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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11화 (11/97)

00011 11. 누구냐 넌? =========================

직장인에게 있어 삶의 엔돌핀이자 인생의 낙인 꿀 같은 주말.

그런 귀중한 주말을 도란이 녀석에게 2주 연속으로 투자하는 건 왠지 모르게 열 받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고 싶어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옷을 고르고, 화장하고, 머리를 하고. 그야말로 데이트를 위한 풀 세팅을 끝냈다.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어차피 녀석도 반 장난일 테니 설렁설렁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소개팅이 흐지부지 넘어간 게 내 잘못 같다는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아 한 번 정도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나 싶어 오늘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준비 완료.

거울에 보이는, 장장 3시간을 넘게 준비해 완성된 내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약속장소로 나섰다.

***

집 앞에서 만나면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 근처 지하철역 광장에서 보기로 했다. 약속장소로 가니 도란이가 서서 폰을 만지고 있는 게 보인다. 약속 시각마다 매번 일찍 오는 녀석이라 놀래주려고 30분이나 일찍 왔는데, 아무래도 이 계획은 실패인 듯하다.

뭐, 오래 기다리는 것보단 낫지.

점점 다가갔더니 도란이가 오늘 뭘 입고 있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블랙 더블코트에 검은 목폴라, 거기다 목도리까지 착용하고 있다.

봄이거든요, 이 인간아…. 남들은 화사하게 다니는데, 왜 너만 보면 겨울 같은 거니.

게다가 작업하다가 나온 건지 평소에는 쓰지 않는 하얀 뿔테안경까지 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있는 것도 같고.

가까이 다가가서 이리저리 살피는데도 폰게임하느라 내가 온 걸 눈치채지 못하는 도란이. 오, 이 정도면 놀라게 하는 게 가능할 것도 같은데?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슬금슬금 도란이의 옆으로 다가가 귀에 바람을 불었다.

아니나 다를까, ‘끼양’ 하는 이상한 효과음을 내며 부르르 떠는 도란이. 예스! 놀리기 성공! 네 약점이 귀라는 건 알고 있단다.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하자 뿌듯함이 온몸에 전율하듯 퍼졌다.

반면, 도란이는 화들짝 놀라서는 ‘어맛, 이러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듯한 포즈로 나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본다. 잠시 토끼 눈을 뜨고서 이리저리 살피더니 사태파악이 끝난 건지 경계하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거 전에 샀던 원피스네.”

아, 그러고 보니 이 옷. 전에 도란이랑 백화점가서 샀던 옷이네. 은근히 스타일에 신경 쓰는 녀석이라 나보다 패션에 대해 잘 알아 종종 옷 사러 갈 때 데려가면 도움이 된다. 옷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오래 끌고 다녀도 힘들어하는 티가 안 나니까 죄책감도 적고.

그나저나 한 번도 개시하지 않은 새 옷이긴 하지만, 작년에 사고 입진 않는 거라 꽤 지난 원피스인데 기억하고 있네. 왠지 신기해서 기억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기억하지. 너 이거 살 때 비슷하게 생긴 원피스 3개로 3시간이나 고민했잖아.”

“미묘하게 달랐거든? 가격도 그렇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야.”

“응, 3시간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네. 잘 어울린다.”

괜히 찔려서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는데, 생각지도 않은 칭찬으로 받아치는 도란이다. 또 개드립이나 칠 줄 알았는데 그 뒤로 말이 없다. 얘가 웬일이래? 이번엔 내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이리저리 훑어봤다.

내 의심 어린 시선에 고개를 갸웃하는 도란이.

…아니, 내가 아니라 네가 이상한 거거든? 내가 아는 도란 어디 갔냐? 개드립치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게 재주인 내 소꿉친구 대체 어디다 숨긴 거야?

당황해서 순간 우리가 뭘 하고 있던 건지 깜빡할 정도였다. 나름 데이트라고 또라이성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건가? 잠시 의문이 생겨 고개를 갸웃했지만, 녀석이 이렇게까지 몰입을 한다면 나 역시 그것에 맞게 상대해줘야지.

“그래서 데이트 코스는 어디로 정하셨습니까, 로제 씨.”

“응? …어. 영화 마시고, 밥보고, 차 먹을까?”

아, 역시 내가 아는 도란이가 맞는구나. 의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튀어나온 개소리에 안도했다. 나는 평소처럼 녀석의 개소리에 핀잔을 주며, 왜 옷을 겨울처럼 입고 나왔냐 물어보았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녀석의 대답.

“나만 빼고 다 사랑을 하고 봄 노래를 부를 것 같은 룩이야.”

응, 내 또라이 소꿉친구 맞네. 다시 한번 확신한 나는 녀석의 계획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

도란이 녀석과 평소에도 영화관을 간 적이 있긴 했지만, 둘 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자주 가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도란이가 좋아하는 히어로 영화라든가, 남들이 재미있다며 강력히 추천하는 걸 보러 간 게 전부다.

게다가 히어로 영화는 나 말고는 성준이랑 같이 가는 게 여러모로 덕 중의 덕, 덕심을 폭발하기 최적의 조건이라 히어로물이 나올 때마다 보는 것도 아니었다. 끽해야 내가 아는 히어로가 나오는 것만 같이 보러 가주는 정도?

그래서인지, 녀석과 영화관에 가는 것도 꽤 오랜만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어째 점점 내가 벽으로 들러붙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인가, 진짜인가.

힐끔 옆을 바라보니 진짜네. 벽에 거의 밀착 수준이네. 이러다 벽에 쓸리겠다 싶어 도란이에게 따졌다.

“야! 너 뭐해! 왜 사람을 벽으로 붙이는데!”

“응? 아니, 인터넷에서 보니까 차가 안 다니는 쪽으로 여자를 다니게 하는 게 좋다길래.”

내 신경질에 태연하게 대답하는 녀석. 그 당당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나다.

…물론, 이론상으로 맞긴 한데, 네가 지금 하는 건 매너가 아니라 블로킹 수준이거든? 지금 나 전담 수비하니? 이리저리 태클을 걸기도 지쳐, 필요 없다며 바깥으로 나오는데 도란이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어쩌다 보니 도란이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녀석의 행동에 당황해서 왜 이러냐고 묻는데 아래를 가리키는 도란이. 아래를 바라보니 푹 파인 아스팔트에 물이 고여 있었다.

“기껏 신경 써서 입고 나왔는데, 젖으면 안 되잖아.”

“…어, 그러네. 땡큐.”

“나도 벽 쪽으로 적당히 붙일 테니까 너도 발밑 조심해서 보고 다녀.”

그렇게 말하고는 생긋 웃으며 바깥으로 나가 공간을 만들어주는 도란이다. 원래부터 세심한 녀석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데이트라는 상황이 붙어서 그럴까. 녀석의 다정함이 미묘하게 신경 쓰였다.

============================ 작품 후기 ============================

큭 17분 지각 ㅠㅠ 죄송합니다. 늦었지만, 재밌게 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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