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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94화 (94/111)
  • #94

    “성녀님이 보기에도 내가 부족해 보입니까.”

    토니는 영혼이 가출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멍한 눈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샐리는 말 그대로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단언했다. 이제야 겨우 귀족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현재 가장 큰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스테판 공작가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황제의 꿈도 날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토니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본인은 황제가 되기에 우유부단한 면이 많았다.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 결정이 옳은 판단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한 헨리와 본인을 비교하는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그 자괴감은 배가 됐다.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늠름한 자태의 황제 모습은 헨리 쪽이 훨씬 가까워 보였다. 어쩌면 민심도 그쪽을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제국을 위해 가장 헌신하며 살아온 인물은 다른 누구보다도 최전선에서 싸워온 헨리 크리스토퍼였으니 말이다.

    “공작의 뜻은 알겠소.”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오. 1 황자와 관련된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주시고. 내 쪽에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오.”

    “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샐리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클로에가 말했던 것처럼 확실히 사람은 좋았다. 그것은 분명히 상처만 남는 대화의 끝에서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말을 남기는 것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 사람은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됐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냉정하게 결단을 내려온 샐리는 제법 두텁게 쌓인 우정과 자신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에도 발목을 붙잡히지 않았다.

    “잠시만요.”

    이제 더는 황궁에 남아있는 볼일이 없었다. 2 황자인 토니와 그를 지지하는 성녀인 클로에에게 확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으니 말이다. 이제는 샐바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테이블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움직이려는 그때. 클로에가 갑자기 샐리를 붙잡으며 일어섰다.

    “전 할 말 더 없어요. 클로에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 일 때문에 불러 세운 거 아니에요.”

    클로에의 말에 샐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응했다.

    샐리는 여기서 클로에와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다고 판단했다. 서로의 생각을 완벽히 파악하고 난 뒤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서로 다소 과열됐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충분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간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갈라진 관계임이 확인된 뒤였다.

    그런데 더 할 말이 남아있다니. 샐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황자님.”

    “그러시오.”

    토니는 마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잘됐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공손하게 토니에게 인사를 건넨 클로에는 곧바로 샐리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클로에?”

    “따라오세요.”

    클로에의 따라오라는 말 한마디에 마치 마법과도 같은 힘이 작용하기라도 한 것인지 샐리는 그녀의 팔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뿌리칠 생각이 없었다고는 해도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감은 그녀에게 당혹스러움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어딜 가려고….”

    “따라와 보면 알아요.”

    말하는 대로 대상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은 샐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이었다. 그런데 마치 샐리는 몸의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그대로 클로에에게 끌려가 그녀가 머무르는 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윽고 도착한 클로에의 방에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긋한 꽃향기와 함께 바닥에 놓인 큼지막한 선물상자가 샐리를 반겼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뭔데요?”

    “그냥 제 성의라고 생각해주세요.”

    그 말에 샐리는 미심쩍은 얼굴로 클로에가 건네는 선물상자를 받았다. 워낙 환하게 웃는 얼굴로 건네주는 터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궁금하면 지금 바로 뜯어서 확인해 봐요.”

    그 말에 샐리는 곧바로 겉면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를 뜯어 선물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향수병 하나가 들어있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난 향도 그거예요. 그냥 이번 일로 샐리와 사이가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준비해봤어요.”

    선물이 마음에 든 것인지 조마조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샐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준비한 것을 보아하니 그날 저택에서의 언쟁 이후로 어지간히 마음이 쓰였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그 부분은 서로의 생각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는데, 아무래도 걸어가야 하는 길이 다르다 보니 그 부분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선물 준비할 필요 없었어요.”

    왠지 모르게 일방적으로 느껴지는 관계에 샐리는 다소 담백한 어투로 반응했다. 그 반응에 아니나 다를까 클로에는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급하게 물어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니까 그게….”

    “뭘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 언쟁으로 우리 사이가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제부터는 서로 다르잖아요.”

    풀죽은 강아지와도 같은 모습에 샐리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그녀의 앞에 서면 다소 약해지는 샐리였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관계에 대해 근심과 걱정이 많은 듯 보이는 클로에의 행동에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셔왔다.

    “설마 2 황자님을 황제로 밀기 위해서 저희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에요?”

    “네?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샐리한테 그럴 수 있겠어요.”

    “나도 그래요.”

    지금의 대답은 샐리에게는 양심이 약간 찔리는 부분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만약 클로에와 이렇게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샐리는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장 클로에와 제이스 두 사람이 제국의 수도로 올라와 황제와 거래를 한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2 황자와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을 까였다.

    그럼에도 그 점을 더 파고들지 않은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클로에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마지노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난 우리의 관계가 거기서 끝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다르다고 해서 꼭 적으로 남아야 하나요?”

    황제를 선정하는데 꼭 투쟁이 필요하냐는 것이 샐리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결코 건전한 법도, 최선의 방안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서로 간의 경쟁은 적법하고 합당한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면 그만이었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그런 방안 말이다.

    “그래도 조금 무서워서요.”

    “무서울 게 뭐 있어요. 내가 클로에를 잡아먹으려 하는 것도 아닌데.”

    짓궂게 올린 입꼬리는 하이에나처럼 약간은 비열하면서도 약간은 날카로운 표정을 얼굴에 깃들게 했다.

    “그럼 앞으로도 우린 계속 친구죠?”

    “그럼요. 이런 일로 투닥거리면서 서로 더 알아가는 거 아니겠어요? 원래 다들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 하잖아요.”

    “하긴 그런 말도 있긴 하네요.”

    샐리에게서 확답을 받은 클로에는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인지 편안하게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긴장감에 짓눌렸을지 진이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하아, 힘들어요.”

    “뭐가 힘들어요.”

    샐리는 힘들다며 앙탈을 부리는 클로에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보면 볼수록 다양한 매력이 넘친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언제 그렇게 냉담한 언쟁이 오갔냐는 듯 방 분위기가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샐리가 생각하는 대로 하려면 신전이 개입될 텐데 괜찮아요?”

    “아, 그 부분을 생각 못하고 있었네요.”

    성공을 위해 완벽에 가까운 설계를 지향하는 샐리이기에 자신이 놓치고 있던 부분을 알려준 클로에에게 호감도가 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신전에 대한 생각을 못하고 있었네요. 하도 잠잠하다 보니까,”

    신전은 현재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황제가 죽은 이후로 제국의 분위기가 점점 바뀌어 가고 있는 와중에 신전의 개입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황제가 살해당한 이후로 장례를 치를 때를 제외하고는 제국에 신전과 관련된 인물이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성녀와 교감을 해야 할 시기임에도 신전 쪽에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방문할 수 없다는 소식만이 도착했을 뿐이었다.

    “성녀님, 성녀님!”

    하지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이 제대로 들어맞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방으로 들어온 하녀의 뒤로 순백의 복장의 사제들이 등장했다.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그리고 그 사제들 사이로 클로에에게는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으니 바로 신전의 대신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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