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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35화 (35/97)
  • 00035 34. 먼저 좋아하면 지는 거라더니  =========================

    내 기억이 맞았는지 이른 시간인데도 문을 연 초밥집이다. 점심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한산하긴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도 있다.  도란이가 햇살이 눈부시다고 하길래 창가와 거리가 먼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언제나 그렇듯 별다른 고민 없이 속전속결로 메뉴를 고르는 우리다.

    서로 취향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이런 건 좋다니까. 시간 낭비가 전혀 없잖아.

    메뉴도 골랐겠다, 슬슬 며칠 동안 습득한 유혹하기 스킬을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부드럽고 밝은 미소로 남자를 쳐다본다.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하겠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자. 도란이가 선글라스를 벗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길래 생글생글 웃어보았다.

    안 하던 짓 하려니까 얼굴 근육이 아파져 온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나를 따라서 배시시 웃는 도란이다. …졌다. 포기, 리타이어, 항복. 제가 어떻게 감히 웃는 거로 란이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웃을 때마다 눈꼬리가 아래로 쳐지는 게 귀여워서, 저절로 무장해제가 되어버리는 저 웃음을 무슨 수로 이기냐고!

    됐어, 준비해온 스킬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하나쯤은 과감히 포기한다.

    두 번째, 남자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준다.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얼마나 잘 듣고 있는지 보여주는 호응도 중요한 거 아니겠어? 도란이의 이야기에 공감해주면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처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반응을 보여주면 크, 완벽해.

    사실 도란이가 하는 거 따라 하는 거지만.

    “근데 란이 너, 온라인 게임은 거의 안 하잖아.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하는 거야?”

    “그 게임. 레벨 50 찍으면 판다를 탈 것으로 사용할 수 있거든. 느릿느릿 움직이는데 속도는 빠른 게 진짜 귀여워서 그걸 목표로 달리고 있어.”

    대화주제가 제대로 먹혔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도란이다. 그러고 보니 얘 판다 엄청 좋아하지. 쿵푸 하는 판다 애니메이션을 시리즈별로 기본 3번 이상 볼 정도의 판다 마니아. 판다 애니메이션 1편을 처음 봤을 때 “통통한 주먹밥이 살아서 춤추는 것 같았어.” 라며, 잔뜩 흥분해서는 어쩔 줄 몰라 했었지.

    권이혁, 딱 봐도 도란이의 취향을 이용해서 같이 하자고 꼬드겼구먼?

    “오, 귀엽겠네. 그래서 레벨은 몇까지 올렸어?”

    “…이제 38? 조금만 더 올리면 돼.”

    “으음, 그래? 진짜 얼마 안 남았네. 그럼 50 찍을 때까지 계속할 거야?”

    “목표로 잡았으니까 찍을 때까지는 하겠지. 그런데 이소 너 계속 바빠?”

    뜬금없이 나 바쁜지는 왜 물어보는 거지. 솔직히 요 며칠 삽질한다고 연락을 안 했던 거지, 진짜로 바빴던 건 아니라서 죄책감이 조금 생긴다. 다행히 한동안은 좀 한가할 예정이니까 안 바쁘다고 말해줘야겠지.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도란이다.

    “이번 달 안에 찍으려고 했었는데, 그냥 느긋하게 해야겠다.”

    “갑자기 왜? 너 한 번 목표 세운 건 끝까지 하잖아.”

    “이소 너 이제 안 바쁘다며. 그럼 너랑 놀아야지, 그동안 못했던 통화도 자주 하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제대로 치명타 맞았다.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 말라고. 분명 내가 유혹하려고 시도하는 건데 왜 자꾸 내가 말려드는 것 같지? 내가 왜 점점 더 좋아하는 것 같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탓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걸 티 내지도 못하고 애써 참고 있느라 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나 보다. 날 빤히 보더니 시무룩해지는 도란이다.

    “설마 이소 누님 나랑 안 놀아줄 거야?”

    “…아니, 놀 거야. 그것도 아주 많이.”

    단언컨대 내가 일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으면 네 옆에 온종일 붙어 있었다. 아니, 당장에라도 너희 아저씨 찾아가서 “아드님을 제게 주십시오, 평생 먹여 살리는 대신 옆에서 계속 끼고 살겠습니다!”라며 소유권을 달라고 주장할 거야. …그러려면 매주 복권이라도 사야 하려나.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환히 웃는 도란이다. 엄마, 아빠. 아무래도 맏딸, 옆집 아들 때문에 돌연사할 것 같아요.

    요새 밥을 거의 안 먹어서 잘 먹을 수 있을지 조금 염려스러웠지만, 무사히 싹 비웠다. 크, 역시 살면서 탈이 난 적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내 튼튼한 위장, 리스펙트.

    첫 번째, 두 번째는 보기 좋게 도란이한테 져버렸지만, 아직 준비해둔 스킬은 남아있다. 힘내자.

    세 번째, 상대방을 설레게 하는 스킨십을 할 것. 개인적으로 이걸 가장 고민했었다. 스킨십에 스스럼없는 도란이니만큼 어떤 걸 시도해야 설렐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으니까. 아까 내가 먼저 손을 잡았을 때도 잠깐 멈칫한 게 전부였을 정도니.

    그래서 설레게 만드는 스킨십 하는 법을 열심히 찾아봤다. 여러 가지 찾아본 결과,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섬세함을 어필할 방법을 쓰기로 결정했다. 바로 핸드크림 발라주기!

    …사실 말은 엄청 그럴듯하긴 해도 ‘핸드크림이 뭐예요, 먹는 거예요?’라고 생각하는 내가 핸드크림을 준비한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게 문제지만.

    계산하고 밖으로 나온 도란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문득 시작부터 상당히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핸드크림을 도란이 손에 짰다.

    …어째 철저히 터득했던 이론과는 상당히 다른 실전이 되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움직임이 멈춘 도란이가 이내 재부팅이 된 건지, 자기 손에 한 움큼 짜인 핸드크림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뭐야, 이거? 향은 좋은데.”

    “핸드크림.”

    …나도 내가 너 꼬셔보겠다고 핸드크림 산 게 믿기지 않으니까 그렇게 눈 크게 뜨지 말아 줄래? 도란이 손을 잡았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되냐. 짧게 후하고 심호흡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도란이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부드럽긴 했지만, 핸드크림을 펴 발라서 그런지 엄청 느낌 좋다.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어렴풋이 전해지는 온기도 괜스레 사람 떨리게 만들어. 이성 한 가닥이라도 붙들고 있어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대로 덮쳐버릴 것 같다.

    하나 남은 이성도 제 기능을 상실한 건지 계속 도란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도란이가 거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자기 손을 만지작거리는 내 손을 바라보더니 깍지를 꼭 끼는 도란이다.

    “오, 신기하다. 느낌 되게 보들보들해. 이래서 핸드크림을 쓰는 건가?”

    “…어, 뭐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긴 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대공황상태다.

    얘가 이렇다니까! 스킨십이 거리낌이 없는 것도 모자라 자각이 없다고! 나는 만질 때마다 온몸이 벌벌 떨려서 죽겠는데, 얘는 왜 이렇게 태연하게 깍지까지 끼고 난리냐고! 아, 열 받아. 열 받는데 엄청 좋고 설레. 더 참다가는 나 진짜 미칠 것 같아.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도란이를 끌어안았다. 솔직히 나로서는 이것도 최대한 참은 거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했다면 검열 삭제당하고도 남았으니까. 멀뚱히 서 있기만 하던 도란이는 덩달아 나를 꼭 끌어안는다.

    “뭐야, 이쏘. 초밥이 그렇게 맛있었어?”

    “…아니, 그래. …일단 그렇다고 치자.”

    누가 연애고자 아니랄까 봐 눈치는 어디다 갖다 팔았는지 모르겠는 놈이지만, 그것마저도 마냥 좋아죽겠다. 왜 사람들이 먼저 좋아하면 지는 거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다.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가슴 설레는 건 상대를 좋아하는 사람만 그런 거니까.

    이런 행동을 한다고 도란이가 알아줄까,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줄까, 혹시나 나를 밀어내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어. 불안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몇 배는 더 크니까. 날카로운 가시를 펼치며 살아나는 불안도 금세 좋아하는 마음에 삼켜져 흐물흐물해져 버려.

    뭣보다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게 흡수력이 무척 뛰어난 놈인지 사소한 자극 하나만으로도 집채만큼 커져 버린다. 란이에게서 느껴지는 시원한 초여름 향기에 가슴 설레는 바로 지금처럼.

    웃기게도 란이를 꼬시려고 한 행동들이었는데, 도리어 커진 건 내 마음이네.

    진짜 시작부터 페널티 제대로 안고 가는구나, 멍청한 권이소.

    짝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면서도 벗어나지도 못하고. 아니,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짝사랑의 끝을 스스로 이어서, 뫼비우스의 띠로 만들어버린 건 나 자신이니까,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정확한 건가.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일방적인 짝사랑 때문에 쓰라린 것도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 버렸으니까.

    인정하면서도 분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도란이 허리를 으스러트릴 기세로 꽉 끌어안았다.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소리에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꼬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내가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 나를 좋아해 달라고요, 도란 씨.

    이마저도 날아가 버리면 콱 덮쳐버릴 거니까.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계인님이 원하는 게 뭔지 알기에 +_+ 황금연휴에 제가...! (두둥) 능욕물.. 저도..(소근소근)(쑥떡쑥떡)

    sn님// 흐극, 저도 멍뭉미....좋아하는데.. 왜 내 주변에는 없어.. (우럭)

    3분컵라면님// ㅠㅠ 그러게요.. 왜.. 란이는 모니터 밖으로 안나오는 거죠 (우러럭)

    soae님// 요즘들어 제일 설레면서 보는 소설이라니../ㅅ/! 그런 감동적인 칭찬을 해주시다니..(울컥) 저도 얘네 둘 꽁냥거리는 게  너무 귀엽습니다.

    덮쳐라 (짝) 덮쳐라 (짝) <- 응?

    이소의 이성이 바닥나기 전까지 눈새 란이가 눈치챌 것인가.

    두근두근 덮쳐짐 카운트 다ㅇ...☆

    황금 연휴에 독자님들을 위해 이따가 특별 공지 하나를 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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