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가씨 얼른 일어나세요.”
저택에 돌아온 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샐리의 예상대로 저택의 재정관리는 말 그대로 개판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정체 모를 출처로 돈이 줄줄 새고 있는데, 집사를 포함한 기존 저택의 사용인들 모두가 이 출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누가 봐도 수상쩍어 보이는 출처였기에 샐리는 자신의 정보원들인 레귤러즈에게 의뢰를 넣기로 했다.
당장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작부인과 레너드의 뒤를 쫓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공작부인은 영지에서 생활 중이었으나 레너드는 수도로 올라와 도박장과 어둠 길드의 본거지 등을 분주하게 다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오늘 하루만 늦잠 좀 잘게.”
도박장이야 그렇다 쳐도 어둠 길드에 대한 동선은 그냥 간과하기 힘들었다. 공작부인과 레너드의 성격상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 영지 생활을 즐길 위인들이 아니었기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의 샐리는 그 두 사람에게만 온전히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오늘이 작위 수여식인데 늦잠 자시게요?”
그 말에 졸음에 짓눌려 올라가지 않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지금까지 한 것은 공작가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일 뿐. 자금을 운용하거나 저택을 손보는 일 따위 할 수 없었다. 진즉에 뽑아놓은 사용인들도 작위가 없으면 기존의 사용인들을 해고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샐리에게는 오늘처럼 중요한 날이 없었는데, 어제도 새벽 늦게까지 여러 가지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작위 수여식이라는 중요한 행사를 까먹은 것이었다.
“작위 수여식은 가야지.”
“그렇죠? 여기 영지에서 선물로 들어온 쿠키와 차가 있으니 간단하게 식사하시고, 바로 준비하셔야 해요.”
“작위 수여식은 이따 오후 아니야?”
“에스코트하실 헨리 경께서 곧 오신다고 했어요. 그전까지 엉겨 붙은 머리도 그렇고 눈 밑에 다크서클도 화장으로 덮어놔야죠.”
공식적으로 임명되지는 않았으나 메리는 저택의 하녀장과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가씨의 곁을 보필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지자 저택에 온 첫날부터 메리는 과해 보일 정도로 의욕이 넘쳤었다.
그런데 지금 샐리는 그 과해 보이는 의욕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재밌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있던 파티에서도 그랬지만, 샐리를 꾸며주는 데 있어서 메리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눈에 쌍심지를 켰다. 특별히 제작 주문한 제복을 살핀 뒤 식사를 마친 샐리를 끌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는 무리해도 괜찮아요.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언제 무리하겠어요.”
샐리와 마찬가지로 메리 역시 쉴 틈 없이 일을 배우고 공부를 하는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는 지칠 법도 한데 메리는 지쳐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열정이 넘치며 쌩쌩한 기세를 보였다.
“준비는 다 됐소?”
“다 되기는 했는데, 이런 제복은 처음 입는 거라 좀 어색하네요.”
샐리가 평소 하얀색을 좋아했기에 제복의 전체적인 색 또한 세련되면서도 깔끔한 하얀색으로 디자인이 되었다. 어깨, 팔꿈치, 무릎 등 관절 부분에 각이 예리하게 잡혀있어 제복을 입은 상태에서 팔다리를 움직이기는 힘들었으나 확실히 멋은 있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 입는 제복답게 단추 등의 모든 부자재들이 투명한 보석으로 세공되어 만들어졌다.
“어울리나요?”
샐리의 물음에 헨리는 목이 떨어져 나가라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라도 긴장되면 말하시오.”
“뭘 하려고요.”
“다른 건 없고 들어갈 때 손이라도 잡아줄 수는 있지 않겠소.”
결혼식장에 신랑을 맞이하러 가는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경건하게 임해야 할 작위 수여식에 정말로 손을 잡고 하하호호 들어갔다가는 파렴치하다는 시선으로 뭇매를 맞을 것이 뻔했다.
그런 예의범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헨리가 던진 약간은 썰렁한 농담에 신기하게도 샐리는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던 팔다리가 이내 자연스럽게 동작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황궁에 도착하여 자신을 향해있는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늠름한 모습으로 황제의 앞에 설 수 있었다.
***
작위 수여식이라고 해봤자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그저 자신을 구경하러 온 두 명의 황자와 다른 귀족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성녀의 세례를 받고 황제가 증정하는 훈장을 가슴에 다는 것이 끝이었다.
“축하해요.”
클로에는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몰라 부담스러워하는 샐리를 바라보며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준비된 기도문을 읽으며 샐리의 앞날을 축복했다.
“여신의 이름 아래 우리 제국은 영원할 것이고 제국의 종자이자 황제의 신하 샐리 스테판 공작은 앞으로 있을 자신의 과업을 끝마칠 때까지 제국의 귀족이란 이름으로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그대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기도문의 낭독이 끝나자 클로에는 어디서 난 것인지 어린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유치찬란한 장식으로 된 지팡이로 샐리의 머리를 살짝 쳤다.
“이상한 낌새는 없었나?”
머리를 치자 지팡이 끝에 달린 장신구들의 찰랑이는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진행된 식의 순서를 경건하게 기다리는 샐리를 바라보며 1 황자 오언은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라면 수여식이 진행되는 동안 장내는 엄숙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황자에게는 그 규칙도 가볍게 무시할 수준인 듯 보였다.
“네, 그저 황궁에 머물며 기사단과 훈련만 함께 할 뿐 다른 행동은 없었습니다.”
“저택 방문 횟수는.”
“오늘 에스코트를 위해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그래? 서로 없으면 죽는다고 하지 않았나?”
애초에 두 사람의 사이에 의구심을 가지며 냄새를 맡고 있는 오언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건너편에서 샐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헨리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서로 일이 바빠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래도 그렇지, 한 번도 안 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그렇지만….”
“2 황자 쪽은 어때.”
비서가 자신의 사견을 덧붙이려는 것을 가볍게 잘라낸 뒤 자연스럽게 자신의 또 다른 경계 대상인 2 황자 쪽으로 주제를 바꿨다.
“최근 신진 귀족들과의 만남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언의 입에서 뿌득하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황제가 버젓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차기 황위 자리야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리던 자리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만큼 절대자의 자리에 오르는 꿈에 더욱 열망하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그런 얼간이들하고도 어울리나 보군.”
오언이 지칭한 그 얼간이들이라고 하면 현재 제국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부푼 꿈을 안고 정치에 임하고 있는 젊은 신진 귀족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샐리가 톡톡히 덕택을 본 여성도 후계자의 요건을 충족하면 작위를 이을 수 있는 법을 지지한 것도 그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약하더니 그런 멍청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랑 어울리지.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나?”
“성녀께서 몇 번 방문하신 거 이외에 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성녀가 방문해? 뭐 때문에.”
“그건 저도 잘….”
황제에 이어 2 황자까지 성녀를 대동하는 것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가 있다는 의미였다. 다른 무엇보다 아버지인 황제야 성녀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가까이했으니 그렇다 쳐도 동생인 2 황자는 분명히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것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유행이라도 타보겠다는 건가?”
“공식적인 만남은 현재까지 2번 정도이고, 모두 정원에서 간단한 다과회를 가지시며 다른 귀족들을 소개해주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오언은 2 황자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아니꼬웠다. 그런 오언의 입장에서 합당하지 않은 명분을 가지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더라도 신전에서 압박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인 성녀가 그와 가까워지는 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만큼 정치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과의 접촉은 당연히 경쟁자인 1 황자 오언에게 결코 달가울 리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늦기 전에 우리도 성녀와 접촉하도록 해.”
오언이 이렇게 급박하게 움직이려는 이유는 단 하나.
현 황제의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는 다른 눈을 피해 몰래 성녀를 대동하여 그녀가 가진 치유력으로 병세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