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거라면 가능할 것 같소.”
“언제부터 복용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꽤 오래전부터 먹었으니까.”
약에 대해 짐작이 가는 것은 없는지 몇 가지 질문을 끝으로 헨리는 약 몇 알을 꺼내 따로 밀봉하여 자신의 서랍에 보관했다.
“아, 저택에는 내일 당장 들어갈 계획이에요. 올 때 가지고 온 것도 없어서 내일 메리랑 같이 몸만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저택의 사용인들을 새로 채워 넣어야 하지 않겠소.”
“네, 그 문제 때문에 당신이랑 이제부터 상의해야죠.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부탁해요.”
“알겠소.”
헨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의지하기 시작한 샐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는 계약 관계에 초점을 뒀다면 이제는 딱히 연기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대하기 시작했다.
“사용인들만 새롭게 채워 넣으면 되는 건가?”
“사실 그거보다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그 말에 헨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자기 부하를 부르려다 말고 샐리를 바라보았다.
“저택에 비밀 공간이 하나 있는데 열쇠도 없고 만져보니까 일반적인 철문이랑은 느낌이 달랐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 말해보겠소.”
“음, 철에서 신비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하여튼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데, 뭔가 그 근처에서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렇군.”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샐리가 먹고 있던 약의 성분이 그녀의 힘을 억누르기 위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공작부인에게 맞아서 생긴 상처가 금방 치유되지 않던 것을 보면 약의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점점 발현되는 힘을 늦추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마법과 친하지는 않더라도 전투에 관련된 것이라면 박식한 헨리였기에 특수한 힘이 발현되는 것에 대해 박식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저택에 비밀 공간에 관련해서는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고, 이제부터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는 게 좋겠소.”
“안 돼요. 공작가와 관련해서 파악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저택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건드리지 마시오. 작위 수여식부터 결혼식까지 앞으로 남은 중요한 행사들이 꽤 많은데, 신부의 몸이 상하는 건 신랑인 나로서는 그냥 묵인하기 힘든 문제라서.”
“알았어요.”
어차피 다른 할 일도 없었다. 샐리는 헨리가 자상하게 직접 신부라 지칭하며 걱정하는 모습에 괜히 쑥스러워졌다.
“메리에게도 일러둬야겠군.”
“메리랑 그새 친해졌어요?”
“내 신부의 측근이니 친해지는 것이 좋지 않겠소.”
처음 보는 능글맞은 미소가 가까워지자 샐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가 중요한 일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자 마음이 풀어져서일까. 샐리는 양손을 볼에 갖다 대며 황급히 얼굴을 식혔다.
속으로 헨리가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서히 자각되기 시작한 감정의 변화에 몇 번은 더 심호흡하고 나서 거울을 확인하자 원래의 얼굴색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정말 사람도 죽이나?”
로브를 뒤집어쓴 두 남자의 대화는 아주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평범한 술집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가게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니 어두컴컴하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예사로운 곳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그러니 찾아온 거 아니겠어. 다른 길드는 다 가봤는데 거절당했다고.”
“우선 신원 확인부터 하고 싶은데.”
남자의 말에 의뢰하러 온 이는 로브를 벗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화려한 금발과 푸른 자수정의 눈동자의 남자는 바로 레너드였다.
“다른 길드에서 거절당할 정도면 꽤 거물이라는 이야기인데.”
“샐리 스테판. 이제 곧 스테판 공작이 되실 몸이지.”
잔뜩 비꼬는 말투에서 그가 느끼고 있는 악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제국의 공작이라면 다른 길드가 그의 의뢰를 거절한 것도 이해가 됐다. 애초에 청부 살인을 받아들이는 길드라도 고위 귀족은 대상에서 거의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칫하면 꼬리가 잡힐 수 있고, 동반되는 위험 부담도 큰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레너드의 의뢰를 듣는 남자는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로브 속으로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방식은 어떤 걸 원하지.”
“독을 이용했으면 좋겠는데, 왜 복용하다 보면 그 독이 몸에 쌓여서 갑자기 터지는 그런 거 있잖아.”
“도련님 주제에 그런 것도 아나?”
레너드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의 건방진 태도에 울컥했으나 지금 아쉬운 처지는 이쪽이었다. 한 번 성질을 못 이겨 모든 것을 잃은 경험이 오히려 조금은 그가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야 예전에도 쓴 적이 있으니까. 당신도 알 텐데.”
“그래서 찾아온 거였군.”
“의뢰를 받아들일 건가?”
“알면서 뭘 묻고 있어. 당연히 받아들이지. 물론 당신이 그 의뢰에 걸맞은 비용을 낼 준비가 되어있다면 말이야.”
그 말에 레너드는 순간 움찔했다. 지금의 처지에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냐는 것을 꼬집는 말투였다. 실제로 레너드는 그만큼의 자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주면 되지?”
“의뢰를 마치고 나면 다시 돈을 들고 이곳으로 오면 돼.”
“의뢰한 일을 마치고 내게 시간을 좀 줄 수 있나? 내 동생이 죽으면 공작가는 다시 내 것이 될 거고, 그렇다면 의뢰에 대한 돈도 지급할 수 있을 거야.”
“그러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레너드에게 종이와 펜을 건넸다. 그가 건넨 종이에는 인적 사항과 의뢰내용을 적어 넣는 빈칸이 존재했다.
“의뢰는 성립됐으니 이만 가 봐도 좋아.”
“독은 언제쯤 얻을 수 있지?”
“이틀 내로 여기 적힌 곳에 선물을 보내지.”
레너드가 적은 장소는 그가 머무는 영지 내에 허름한 마구간이었다. 길드가 보낸 독을 이용해 샐리를 독살할 계획을 세운 레너드는 황급히 꺼림칙한 기운이 감도는 방을 빠져나와 도박장으로 향했다.
“샐리 스테판이라.”
레너드가 나가자 남자는 뒤집어쓴 로브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드러나는 짙은 흑발과 예리한 눈빛. 레너드가 놓고 간 의뢰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샐리의 이름이 적힌 칸이 들어왔다.
“어떻게 할까.”
남자의 이름은 제이스.
제국의 성녀를 바로 옆에서 모시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대외적인 신분에 불과했을 뿐. 수도에 정착하자마자 뿌리 깊은 어둠에 발을 담그며 현 길드의 기존 간부들을 모두 쓸어버렸다.
현재 그가 자리를 잡은 길드는 그가 이곳을 차지하기 전부터 수도 내에서 유일하게 귀족 암살까지도 의뢰받는 길드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의뢰받은 암살 대상인 샐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클로에는 분명 그 공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성녀의 힘이 발현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사람의 내면에 잠재된 기운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클로에는 샐리에게서 본 요동치는 파도와도 같은 기운과 함께 아주 미세하지만 특이해 보이는 점에 대해 신나서 떠들었다.
그런 클로에를 제이스는 언제나 그렇듯 귀엽게 보면서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경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클로에가 본 요동치는 기운은 반드시 제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인물이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과연 본인에게 이득으로 돌아올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 크게 될 인물이라면 어떻게든 극복해내겠지.”
어쨌든 의뢰를 받았으니 이제 와서 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호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그래서 제이스는 레너드의 의뢰를 통해 그녀의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결정했다.
“한 번 살아남아 보라고, 아가씨.”
제이스는 부하들의 인사를 받으며 술집을 나서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이튿날 앞으로 제국을 혼란과 공포에 빠트릴 연쇄 살인 사건의 시초가 되는 첫 번째 살인이 발생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