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클로에는?”
“잠들었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웅장한 크기의 초상화가 있는 범상치 않은 방. 넓은 궁 안의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방으로 숨어든 이는 제이스였고,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2 황자 토니 크리스토퍼였다.
그러나 성녀의 시중을 드는 이와 제국의 황자라고 하기에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안부를 묻는 것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범상치는 않아 보였다.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 아닌가.”
“신이 나서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먹더니 일찍 잠들더라고.”
“옛날이야기를 해줬나?”
제이스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토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쿡쿡 웃으며 탁자에 놓여있는 술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독한 술을 잘도 먹네.”
“자네도 한잔하지, 그러나.”
“됐어, 난 술 안 좋아해.”
샌님처럼 생겨서 뭐 그리 독한 술을 즐기느냐는 핀잔에 가까운 투덜거림에 토니는 웃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향의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술 마시는 거 알면 궁의들이 까무러칠 것 같은데.”
“그래서 몰래 마시는 거 아니겠나. 자네만 비밀을 지켜준다면야 나한테 이 황금 같은 시간을 뺏어갈 사람은 없겠지.”
“오늘 1 황자가 클로에를 불렀어.”
제이스의 말에 토니의 얼굴이 일순간 긴장감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심약해서야 정말 싸울 수 있겠어?”
“이미 하기로 하지 않았나. 여기서 그만두면 그대가 날 가만히 놔둘 리도 없고.”
“그건 그래.”
토니는 자신의 형이자 1 황자인 오언에게 좋은 기억이 없었다. 언제나 견제의 대상으로서 경계를 받아왔기에 자신이 아끼는 시녀나 시종들이 종종 독살당한 경험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그런 토니 곁에는 이제 더 무서운 이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노리던 형제에게서 느껴지던 트라우마와도 같은 공포심마저 사라질 정도로 제이스의 존재는 그에게 든든하면서도 무서웠다.
“형님께서 클로에를 불렀다는 건 아무래도 입질이 왔다고 보는 게 맞겠지.”
“저쪽도 급할 거야.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최근에 치고 올라오는 신진 귀족 세력도 눈엣가시일 테고.”
“스테판 공작은 어떻지?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예상보다 빠르게 작위를 받았던데.”
많은 수도의 귀족들을 포함해 두 황자에게도 샐리 스테판이라는 새로운 존재는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제국 최고의 기사인 헨리 크리스토퍼와 연인 관계라는 게 어느 날 밝혀지면서부터 그녀의 행보는 확실히 심상치가 않았다.
특히 황자인 토니에게는 샐리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집중의 대상이었다.
“새로 개정된 법이 생각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 같은데.”
제이스의 말에 토니는 동의한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 스테판의 등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가 된 것처럼 움직임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그 영향이 고스란히 황궁에까지 전달되기 시작했다. 당장 곧 있을 국정 회의에 그녀의 등장이 예정되어있는 만큼 황궁 안 어딜 가나 관료들의 입에서 샐리 스테판의 이름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겠지?”
“그렇지 않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행보잖아. 움직이는 데 거침이 없을뿐더러 연일 화제를 낳고 있으니 말이야.”
스테판 공작가의 내막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가 있는 제이스는 샐리가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을 가진 채 저택 안에서 버텨왔을지 그 범주를 예상해볼 수 있었다. 생존의 기로에서 그녀는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가를 먹어 치웠다. 그 과감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예상치도 못했던 선택과 결과는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클로에나 토니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 계획을 세우고 있는 제이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클로에가 따로 한 말 없었나? 몇 번 만났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긴 생머리의 머릿결이 참으로 아름답더라. 범상치 않은 기운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더라. 친해지고 싶더라. 이런 이야기뿐이던데.”
“그 정도면 좋은 기운을 느낀 거라 볼 수 있겠군.”
공식적으로 발표된 성녀의 능력은 치유력이었다. 다만 치유력에서도 아직 사람들은 성녀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치유력뿐만 아니라 클로에에게는 타고난 능력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기운을 보는 능력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심성 같은 기운을 색깔로 표현하여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클로에는 샐리를 보자마자 그녀에게서 본 요동치는 화려한 빛에 반해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될지는 봐야 알겠지.”
클로에의 능력에 대해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함께하며 봐온 것이 있었던 제이스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과연 가지고 있는 빛을 어느 방향을 향해 발산할지는 언제나 미지수였다.
“확실히 우리에게 이득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는 하지.”
토니 역시 제이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제아무리 화려한 빛이라도 그 빛이 본인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위협에 불과했다. 그 점을 알기에 처음부터 대척점에 섰다는 것을 안 1 황자인 오언이 샐리와 헨리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안전장치라면 내가 하나 해뒀으니까.”
제이스는 한 번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가 어려운 토니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어느새 빈 술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워줬다.
그가 말하는 안전장치는 안전장치라기에는 많이 과격해 보이기는 했지만, 토니는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제이스의 말을 언제나 그렇듯 믿었다.
“요즘은 어때. 불면증은 나아졌나?”
“웬일로 클로에가 아니라 내 걱정을 다 하나.”
“황자님 걱정이라면 언제나 하지. 그러니까 내가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을 몇 번이고 처리해줬잖아.”
어느 순간부터 황자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암살자들의 존재에 2 황자는 잠조차도 제대로 청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독한 위스키와 친해지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술은 적당히 마셔 안 그래도 몸도 성치 않은데.”
“그래야지. 이것도 못 참겠어서 겨우 마시는 거야. 성녀님이 알면 난리 칠 테니까.”
“화나면 무섭지.”
흉흉한 실력을 갖춘 제이스도, 제국의 황자인 토니도 화가 난 클로에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때리면 등짝이 얼얼해지는 게 성녀의 능력 중에 신체 강화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토니는 암살자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클로에와 함께 자신을 먼저 찾아온 제이스에게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단순히 제이스 뿐만 아니라 남들 몰래 주기적으로 자신의 방에 와 성녀의 힘으로 병의 진행을 늦춰주는 클로에에게도 그 신뢰는 해당되었다.
***
“오셨습니까.”
술집이라고 하기에는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공간 안에 제이스가 도착하자마자 그의 충직한 부하인 케인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일은 제대로 처리했겠지?”
황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안경을 벗은 그의 눈에서는 상대방을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 의뢰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길드원들은 괜히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숨소리까지 죽였다.
“네, 스테판 공작가로 보낸 쿠키는 쉘튼 남작 명으로 보냈습니다.”
“잘했어. 이제 증상이 언제 나오는지 지켜보기만 하면 되겠군. 의뢰인에 대한 감시도 빠뜨리지는 않았겠지?”
“요즘 그 도박장에서 죽치고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한심하긴. 행여나 그냥 튈 기미가 보이면 그냥 죽여 버려.”
안 봐도 레너드는 대금 따위 지불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의뢰가 성공한다면 공작가가 다시 자신의 차지가 되니 곧바로 위험의 싹인 자신이 의뢰했던 길드를 처리할 것이 뻔했다.
“샐리 스테판에 대해 다른 정보는 없나.”
“네, 지난번에 확인하신 서류 이외에 다른 특이점은 없습니다.”
“그 서류들은 확실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제이스의 물음에 열심히 대답하던 케인은 누구 앞에서 감히 거짓을 고하겠냐는 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알겠어.”
용건은 끝났다는 듯 제이스는 복면과 망토만 챙기고 무심하게 뒤로 돌아 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