지 체크했다. 응, 발끝까지 뚝 떨어졌다 올라오긴 했어도 다행히 멀쩡히 잘 뛰고 있네.
내가 생존확인을 하는 사이, 내 손에 들린 십자수 바늘을 가져가더니 자기 손바닥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도란이다.
“십자수 원단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바늘이 뾰족하지 않아. 찔릴 걱정 없으니까 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돼.”
“…어, 응.”
“그리고 십자수는 앞면만큼이나 뒷면 모양도 중요한데…”
나한테 바늘을 쥐게 하더니, 바늘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붙잡고는 십자수 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도란이다. …십자수 하길 잘했어! 도란이가 옆에 없었다면 기쁨에 겨워 오열했다, 분명.
아, 너무 좋아. 좋은데 참는 게 힘들어. 힘든데도 좋아서 미치겠네!
잔뜩 흥분해서 영혼은 반쯤 가출한 상태였는데도, 도란이가 잘 가르쳐줘서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뒷면을 확인해보니 방금 했던 부분은 일자로 깔끔하게 되어있는데, 이전까지 했던 건 그야말로 중구난방, 개판 오 분 전이다.
“나야, 네가 만들어주는 건 어떤 거라도 좋긴 하지만, 이소 너 뭐가 됐든 완벽하게 하는 거 좋아하잖아.”
“응, 고마워. 덕분에 어떻게 하는 건지 이제 좀 알 것 같아. 근데 란이 너 십자수도 했었어?”
“…예전에 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사촌 누나 때문에 강제로 한 거지만.”
“사촌 누나라면, 혹시 …그분?”
도란이가 잔뜩 그늘이 진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그분이라고 칭하는 도란이 사촌 누나라면 나도 몇 번 본 적 있고, 도란이가 사촌 누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잘 알고 있다.
소심했던 어렸을 때와 달리, 지금은 마이페이스 기질이 다분해서 그런지, 깍두기 아저씨들 앞에서도 태연한 도란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5살 많은 사촌 누나.
내가 무서워하는 건 우리 엄마고, 이혁이가 무서워하는 건 나라면, 도란이가 무서워하는 건 사촌 누나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란이에게 절대적인 존재다.
도란이 사촌 누나께서는 청순하고 아리따운 외모의 소유자시지만, 성격은 정반대로 엄청 터프하시고, 저돌적이시다. 어느 날 란이가 이런 비유를 했었다. “이소 네가 폭주 기관차면, 은유 누나는 브레이크도 없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KTX야.”라고. 그 정도로 저돌적인 추진력이 엄청나시다.
…거기다 발상도 좋게 말하면 참신하고, 나쁘게 말하면 란이를 능가하는 과격한 4차원.
그런 사촌 누나께서는 어릴 적, 소심했던 도란이를 단련시키고자 하는 마음에 각종 기행을 도란이를 끌고 다니며 저지르셨고, 그것 때문에 몇 번 조상님을 영접할 뻔했던 도란이는 본능적으로 사촌 누나라면 두려움을 느낀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아이러니하게도 사이는 매우 좋아서, 종종 사촌 누나 집에 놀러 가는 도란이다.
“강제로 누나한테 반년 넘게 협조했더니 십자수를 저절로 터득하게 됐달까.”
“대체 뭘 했길래 반년씩이나 협조한 거야?”
“대딩 때, 누나가 뜬금없이 그러는 거야. ‘너 바느질 잘하지? 재능 기부 좀 하러 와.’라고. 보육원 봉사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갔더니 …자형한테 프러포즈하려고 십자수 액자를 만들고 있더라. 그것도 초대형 사이즈로.”
“…헐.”
“프러포즈 일주일 전쯤에는 누나가 피로회복제를 가득 사와서는 나한테 억지로 먹여가며 잠도 재우질 않았어. 그렇게 둘이 밤새가면서 만든 덕에 이틀 남겨두고 완성하긴 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지금도 피로회복제 냄새는 맡기도 싫어.”
얼마나 싫으면 이야기를 하면서도 부르르 몸서리를 치는 도란이다. 의도치 않게 안 좋은 기억을 끄집어낸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어째 도란이가 좀 침울해진 것 같기도 하고. 뭘 해야 도란이 기분이 나아지려나.
“이거, 생일 선물이 아니라 마리안느 방석으로 쓰라고 만드는 거야.”
“…응? 마리안느 거라고? 진짜?”
마리안느 거라고 했더니 언제 침울했냐는 듯 도란이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기뻐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어째 생일 선물이라고 했을 때보다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안도와 짜증이 동시에 밀려온다.
라이벌이 남자인 친동생이랑 무생물인 돌멩이라니. 권이소, 진짜 독특한 짝사랑 한다.
“대체 그 돌… 아니, 마리안느는 왜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건데? 애초에 그걸 왜 가져 온 거야.”
“…음, 사실 처음 마리안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화 때문이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십자수를 놓아버렸다. 대체 화랑 그 돌멩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 물음에 살짝 웃어 보이고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도란이다.
============================ 작품 후기 ============================
soae님// 저도 궁금합니다!! 상상만 해도 귀여울 것 같ㅇ...(엄마미소)
샤냥꾼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옳다구나 ㅋㅋㅋㅋㅋㅋ 샤냥님 표현력이....bb
낑깡깡낑님// 헉.. 저도 제 소설을 재밌게 봐 주시는 낑깡님을 더...더럽..♡
연적이 여자인 게 나을까, 돌멩이와 남자인 친동생인 게 나을까
(부먹이냐, 찍먹이냐에 버금가는 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