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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22화 (22/111)
  • #22

    “네가 태어나기 전 그 파렴치한 년의 배를 차버렸어야 했어! 내 나름대로 불쌍하게 여겨 봐줬는데 어디까지 기어오르는 거야?”

    공작부인의 난동은 이제는 눈살을 찌푸리다 못해 귀싸대기가 절로 마려운 정도까지 오게 되었다.

    “원래였다면 평생 꿈도 못 꿀 저택에서 지내게 해주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은 안 돼. 우리가 아니었다면 네 어미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걸? 사창가에서 몸이나 팔면 모를까.”

    그냥 참고 넘기기에는 모욕의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지금까지 평온한 얼굴로 공작부인을 내려다보던 샐리에게서 감정적인 동요를 느낀 주안은 그녀를 데리고 방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은 끝났으니 굳이 여기 서서 저 모욕적인 언사를 더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은혜? 지금 은혜라고 했어?”

    샐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멱살을 잡아봤다.

    “나한테 이곳은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지옥이었어. 그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고.”

    샐리는 공작이 종종 싫은 기색이 역력한 자신의 엄마를 반강제로 서재로 데리고 갈 때 그 성욕에 찌든 더러운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욕을 해야 할 대상이 잘못됐잖아. 우리가 정말 원해서 이 저택에 있었던 거라 생각해? 알잖아, 누가 우리를 이 저택에 묶어뒀는지.”

    너무 흥분해서인지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샐리는 그런 사소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눈앞에 진짜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남 탓만 연신 해대는 공작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샐리는 파티에서 레너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감정적인 행동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맞이한 말로를 생각해내니 샐리는 무언가로 꽉 막힌 가슴에서 혈액이 순환되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진정할 수 있었다.

    “당신 남편이잖아.”

    방금과 비교했을 때 많이 차분해진 목소리지만, 쌓였던 설움은 그리 금방 가시지 않아 목이 메어왔다.

    “정신 차리고 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보세요, 공작부인. 당신 남편은 나와 엄마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게 아니라 불행 그 자체였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공작부인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해지던 목에 핏대가 조금은 얌전해진 것을 보아하니 분노를 많이 삭였다고 볼 수 있었다.

    “오늘 이후로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오늘 이후로 당신과 당신 아들에게 그 어떤 자비도 베풀 생각이 없으니까.”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처사였다. 샐리가 조금이라도 악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공작부인은 주안에 의해 저택 밖으로 처참하게 끌려 나갔을 테니까.

    ***

    “괜찮으십니까.”

    더 이상 공녀를 의심하는 것은 바보 같다는 것을 깨달은 주안은 넌지시 샐리의 상태를 살폈다.

    “이 앞을 지켜주시겠어요?”

    주안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조용히 걷기만 하던 샐리는 서재에 도착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 안에 뭐가 있는 겁니까.”

    “아마도요.”

    공작이 항상 자신의 엄마를 데리고 가는 곳이 침실이 아닌 서재라는 것을 알았다. 샐리는 분명히 저택에 쓸 수 있는 방이라면 다른 곳도 있을 텐데 굳이 서재로 가는 이유가 뭘까 항상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오로지 서재에 직접 가봐야지만 알 수 있을 것이란 것도 말이다. 단순히 자신의 엄마와 관련된 비밀과 더불어 들켜서 안 되는 여러 가지 서류들도 서재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샐리는 공작가의 저택에 존재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찾기 위해 서재의 방문을 힘껏 열었다.

    ***

    한참 서재 이곳저곳을 활보하던 샐리는 책장에 꽂혀있는 요상한 책 두 권을 발견하였다. 하나는 어떻게 봐도 수상해 보이는 책등에 열쇠 구멍이 달린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열쇠 구멍이 달린 책과 마찬가지로 책등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책이었다. 혹시나 해서 책장을 더 뒤져봤지만 이런 특이한 책은 딱 두 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안에 모든 비밀이 있는 건가.”

    열쇠 구멍이 달린 책은 아무리 당겨 봐도 책장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에 샐리는 본능적으로 이 책장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것이 아닌 이 뒤로 무언가 숨기기 위한 일종의 입구라는 것을 알았다.

    더군다나 다른 책 한 권은 책장에서 꺼낼 수 있었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나무판자와도 같은 감촉은 이것이 단순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줬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책을 연 순간 거기에서 샐리는 열쇠 구멍에 딱 맞을 것 같은 열쇠를 하나 발견하였고, 발견한 열쇠를 꺼내 곧바로 열쇠 구멍에 꼈다.

    드르르르륵.

    놀랍게도 제법 요란한 소라와 함께 책장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면서 건너편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또각또각.

    걷기 위해 구두 힐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소리가 크게 났다. 그 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공포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는 했지만, 샐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마치 통로 끝에 남아있을 공작가의 비밀의 잔해를 보고 있는 것처럼 또렷했다.

    그렇게 걷던 샐리는 이내 통로의 끝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이건 뭐지?’

    철문 자체도 단단해 보이지만, 그 문에서 흐르고 있는 기묘한 기운에 샐리는 손을 뻗어 차가운 쇠의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손이 닿자마자 그녀는 이 철에 알 수 없는 특수한 힘이 가미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샐리 스스로도 어떻게 손에 닿은 것만으로 특수한 힘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타고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가 없었으니까.

    물론 한 가지 위화감이 드는 점은 그녀의 엄마가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먹이던 알약이 하나 있었다. 그 알약이 어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인지 목적도 성분도 알 수 없었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먹어왔던 것이라 샐리는 지금도 주기적으로 그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샐리의 말을 듣자 헨리는 원한다면 그 약이 어떤 약인지 조사해주겠다고 했지만, 샐리는 거절했다.

    “후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뒤 샐리는 책장을 열었던 열쇠를 꺼내 들었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잡념들은 떨쳐낸 채 공작이 숨기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책장을 열었던 열쇠는 철문에 달린 열쇠 구멍에 들어가지조차 않았다. 즉, 이 철문을 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열쇠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서재를 몇 번이나 뒤져봤지만 샐리가 발견한 것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열쇠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지금 당장은 이 철문 너머에 있는 비밀을 알아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허망하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찾으셨습니까.”

    “마지막 문 하나를 못 열었어요.”

    꽤 오랜 시간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관심을 가질 만했다. 들어가기 전에 언질을 준 것처럼 이 서재에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주안은 아닌 척해도 과연 그 비밀이란 것이 무엇일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제가 한 번 가볼까요.”

    “열쇠가 없으면 못 열어요.”

    그녀의 말에 주안은 샐리가 손에 들고 있는 열쇠를 쳐다봤다.

    “이 열쇠는 다른 데 이미 쓰였어요.”

    “그렇다면 마지막 문을 여는 데 필요한 열쇠의 행방에 대해 짚이는 곳이 있으십니까.”

    “음, 지금은 없어요.”

    “그렇군요.”

    아쉬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주안 이상으로 샐리에게 남은 아쉬움의 여운이 훨씬 더 컸다. 분명히 숨겨져 있을 더러운 비밀을 한시라도 빨리 풀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문을 여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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