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25. 기념일 챙겨보고 싶었어. =========================
우리는 카페 근처 주차장에 세워둔 도란이의 차 안으로 들어왔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도란이다.
“…와, 창훈이 여친 여전하네.”
“선아가 전에도 그랬어?”
내 물음에 도란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토끼 눈을 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선아가 누군데?”
“너랑 방금까지 카페에서 얘기했던 애.”
“…아, 맞다. 걔 그런 이름이었지. …무슨 선아더라. 박선아?”
“이선아다, 이선아. 란이 넌 동기 이름도 기억 못 하냐?”
“남의 여친 이름 기억해서 뭐에 써.”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서 반박을 못 하겠네. 나 요즘 들어 자꾸 논리로 도란이한테 밀리는 느낌이 든다? 젠장! 내가 도란이보다 나은 게 운동, 게임, 그다음이 논리력인데, 딴 건 몰라도 4차원 또라이한테 논리력이 밀리면 어쩌잔 거야.
뭔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무튼 선아가 너한테 소개팅 권유해 왔었냐고.”
“…뭐, 대학 다닐 때부터 나만 보면 미팅이니 소개팅이니 그러긴 했지.”
왠지 좀 충격이다. 여태 도란이한테 그런 권유가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는 줄 알았는데. 도란이가 미팅이니 소개팅이니 한다는 말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아까 선아가 도란이를 솔로로 두기 아깝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의례적으로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객관적으로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다.
사고회로가 좀 특이해서 그렇지, 선이 고와서 남자다운 것과는 거리가 좀 멀어도 준수하게 생기긴 했고, 어른들께 깍듯하고, 재능도 많고, 착하고, 다정다감하고. …거기다 웃는 모습이 무척 귀엽고. 4차원인 것만 참작할 수 있다면, 충분히 인기 있을 만하네.
인정하니까 뭔가 진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그러면서도 진짜 한 번도 소개팅 같은 걸 해본 적 없는지 무척 궁금했다. 혹시 소개팅이나 미팅한 적 있냐고 물어봤더니 고개를 젓는 도란이다.
“쭉 그렇게 권유받았으면서 왜 여태 한 번도 안 해본 거야?”
“권유받으면 다 해야 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소개해달라고 말하러 가?”
“…아니, 싫어. 가지마.”
“응, 안 갈게. 애초에 하고 싶지도 않고.”
도란이는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지금 쟤가 나 놀리나 싶어 울컥했지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안도해 스르르 풀어지는 나다.
“…아, 갑자기 소개팅이니 뭐니 시달려서 깜빡하고 있었네.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그럼 뭐가 중요한데.”
“4반 깜찍이한테 들었는데, 오늘이 로즈 데이란 날이래. 난생처음 알았어!”
…그야 넌 여태 주고받을 애인이 없었잖아. 분명 란이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해맑게 말하는데, 왜 나는 짠하게 느껴지냐. 흑흑. 그래도 짠내를 유발하는 당사자가 잔뜩 들떴으니 그냥 넘어가자, 응.
도란이는 나를 빤히 보더니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하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크림 씨에게 요청합니다. 로즈데이를 겪어보게 해주세요!”
“…하, 대체 뭘 하려고.”
또 무슨 병신 짓으로 날 피곤하게 만들려는지 벌써 걱정이 앞선다. 암만 그래도 교문 앞 초대형 꽃다발보다는 낫겠지. 아니, 상대가 도란이니까 그것보다 더한 걸 하자고 할지도. 뭘 할지는 몰라도 복면이라도 사서 쓰고 하면 좋겠다. SNS에 얼굴 팔릴 일은 없게.
반쯤 체념해서 녀석의 말을 기다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는 도란이다.
“꽃등심 먹으러 가자.”
“엉?”
“꽃 주는 날이라며. 그러니까 꽃등심 먹자.”
다혜야? 대체 얘한테 로즈데이를 뭐라고 설명한 거야. 설명을 하다 말았니?
기념일 이름에 대놓고 로즈라고 되어 있잖아. 그냥 꽃이면 되는 게 아니라고. 아니, 그전에 꽃등심은 이름에 꽃이 들어갔다뿐이지 꽃이 아니거든? 머릿속에선 내뱉고 싶은 말이 수두룩하지만, 황당해서 태클 걸 의지도 없다.
“꽃 선물하는 날은 맞는데. …로즈잖아, 로즈. 장미를 선물하거나 하는 날이거든?”
“그럼 꽃등심을 장미 모양으로 접어줄게. 먹으러 가자.”
대체 꽃등심을 장미 모양으로 어떻게 접겠다는 거야! …라고 말하려 했지만, 도란이라면 왠지 진짜로 접으려고 할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암만 들어도 단순히 꽃등심이 먹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은데. 로즈데이는 그저 꽃등심을 먹기 위한 좋은 핑계로 써먹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지?
“와규? 역시 꽃등심은 와규로 먹는 게 좋겠지?”
“…너 그냥 고기가 먹고 싶은 거지.”
“응. 어떻게 알았어?”
“딱 봐도… 아니 아니다, 그래, 먹자.”
고기 먹으러 가자니까 잔뜩 신나서 운전대를 잡는 도란이다. 아, 나 진짜 미쳤나. 쟤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또라이짓 하는 거 볼 때마다 나오던 한숨은 안 나오고 …빙구 같은데 귀엽다는 생각만 자꾸 들어.
고깃집에 오면 있다는 두 가지 유형. 굽는 자, 그리고 먹는 자. 도란이와 나는 유감스럽게도 둘 다 굽는 자다. 대개 고깃집에서 고기를 굽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스킬과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타인이 굽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도란이는 다년간 집에서 요리를 해왔기 때문에 정성 들여 굽는 쪽이고, 나는 고깃집 알바를 했기 때문에 정성보다는 빠른 걸 선호한다.
굽는 방식이 완전히 다른 관계로 우리는 서로가 굽는 걸 볼 때마다 이런저런 핀잔을 준다. 덕분에 도란이와 고깃집에 오면 쓸데없는 트러블을 막기 위해 가위바위보로 집게 주도권을 정하게 됐다.
그리고 오늘의 패자는… 나. 젠장. 단판 말고 삼세판 할걸.
도란이가 굽는 건 속도가 느려 불만이지만, 고기가 두꺼워서 장미 모양으로 접는 건 힘들겠다고 중얼거리는 게 귀여워서 넘어간다.
영롱한 붉은 빛을 내뿜던 소고기가 불판에 닿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휩싸여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변해간다. 크, 향긋한 고기 익는 냄새. 역시 언제나 고기는 옳습니다.
그나저나 암만 봐도 단순히 고기 먹자고 부른 거 같은데, 왜 안 쓰던 연애용 폰으로 연락을 한 거지. 내가 고기 킬러인 건 도란이도 잘 아니까 평범하게 연락해도 고기 먹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걸 알 텐데.
“근데 그냥 고기 먹자고 하면 될 걸 왜 굳이 연애용 폰으로 연락한 거야?”
“성준이 때문에.”
“엥? 걔는 왜.”
“오늘 걔 기념일 준비하는 거 협조 좀 했거든. 도와주다 보니까 나도 챙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길래.”
…그리고 챙기는 방식이 이름에만 꽃이 들어가는 꽃등심이고. 어떻게 보면 도란이답다. 평범함과는 다른 노선을 걷는 게.
“난 네가 연애용 폰으로는 연락을 안 하길래 까먹었거나 싫증 난 줄 알았지.”
“까먹을 리가 없잖아. 그냥 요새 보험을 들어놓은 기분이라 연애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어서.”
“…무슨 보험?”
“마리안느의 엄마를 구하지 못해도 같이 살아줄 혁이가 있으니까 독거노인으로 늙어 죽진 않겠구나 보험.”
소개팅 피하려고 둘러댄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 아, 뭔가 갑자기 엄청 열 받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면서 씩씩대는데, 먼저 익은 고기 한 점을 내 입에 넣으며 웃는 도란이다.
“농담이고, 요새 준비할 게 좀 있어서 바빴어.”
“…뭐 준비하는데.”
“축가.”
아, 쟤 다혜 커플 결혼식 때 축가 부르기로 했지. 근데 축가는 보통 한두 달 전에 준비하지 않나? …걔네 가을에 결혼하는데. 대체 축가 부르면서 뭔 짓을 하려고 근 반년 전부터 준비하는 건지 걱정이 마구 피어오른다.
“그럼 걔네 결혼할 때까지 바쁠 예정?”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을걸. 왜?”
“…너 없으니까 심심해서.”
집게로 다 익은 고기를 불판 가장자리로 옮기던 도란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날 바라보며 짓궂게 웃는다.
“권이소 씨가 웬일이래. 나 없다고 좋아할 줄 알았더니.”
“…왜, 뭐. 불만 있냐?”
“아니, 좋아서.”
좋냐. 난 지금 너 때문에 심장 터져서 죽어버릴 것 같은데. 진짜 저렇게 배시시 웃는 거 금지하는 법 제정이 시급하다. 안 그러면 내가 제 명에 못 살 거 같아. 근데 왜 나는 심장이 쿵쾅거려 죽을 거 같다고 하면서도 쟤가 웃는 걸 계속 보게 되냐고!
***
우리는 정말로 고기만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기만 먹고 왔다고 딱히 불만인 건 아니다. 오히려 남들 보는 앞에서 초대형 꽃다발을 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평소에는 우리 집에서 놀다 갈 녀석이 오늘은 곧바로 자기 집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 근 일주일 만에 보는 거라 그런지,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게 영 아쉬워 올라가는 도란이를 붙잡았다.
“어? 왜?”
“진짜 안 놀고 가?”
“응. 집에 가서 할 일이 좀 있어.”
웬만하면 내 권유를 거절하지 않는 도란이가 이렇게까지 거절한다는 건 중요한 일이 있다는 소리다. 잘 알면서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놓기가 싫지.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
도란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여전히 자기 옷깃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미안, 대신 다음에 오늘 못 논 것만큼 오래 놀자, 응?”
“…언제. 걔네 결혼 끝나고?”
“아니, 이소 네가 나 없으면 심심하다니까 축가 준비는 최대한 일찍 끝내려고 노력할 거야. …뭐, 사실 내가 노력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너랑 놀 시간은 마련하려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랑 놀 시간을 마련한다는 말이 기뻐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란이가 웃으며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순순히 고개 끄덕이지 말걸.
“대신 오늘은 나 말고 귀여운 토깽이가 놀아줄 거야.”
“뭐? 토깽이?”
“응, 토깽이. 갈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도란이는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토깽이? 토깽이가 우리 집에 있다고?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키웠던, 우리 바깥으로 도주하는 게 특기였던 그 토깽이? 근데 그 토끼, 우리가 졸업하기 전에 죽었잖아.
…잠깐, 설마 저 인간, 우리 집에 토깽이 닮은 토끼 사서 풀어놓은 거 아니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아니, 도란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악! 진짜면 어떻게 해! 토끼, 환약같이 생긴 똥 장난 아니게 싼다고!
다급하게 집으로 뛰어들어가니 다행히 거실은 말짱하다.
…뭐지, 내 방에 가둬뒀나. 아니, 암만 도란이가 사고회로가 특이하다지만, 설마 진짜로 토끼를 갖다 놓았을까. 근데 방문 하나 여는 게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심호흡하면서 조심스레 조명을 켠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침대 위에 놓여있는 새하얀 토끼 인형이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는 게 보이니까.
“…나 진짜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도란이 좋아하게 되어버린 거 같아.
============================ 작품 후기 ============================
토요일에 올린다고 해놓고 금요일에 올려 봤어요. 사실, 토요일에 연재가 힘들 것 같아서 (흑흑)
드-디-어 이소가 자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경축)
*다음 연재는 이번주 주말 ;D 고통스러워 할 이소를 보여드릴 생각에 벌써부터 신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