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12. 영화관은 영화 보는 장소입니다. =========================
영화관에 도착한 지 한참 지났지만, 영화의 ‘영’ 자도 구경하지 못하고 있다. 상영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영시간은 개뿔. 뭘 볼지조차 정하지 않은 상태다.
들어오자마자 도란이에게 어떤 영화를 볼 건지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공연을 끝마친 마술사의 자세를 하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따란! 실은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또라이가? 녀석의 대답을 듣자마자 육성으로 튀어나온 내 반응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녀석은 진짜로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그야말로 무계획 상태였다. 내 표정이 점점 썩어가자 이 또라이 자식은 억울하다며 핑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나름대로 레이디 퍼스트적인 매너와 존중합니다, 취향할게요 정신에 따라서 행동한 거라고! 크림 씨의 취향과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한….”
물론 씨알도 안 먹히는 개소리였다.
나는 녀석의 핑계를 잠자코 듣다가 사악하게 웃으며 상영 중인 포스터 하나를 가리켰다. 딱 봐도 으스스하고, 고어물 티가 팍팍 나는 공포영화였다. 그제야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저자세로 사과하는 도란이다.
“죄송합니다, 누님. 실은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왜? 제 취향을 존중해주시겠다면서요. 난 이런 거 좋아하는데?”
콧방귀를 뀌며, 성큼성큼 무인발권기로 향하자 도란이가 다급하게 내 허리를 끌어안고는 필사적으로 살려달라며 빌기 시작했다.
그렇다. 녀석은 괴기소설 작가인 주제에 공포 영화를 엄청 무서워한다. 자기 소설이 원작이었던 영화도 성준이 팔을 꼭 붙잡으며 울먹거리면서 보다가, 도중에 못 보겠다고 뛰쳐나갈 정도로 공포영화에 대한 면역력이 바닥이다.
물론, 나도 보면서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지긴 했지만.
“그러게 왜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고 있어.”
죄질이 아주 안 좋기에 이대로 공포영화를 예매해서 고통스럽게 만들까 싶었지만, 무섭다면서 밤에 잠도 자지 못하게 괴롭힐 게 뻔하니 못이기는 척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여전히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은 그대로다.
“숨 막히니까 이거 놔라.”
“싫어, 싫어, 싫어!”
“공포영화 안 볼 테니까 좀 놓으라고!”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힐끔힐끔 보내면서 천천히 힘을 푸는 도란이다. 이게 자라면서 힘만 세져서, 좀 놀리려다가 허리 졸려 죽는 줄 알았다.
***
한바탕 난리를 부리고 나서야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볼지 정하기 시작했다. 둘 다 영화에 관해서는 관심이 요만큼도 없는 영화 문외한들이라 머리를 맞대서 상의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내가 대체 영화관에 왜 온 건지 슬며시 의구심이 들 무렵, 도란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눈감고 아무거나 찍자.”
“…야.”
“어차피 우리 영화관 오면 영화보다 먹을 거에 치중하잖아.”
반박하려고 입을 열자 팩트로 내 말문을 틀어막는 녀석. 확실히 영화보다는 영화관에서 파는 음식에 관심이 많은 우리다.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기에 못 이기는 척 녀석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무인발권기 앞으로 가 예매 창을 띄운 우리는 눈을 꼭 감고서 아무거나 눌렀다.
슬며시 눈을 떠서 확인해보니 유감스럽게도 도란이 녀석이 질색하는 공포영화는 아니었다. 아래쪽을 눌러서 그런지 상영 기간이 거의 막바지인 영화였다. 덕분에 좌석이 넉넉해서 조금만 기다리면 볼 수 있었다.
서로가 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대충 붙어있는 아무 좌석이나 고르고는 스낵코너 화면으로 빠르게 전환했다. 심드렁하게 좌석을 정하던 것과는 달리 먹음직스러운 메뉴가 눈앞에 들어오자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우리였다.
“자고로 모든 음식은 단짠이 진리지, 캐러멜 팝콘에 오징어로 간다.”
“아, 난 나초 먹을래.”
“나초도 좋지, 콜.”
“…음료는 뭐하지. 이쏘, 넌 레모네이드지?”
이럴 때만 28년간 쌓인 단합력이 튀어나오는 우리다.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메뉴를 척척 고른 뒤, 빠르게 결제를 했다.
이윽고 귀중하신 식량 님으로 바꿀 수 있는 교환권이 스르르 나오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째 영화관에 온 목적이 바뀐 것 같긴 하지만, 자고로 인생이란 잘 먹고, 잘 살고, 즐거우면 장땡 아니겠어?
생글생글 웃으며 음식을 교환한 우리는 조금 수다를 떨다가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
영화관 음식은 영화가 나오기 전, 광고 타임에 먹는 게 가장 짜릿한 법이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도란이 녀석과 쓸데없는 실랑이로 힘까지 뺀 나는 영화가 시작도 하기 전에 사 온 음식들을 모조리 흡입했다. 도란이가 고른 나쵸도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묘하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왜지.
텅 빈 팝콘 통을 보면서 잠시 자괴감에 빠졌지만, 이내 집중해서 영화를 보면 된다며 위안하고는 스크린에 집중했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이름이 들렸던 영화라 그런지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로맨스 장르는 취향이 아닌데도 등장인물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나도 모르게 점점 영화에 빠져들었다.
반면, 도란이 녀석은 자기가 영화관에 오자고 한 주제에 꾸벅꾸벅 조느라 정신없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게 아무래도 밤새 글을 쓰다 나온 모양이다. 어쩐지 아까 봤을 때 피곤해 보이더라니.
그냥 자게 내버려두자고 생각하며,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영화에 집중하다 지루한 장면이 나오길래 옆쪽을 쳐다봤더니 도란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고 있다. 저렇게 자면 목 아플 텐데. 내심 신경이 쓰여 지루한 장면이 끝났는데도 녀석 쪽으로 시선이 자꾸만 갔다.
잠시 어쩔까 고민하다가 친히 어깨를 내어주기로 했다.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 상모돌리기 수준까지 가면 쪽팔리기도 하니까.
나는 녀석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게 했다.
잠버릇이 험하지 않은 녀석이라 그런지 미동도 없이 새근새근 잘도 잔다. 덕분에 어깨가 좀 뻐근하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쓰이는 구석 없이 무사히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영화 보는 것도 가끔은 괜찮은 것 같단 말이야. 물론, 집에 가면 이런 생각은 쏙 들어가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 사람들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도란이 녀석은 꿈나라에서 벗어날 생각을 않는다.
깨어나길 기다리다 지친 나는 일어나라며 녀석의 이마를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근데 어째 녀석의 이마가 닿은 손이 뜨뜻하다? 혹시나 해서 조심스레 녀석의 이마에 손을 대고 확인해보니 뜨거운 게 열이 있는 것 같다.
“야, 도란아. 일어나봐.”
“…엉. 끝났어?”
“끝난 게 문제가 아니라 너 감기 걸렸어?”
잠이 덜 깨 눈을 느리게 끔벅거리며 자신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보는 녀석. 그러고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한다.
온몸이 뜨거운데 지 몸에서 열이 나는지 알아챌 리가 있겠냐! 짐과 빈 용기들을 주섬주섬 챙긴 나는 녀석을 이끌고 상영관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 확인해보니 볼이 빨간 게 열이 있는 게 확실했다. 이 멍청이가 아프면 밖에 기어 나올 생각을 말고 집에서 드러누워야지. 괜히 속상해서 녀석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아파.”
“아프겠지! 열이 이렇게 나는데.”
“…아니, 볼 아프다고.”
녀석의 말에 얌전히 볼을 잡아당기던 손을 내려놓은 나는 걱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너는 아프면 약속을 취소해야 할 거 아냐. 아픈데 밖에는 왜 나오고 난리야!”
“…아니. 머리가 좀 아프긴 했는데, 밤새 글 쓴 것 때문에 지끈거리는 줄 알았지.”
“어이구, 하여튼 진짜. …일단 집으로 가자.”
아픈 사람 붙잡고 실랑이하는 것도 아니다 싶어 녀석을 끌고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평소 같으면 집에 가기 싫다고 생떼를 쓰는 녀석이 순순히 끌려온다. 도란이 답지 않은 태도에 많이 아픈가 싶어 걱정이 싹텄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