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외전1. (What If)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
아침이 밝아오자 어머니는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찌개를 완성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도화가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도화를 깨워달라고 부탁했지만, 깨울 때마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도화를 잘 아는 아버지는 신문에 집중하는 척하며 못들은 체 했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아버지에게 재차 부탁하려는 순간, 도란이 씻고 욕실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도란에게 동생을 깨우라고 시켰다. 잠시 부모님을 번갈아 보며 어깨를 으쓱이던 도란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도화의 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도란의 예상대로 환한 햇살이 얼굴을 쨍하니 비추는데도 꿋꿋이 자고 있는 도화였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도란은 자신의 동생을 살며시 흔들며 깨우기 시작했다.
“화야, 눈떠. 아침이야.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으, 아빠! 진짜… 10분만.”
“아빠가 아니라 오빠거든요. 얼른 일어나. 너 그러다 또 엄마한테 혼난다.”
“힝. 오빠아. …나 밥 안 먹고 더 자면 안 돼?”
동생의 애교 섞인 잠투정이 마냥 귀엽기만 한 도란은 웃으면서 도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좀 더 재우고 싶었지만, 이 여사님의 분노가 자신에게 튈 것을 알기에 다시금 도화를 깨우는 도란이다.
“오빠가 힘들게 차린 아침인데 안 먹고 그냥 잘 거야?”
“…거짓말. 엄마가 부엌에서 밥하고 있는 거 다 들리거든.”
“아냐, 준비는 오빠가 다 했어. 엄마는 오빠가 해놓은 거 데우기만 하신 거고.”
“진짜?”
도란이 웃으며 “응”이라고 대답하자 마지못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는 도화였다. 도화는 오빠의 허리에 매달려 “출발”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은 도란은 이내 도화를 허리에 매단 채로 주방으로 걸어갔다.
주방에 도착한 도란은 아버지에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경례했다.
“도 씨네 4호, 배송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다, 3호. 4호는 얼른 자리에 앉도록.”
“들었지, 4호? 1호께서 앉으라고 하신다.”
도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도화의 팔을 도란이 톡톡 두드리자, 칭얼거리며 의자에 앉는 도화였다. 아버지가 밥과 수저를 식탁에 놓고, 도란이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접시에 담았다. 두 남자가 협조한 덕분에 어머니는 찌개만 옮기는 걸로 밥상 준비를 끝냈다.
“잘 먹겠습니다.”
“찌개에서 어째 엄마가 한 음식 냄새가 나는데.”
“얘 봐. 내가 한 음식 냄새가 대체 뭔데?”
“있어. 그런 거.”
의심의 눈초리로 찌개를 한술 뜬 도화는 이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도란을 째려봤다. 동생의 속았다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도란이었다.
“오빠가 한 거라며! 딱 먹으니까 엄마가 한 거네! 엄마가 만든 맛이 나잖아!”
“얘가 진짜. 내가 만든 맛이 대체 뭔데?”
“준비는 오빠가 다 한 거 맞다? 채소 썰고, 두부 썰고, 돼지고기 썰고. 다만, 제조를 안 했을 뿐이야.”
“…이씨.”
세 사람이 밥상에서 언성을 높이자, 가만히 한술 뜨던 아버지가 상황을 중재하려고 입을 열었다.
“화, 엄마가 열심히 해준 거니까 툴툴거리지 말고 먹어. 엄마가 오빠보다 요리 솜씨가 몇 단계 아래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빠 여자 요리 솜씨 함부로 탓하는 거 아냐.”
“여보!”
“에이, 사실이긴 하지만, 대놓고 말씀하시면 이 여사님 삐지십니다. 아버지.”
“…아들.”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어머니를 향해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며 윙크하는 도란이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도 어설프게 도란의 손 모양을 따라 했다.
자신을 놀리는데 도가 튼 밉상 부자지만, 이렇게 깜찍하게 애교를 부리면 노여웠던 마음도 금세 수그러들었다. 어머니는 못 이기겠다는 듯 두 사람을 보며 웃어 보였다.
웃고 떠들며 아침 식사를 하다 보니 어느덧 서두르지 않으면 도화는 꼼짝없이 지각인 시간이었다. 식구들은 대부분 밥을 다 먹었는데도, 여전히 반 이상 남아있는 도화의 밥그릇을 본 어머니는 도화에게 서두르라며 재촉했다.
“딸, 빨리 먹고 준비해야지. 너 그렇게 굼벵이처럼 꾸물거리면 지각한다?”
“뭐 어때요. 내가 태워다주면 되지.”
“앗싸! 역시 오빠가 최고야.”
“란이 네가 매번 태워다주니까 쟤가 아침마다 굼뜨게 굴잖아.”
어머니의 호통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인 도란은 옆에서 오물거리며 밥을 먹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도 이제 고3 수험생이잖아요. 체력 보충해야지.”
“맞아. 내가 요새 늦게까지 야자 한다고 얼마나 힘든데.”
“야자를 밤늦게까지 하면 뭘 해. 정작 공부는 안 하고 딴짓만 내내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오빠도 예체능이라 학교 다닐 때 공부 별로 안 했어.”
“아들!”
어렸을 적부터 사이가 좋은 남매였지만, 여전히 사이가 좋아도 너무 좋은 남매를 보고 고개를 젓는 어머니였다. 오빠인 도란이 동생을 끔찍이 예뻐한 덕분이긴 하지만, 도화 역시 가족 중에 오빠인 도란의 말을 가장 잘 따랐다.
문제는 오빠의 말이 곧 법인 도화라, 부모님의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경향이 있다는 거였다. 엄할 때는 엄한 도란이라 크게 개의치는 않았지만, 공부에서만큼은 도화를 풀어두는 도란이었다. 덕분에 공부 얘기를 할 때마다 의견 충돌이 있는 모자였다.
하지만, 언제나 도란에게 지고 마는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정말. 화 너는 네 오빠 없으면 공부문제로 편들어줄 사람 없어서 어쩌니.”
“오빠가 없긴 왜 없어. 지금도 이렇게 옆에 떡하니 있는데.”
“네 오빠도 곧 서른이잖아. 슬슬 결혼해야 할 나이인데, 오빠가 이소 언니한테 장가가서 독립해버리면 어쩌려고?”
엄마의 지적에 불만스럽게 밥숟가락을 내려놓는 도화였다. 그러고는 뾰로통하게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뭐 서른이면 다 결혼하나? 그리고 오빠는 아직 20대 초반처럼 보이니까 결혼은 나중에 해도 괜찮거든.”
“오, 도화 씨. 오늘따라 저에 대한 점수가 후하시네요?”
“학교까지 태워주시는 데에 대한 립서비스입니당.”
역시나 오늘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남매를 보고 고개를 젓는 어머니였다.
옷을 갈아입는 도화를 기다리고 있는 도란에게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모과차를 챙겨줬다.
도란은 인지도 있는 뮤지컬 배우였다. 목관리가 생명인 뮤지컬배우니만큼, 아들을 위해 모과차는 반드시 챙겨주는 어머니였다. 본인도 성악가인지라 목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아서였다.
모과차를 가득 담은 보온병을 건네던 어머니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도란에게 말했다.
“아들, 일요일에도 연습 있니?”
“…어, 아마 일요일은 낮 연습만 있지 싶은데. 왜요?”
“이번 일요일에 이소네 가족 오거든. 시간 되나 해서.”
“아아, 이소한테 얘기 들었어요. 이소는 그날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던데. 화가 많이 서운해하더라고요.”
도란이네 가족은 여전히 이소네 가족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두 가족이 시간만 나면 만나는 데다,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모임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부모님끼리, 자식은 자식끼리 단톡방을 만들어놓고 얘기를 나누는 게 일상이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 덕분에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실제로 서울로 출퇴근하는 도란은 이소 남매와 매일 만나다시피 하고 있고.
“덕분에 나만 혁이랑 화 사이에 끼여서 피곤하게 된 거지, 뭐.”
“그렇다고 그날 연습 끝나고 딴 데로 새면 안 된다, 아들.”
“네네, 여사님 명령 받잡겠습니다. 어, 화 나왔다. 다녀올게요.”
앞에 서 있는 어머니를 꼭 껴안은 도란은 어머니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도화 역시 설거지하고 있던 아버지를 뒤에서 살짝 껴안고는, 다녀오겠다고 인사하며 현관으로 나왔다.
오빠의 팔짱을 끼며 아양을 떠는 도화와 그런 동생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도란. 사이좋은 남매의 뒷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 작품 후기 ============================
만일 두 사람이 살아 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어 쓴 외전입니다. 분명 화목한 가족인데 짠내가 나는 건 왜죠. (...)
본편의 도란이는 한창 말썽부릴 강아지 리트리버 같은 느낌이라면, 외전에서의 도란이는 다 큰 성견 리트리버 같네요. 본편과 달리, 동생을 돌보다보니 의젓함이 강화되었나 봅니다. (따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