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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32화 (3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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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잠잠하던 2 황자의 움직임은 신진 귀족들에게는 그야말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자신들과 한뜻을 펼칠 든든한 구심점을 찾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인데, 거기에 성녀까지 더해진다면 그 세력이 얼마나 힘을 얻을지 오언 입장에서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1 황자님처럼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자씩이나 되는 이가 클로에가 한 말의 뜻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그저 성녀로서 순수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해 보이는 이미지에서 나온 묵직한 말 한마디에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황자님께서 목적 없이 성녀인 저한테 잘해줄 리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황자님도 해당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말한 건 토니 그 녀석입니다. 성녀께서 함부로 믿을만한 인물이 아니니 주의를 드리는 것일 뿐이지요.”

    “그럼 연락도 없으시다가 갑자기 저에게 초대장을 보내신 이유가 뭔가요?”

    “그러니까 그건….”

    뚫어져라 쳐다보는 클로에의 검은 눈동자에는 마치 주술이라도 거는 것처럼 1 황자의 말문을 계속해서 가로막았다. 평소 거짓말도 청산유수처럼 해대는 오언은 유독 오늘따라 엉킨 태엽처럼 뒤죽박죽 섞여 굴러가지 않는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제가 그동안 소홀했던 점을 만회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여기 피라피라 섬에서 들여온 말린 과일입니다. 한 번 드셔보세요.”

    답지 않게 착한 척을 하려니 그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애써 고운 밀가루와도 같은 목소리를 내려 해도 가래가 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화사한 미소를 나타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입꼬리도 이제는 한계라는 듯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떠십니까.”

    “이런 건 처음 먹어봐요. 정말 맛있네요.”

    “마음에 드신다면 시종을 시켜 머무시는 궁에 보내드리지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주셔도 돼요.”

    클로에는 교류의 폭을 자연스럽게 넓혀보려 하는 오언의 시도를 티 없이 맑은 미소로 단칼에 거절했다. 무뚝뚝하게 거절하면 기분이라도 덜 나쁜데, 어쩐지 자신을 향해있는 미소에 기만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오언은 이를 악물며 클로에를 노려봤다.

    황자로서 그가 살아온 삶에 인내라는 단어가 쓰일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음에 안 들면 처단하고 필요한 것은 무슨 수를 써서든 얻어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눈앞에 성녀라는 존재는 함부로 하기도 껄끄러운 존재이거니와 대화나 관계가 발전할 기미가 보이면 교묘하게 곧바로 잘라 내버렸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오언은 하마터면 귀찮다며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지금 상황에서 아쉬운 쪽은 이쪽이었다. 행여나 성녀가 정말 2 황자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공든 탑에 균열이 생길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그렇게 유난을 떨어대며 성질을 조금이라도 죽여야 한다는 조언을 몇 번이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시종을 떠올렸다. 오언은 몇 번은 더 들어온 질문에 일관되게 괜찮다는 말로 대응하며 위기를 모면했다.

    ‘쳇, 그 시종 놈도 쓸모가 있을 때가 있군.’

    자신의 짜증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새겨 넣었던 조언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아무튼 동생 말고도 저하고도 친하게 지내달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이렇게 초대장을 드린 겁니다.”

    “원하시는 게 있는 건 아니구요?”

    “물론이죠. 정말 순수하게 성녀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억지였다. 그러나 친하게 지내자는 두루뭉술한 말 이외에 뭔가 신호를 주는 것은 없으니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네, 황자님. 저희 오늘부터 친하게 지내요.”

    순수한 백치미. 세상 물정 모르는 성녀.

    황궁에서 살아가는 데 이만큼 유용한 캐릭터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의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많이 호전되셨어요.”

    “참으로 신기하군요. 거의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낸 성녀의 신력으로도 완치가 되지 않는 병이라니.”

    “그러게요.”

    클로에는 자신의 신력으로도 황제의 병을 완치시키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려 고되고 풀죽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성녀께서도 짚이시는 부분이 없으십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클로에는 자연스러운 거짓말을 통해 여기저기 찔러보는 황자의 질문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질문의 내용들이 그저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라는 순수한 의도로 보기에는 그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것들이었다.

    ***

    “젠장, 까다롭게 굴기는.”

    “성과가 없으셨나요.”

    “그래, 네 말대로 황자인 내가 그리 친절하게 구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더군.”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오언은 클로에가 떠나고 자신을 모시는 시종이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짜증스러운 불만들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아마 2 황자께서도 마찬가지셨을 겁니다.”

    “앞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도록 해. 혹시 만나기라도 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

    “네, 황자님. 그리고 폐하께서 오랜만에 황자님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걸 뭘 물어보고 있어. 당연히 가야지. 젠장, 그 자식 얼굴 보면 먹던 것도 올라올 것 같은데.”

    “소화제라도 준비시킬까요.”

    “그래,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그 녀석을 보면 속이 뒤집힐 수도 있어.”

    과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든 비위 한 번 맞춰보겠다고 장단에 맞춰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언은 황제에게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

    “어땠어.”

    “생각했던 것보다 별 이야기 안 하던데?”

    “흠, 그래?”

    제이스는 불편한 자리에 갔다 온 것 치고는 편안하게 침대를 뒹굴고 있는 클로에를 보며 테이블에 놓여 있는 샐러드를 약간 집어 먹었다.

    “밥은 안 먹어?”

    “거기서 뭘 좀 먹었더니 배가 안 고파.”

    “뭘 먹었는데.”

    “말린 과일. 우리 예전에 가보기로 했던 피라피라 섬에서 들여온 거라던데.”

    “그래도 밥은 먹어. 안 그래도 요즘 살 빠진 것 같은데.”

    “칫. 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엄마라도 된 것처럼 잔소리를 늘어놓는 제이스를 보며 클로에는 볼을 부풀리며 침대에서 일어나기보다 오히려 이불에 몸을 말며 시위를 펼쳤다.

    “지금은 어떠려나.”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잖아. 여전히 아름답겠지.”

    “그래도 예전이랑 달라지지 않았을까?”

    “달라졌겠지.”

    “어땠어? 정말 그렇게 아름다웠어?”

    예전부터 클로에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호기심을 채워주는 대부분이 바로 정착하기 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던 제이스의 이야기였다.

    “밥 먹으면 알려줄게.”

    그리고 제이스는 눈빛을 빛내고 있는 클로에를 보며 먹잇감을 포착했다는 듯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샐러드 싫은데.”

    “다이어트 한다며. 그래서 내가 특별히 주방에 주문해둔 거야.”

    “그래도 고기 몇 점 정도는 올려줘도 되잖아.”

    밖에서 보이는 성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투닥거리면서 어리광도 부리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아마 놀라서 까무러칠 정도의 반전이었다.

    “편식하는 성녀님이라. 사람들이 아주 놀라겠어.”

    쉴 새 없이 깐족거리는 입이 참으로 밉상이었지만, 덕분에 클로에는 이곳 황궁에서 예전의 향수를 느낄 수가 있었다. 거의 감금되어있다시피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니 그녀로서는 더욱 갈증이 느껴질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작위식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이 젖어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을 상기시키듯이 제이스는 대화의 주제를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 쪽으로 전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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