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24. 내가 너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
모처럼 휴일에 친한 대학 동기인 선아와 약속을 잡았다. 도란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이전 같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지금은 솔직히 좀 서운하다고 해야 하나, 어딘가 자꾸 찝찝한 게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도 그럴게, 요즘 통 도란이 얼굴을 못 봤다. 평소에는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녀석이 최근 들어 일이 있다는 이유로 집에 붙어있지를 않아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뭐,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를 주니까 목소리는 듣지만.
그래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는 도란이가 못내 서운했다. 나중에는 ‘자기만 바쁘고 일 있나. 나도 볼 친구 있고, 바쁜 몸이다,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동기와 약속을 잡은 나였다.
욱해서 잡은 약속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선아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니 즐겁긴 하다. 선아 커플의 시시콜콜한 연애 얘기도 듣고, 직장에 대한 한풀이도 열을 토하며 털어놓는데 카페 안으로 팔짱을 낀 커플이 들어오는 게 보인다.
남자가 프러포즈라도 했는지, 여자가 손에 장미꽃다발을 든 채 수줍게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카페 안에 있는 커플 손님 대부분이 꽃다발을 가지고 있네. 여기 근처에서 꽃다발 주는 행사라도 하나? 의아해서 선아한테 물어봤더니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는 선아다.
“뭐, 왜 그렇게 웃는데.”
“권이소 솔로 생활 오래 했다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네. 오늘 로즈 데이잖아.”
“아?”
요즘 무슨 데이가 하도 많아서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말고는 기억도 안 하는 나다. 솔직히 기억해서 뭘 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는데.
“모를 수도 있지. 내가 언제 무슨 데이 신경 쓰는 거 봤냐?”
“그래도 로즈 데이는 충분히 기억에 남지 않아? 왜, 전에 원호 오빠한테 교문 앞에서 초대형 장미 꽃다발 받았었잖아.”
“…아.”
까먹고 있었는데 떠올랐다. 남들은 부럽다고 말했지만, 나한테는 끔찍했던 기억.
교문 앞으로 나오라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나갔다가, 원호 오빠에게 양팔로 끌어안아야 할 정도로 큰 꽃다발을 받았었다. 감격스럽기보다는 황당했고, 어이없었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벤트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쪽팔리기도 하고, 둘만의 추억으로 남겨두면 될 걸 남들에게 다 퍼트리는 느낌이라 상당히 별로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민폐라는 생각도 들고.
게다가 한 번 보고 치울 사람들이면 몰라, 대학 사람들 다 지나다니는 캠퍼스 교문 앞에서 그러고 있으니 나로서는 상당히 열 받았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원호 오빠와 크게 한바탕 싸웠었지.
그날 일이 떠올라 한숨을 푹 쉬는데, 선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는다.
“뭐야, 너 요새 란이랑 붙어 다닌다더니. 그렇게 좋다던 원호 오빠는 홀라당 잊었나 봐?”
“미친. 전혀 아니거든?”
“역시 아직도 못 잊은 거야? 하긴 그렇게 좋아했으니까….”
응. 한동안 제대로 된 생활도 하지 못할 만큼 그리워했지.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쓰라릴 정도로 좋아했지.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 느낌도 안 드는 거지.
그것보다는 선아 얘가 대체 내가 란이랑 붙어 다닌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됐는지가 더 궁금하다.
“근데 내가 요새 란이랑 붙어 다니는 건 어떻게 알아?”
“내 남친이 그러던데. 란이랑 약속 잡으려고 하면 매번 너 아니면 다른 친구랑 선약이 있어서 자기랑 안 놀아준다고.”
“…아.”
그러고 보니 얘 남친. 대학 다닐 때, 도란이랑 내내 붙어있던 애들 중 하나였지. 나랑은 별로 친하지 않지만.
도란이의 친구들은 나도 대부분 알고 있고 친하게 지내긴 하지만, 도란이의 대학교 친구들과는 그냥 안면만 튼 정도다. 도란이가 군대 가기 전에 사귀었던 친구들과는 나와도 그럭저럭 친하지만, 복학하고 나서 사귄 친구들과는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학년이 달라서 수업이 겹치는 일도 적었고, 한창 원호 오빠와 사귈 때라서 도란이와 만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도란이 본인이 바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까 노는 무리도 달라져서 도란이가 복학하고 나서는 자주 어울리지 않았었다. 도란이가 졸업할 때까지 쭉.
뭐야, 생각해보니 도란이가 군대 가 있을 때 말고도 붙어있지 않았던 적이 있긴 있네. …집 근처에서 허구한 날 마주쳐서 자각을 못 했을 뿐이었구나.
자주 안 놀던 그때도 집 근처에서 심심하면 마주쳤는데, 왜 지금은 일주일 가까이 얼굴도 못 보고 있냐고! 갑자기 울컥해서 레모네이드를 빨대도 빼고 들이키는데, 내 가방에서 낯선 벨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뒤적거리니 일전에 도란이가 줬던 연애용 폰이 울리고 있다. 혹시나 해 늘 충전을 해놓긴 했지만, …요 몇 주간 이 폰으로는 연락도 없길래 가상 연애고 뭐고 스리슬쩍 넘어간 줄 알았더니. 한숨을 쉬면서도 혹시나 전화가 끊길까 봐 재빨리 받았다.
“욥, 크림. 뭐해?”
“…친구랑 논다, 왜.”
“뭐야, 목소리가 왜 이렇게 뾰로통해. 어딘데? 나 거기 가도 돼?”
…머리로는 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여기가 어디고, 어느 좌석에 앉아있는 지까지 줄줄 불고 있는 나다.
“생각보다 가까운 데 있네. 그쪽으로 갈게.”
“…응. 늦게 오면 안 기다리고 갈 거다.”
“하하, 알았어. 빨리 갈게.”
이번 주 내내 얼굴도 못 볼 줄 알았더니, 어째 보기는 하네. 폰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고, 선아를 보는데 나를 보고 음흉하게 웃고 있다. 얘가 또 왜 이래.
“…뭐야? 누구야? 그것보다 그거 못 보던 폰인데, 설마하니 커플 폰?”
“너는 웨딩플래너 아니랄까 봐 심심하면 커플 타령이냐.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면 말고. 누구 전화야?”
“란이. 이쪽으로 온대.”
내 말에 오랜만에 도란이 볼 수 있겠다며 좋아하는 선아다. 그러고 보니 선아는 휴학을 길게 해서 내가 졸업한 후로는 도란이랑 자주 어울렸고, 도란이와 같은 해에 졸업했다. 그러다 도란이 다른 과 친구랑 사귀게 된 거고.
…은근히 네 주변에서 커플이 많이 생기는데 왜 정작 너는 안 생기니, 란아.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 20분도 지나지 않아 도란이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출입문에서 잠시 두리번거리던 도란이는 이내 우리를 발견한 건지 웃으면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일찍 왔지?”
“응. 진짜 가까운데 있었나 보네.”
“본가에 있었거든. 누구랑 같이 있나 했더니 창훈이 여친이네, 하이.”
“…헐, 순간 누군지 못 알아봤어. 란이 너 머리 폈네?”
선아는 도란이를 보자마자 놀라며 머리를 가리켰다. …나도 처음 봤을 때 엄청 놀랐는데, 너라고 안 놀라겠니. 선아의 반응에 저절로 공감하는 나다. 선아가 인사도 하지 않고, 헤어스타일이 바뀐 걸 먼저 언급하니, 살짝 당황하던 도란이는 이내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인다.
“왜, 안 어울려?”
“…아니, 와, 대박. 엄청 잘 어울려. 문창과 토이푸들이 웬일이래.”
“푸핫, 그 별명 엄청 오랜만에 듣는다.”
도란이 별명이 토이푸들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하긴 도란이가 복학했을 때쯤에는 거의 졸업반이었으니 과 생활을 자세히 알 리가 있나. 선아는 오랜만에 도란이와 만나 반가운지 도란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속사포처럼 얘기를 늘어놓았다.
“너 요새 자주 안 놀아준다고 울 남친 삐진 거 알아?”
“창훈이가? 하긴 얼굴 못 본 지 좀 되긴 했네. 그래도 메신저는 자주 하는데.”
“메신저만 자주 하면 뭘 해. 얼굴 안 본지는 몇 달이나 됐다며. 내 남친이랑 좀 놀아주라. 적어도 란이 너랑 놀면 클럽은 안 갈 거 아냐.”
“걔 요새도 클럽 자주 가나 보네. 지금도 그걸로 싸워?”
“요샌 반 체념상태야. 뭐, 클럽 가면 뭐 하는지 보고도 꼬박꼬박하니까.”
둘이 같이 있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잠깐인데도 내가 모르는 얘기들만 오가고 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란이는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니까.’ 같은, 내가 도란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들로 대강 유추하는 게 전부다.
왠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으스대고 있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몰랐던 부분을 지적해주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아, 맞아. 란이 너 아직 여친 없지?”
“…오랜만에 만나서 팩트로 때리지 말아 줄래?”
“푸하하! 미안, 미안. 너 여친 없으면 소개팅 시켜줄까 싶어서. 딱 너 같은 타입 좋아할 만한 애 알고 있거든.”
선아의 말에 명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아까 원호 오빠 이야기를 했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었던 심장이 누가 찌르기라도 한 듯 욱신거려 괴롭다.
“나 같은 타입이 대체 뭔데?”
“란이 너야, 좀 엉뚱하긴 해도 귀엽고, 순딩순딩하고 어쨌든 걔가 딱 좋아할 만한 타입이야. 소개해줄 테니까 만나봐. 걔 생긴 것도 되게 예…”
“미안, 거절.”
심드렁하게 듣던 도란이는 선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며 거절했다. 단호박 같은 태도에 선아는 부루퉁해졌지만, 내 심장이 욱신거리던 건 마법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왜! 넌 내가 매번 주선하려고 하면 거절하더라.”
“소개팅은 내 취향 아냐. 여러모로 소질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도란이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설마 전에 잠깐 했던 상황극 말하는 건가. 그거야 상대가 나니까 그랬던 거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란이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소개팅을 하겠다고 할까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뭐냐, 도란. 내 주선은 줄기차게 거절하더니 치사하게 소꿉친구의 소개팅 권유는 받아줬나 보다?”
“그야 네 속셈 뻔히 아니까 그러지. 상대랑 내가 잘돼서 결혼까지 가면 너한테 견적 받으라고 그러려는 거잖아.”
도란이의 말에 정곡을 찔렸다는 듯 흠칫하더니,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는 선아다.
“쳇, 그것도 있지만, 네가 솔로로 두기 아까운 놈이라 그런 거기도 하거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있으면, 언젠가는 누가 나 데려가 주겠지. 그리고 나 데려갈 사람 이미 하나 있어.”
“헐, 누구?”
“얘 동생.”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니 왠지 자꾸 목이 바짝바짝 타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다가 그대로 뿜어버렸다. 이 또라이가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냐! …아니, 혁이라면 진심으로 한 말일지도. 이러다 진짜 2년이 지나면, 혁이한테 도란이 뺏기는 거 아냐? …어? 잠깐 뭐 뺏… 응? 나 방금 뭔 생각…
“어쨌든 나 이소 데려간다. 더 놀아야 돼?”
“…아니, 뭐. 나도 곧 창훈이 만나야 하니까. 데려가, 데려가. …근데 이소 동생 남자 아니었나?”
…응, 내 동생 남자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도란이에게 이끌려 카페를 나온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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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룹님// 댓글을 한꺼번에 3개나 /_/ 저도 이소랑 란이 보면서 열심히 간접연애 하고 있어요 (큿) 사위 사랑은 장모니까요 /ㅅ/
왠지 1일 2연재 같은 게 해보고 싶더라고요 /ㅅ/ 그래서 하루에 두 편 올려요!
다음 연재는 토요일입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