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19화 (19/111)
  • #19

    “이제 괜찮소.”

    모든 것이 샐리가 말했던 대로 풀렸다. 모여드는 인파에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레너드는 머릿속이 도화지처럼 하얘진 지 오래라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못했다.

    더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헨리는 레너드의 팔목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치고 샐리를 품에 안았다.

    “미안해요. 이대로 조금만 있을게요.”

    처음이었다.

    샐리는 자신을 품에 안은 이 남자가 너무도 든든했다. 공포심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자신보다 곱절은 힘이 센 남자가 행사하는 폭력을 감당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 이상의 통증이 동반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부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등장하여 더는 자신에게 가해질 위협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안심이 된 샐리는 자신의 양팔로 헨리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퉁퉁 부은 얼굴을 숨겼다.

    “뭐가 미안하다는 것이오.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러고 있어도 되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오히려 그대에게 고마울 정도이니.”

    샐리가 괜찮다고 말해도 헨리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은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고,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작고 여린 그녀의 체구에 속에서는 점점 뜨거운 분노가 쌓이고 있었다.

    “뒤는 부탁할게요.”

    샐리의 목소리에서 작지만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아주 작은 떨림.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흐느낌은 그의 턱시도가 눈물로 젖기 시작했음을 알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공자.”

    지금 이 파티는 단순한 파티가 아니었다. 황궁에서 열린 파티로 황제가 직접 주관하여 참석까지 한 파티였다. 그런데 레너드는 그런 자리에서 자신의 여동생인 샐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다 딱 걸린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두 사람의 관계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공작가의 금지옥엽의 딸이 받을만한 대접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은 얼굴을 숨기고 있지만, 분명히 피로 얼룩진 샐리의 얼굴을 본 귀족들이 있었고, 그들은 벌써부터 스테판 공작가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며 서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남매 사이의 가벼운 다툼입니다.”

    “가벼운 다툼?”

    어느새 황제의 옆에 등장한 공작부인이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이미 전파된 싸늘한 분위기를 황제가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공작부인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아들을 감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방금의 일로 레너드는 완벽히 황제의 눈 밖에 나버린 후였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저런 인간이 공작가를 차지하게 된다면 황제 본인이 다루기에도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까지 더러웠으니 괜히 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할 바에는 샐리가 공작가를 이을 후계자로 더 적합해 보였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평소 감정을 절제하기로 소문난 헨리였다. 항상 무뚝뚝함과 평정심의 상징으로 언제 어디서나 감정을 쉬이 드러내 보이는 일이 없는 그가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네.”

    황제가 신호를 주자 파티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레너드를 끌고 파티장을 나갔다.

    “작위 수여식이 끝난 뒤에 풀어주도록 하지.”

    황제의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공작부인은 아직 무언가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끝나버린 싸움에 허망하게 서 있다가 헨리의 품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샐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각대로 이 시나리오는 모두 샐리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동안 저택 내부에서 지켜봐 온 공작가의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그려낸 그야말로 완벽한 설계였다.

    너무 쉽게 모든 것이 흘러가서 허무할 정도인 와중에 이를 바득 갈고 있는 공작부인은 아무리 봐도 쉽게 물러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스테판 공작가의 장남을 지금 황궁에 가둬두겠다는 건가요?”

    “내 앞에서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한 것치고는 꽤 너그러운 처사라고 생각하는데.”

    제아무리 고위 귀족이라도 황제가 참석한 파티를 이렇게 망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황제가 대놓고 작위 수여식을 언급하니 그 뒤의 그림은 안 봐도 뻔했다.

    “작위 수여식이 끝난 뒤라니요. 그럼 제 아들은 어쩌구요.”

    “그대의 딸이 있지 않나. 헨리 경과 같은 사람이 반할 정도면 그만큼 인물이 좋다는 거겠지.”

    “곱게 자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공작부인의 말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곱게 자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영애가 황제에게 따로 찾아와 작위를 잇겠다고 선언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 안에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의 파국을 맞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건 이제부터 보면 될 일 아닌가.”

    당연히 황제의 입장에서도 샐리는 증명된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좋았다. 증명된 것이 없으면서 통제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인물이니 잘만하면 스테판 공작가가 그동안 축적해온 재산 역시도 먹어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덤으로 점점 명성이 높아지면서 괜스레 견제되는 인물인 헨리 크리스토퍼까지도 엮어서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에게 대행 권한을 주시지요. 저 아이가 완벽히 공작가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할 때까지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는 공작부인을 헨리가 막아 세웠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가문을 이끌어가는 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만큼의 교육이 필요한 건데. 경께서는 하도 싸움만 하셔서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내 말은 당신에게는 공녀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것이오.”

    일부러 긁어대는 공작부인 특유의 말투에도 헨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급한 것은 저쪽이었고, 이렇게 나올 것이란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애초에 오늘의 파티는 황제의 정부 따위를 축하하기 위해서 참석한 자리가 아니었다.

    오늘은 헨리 자신이 바라던 자신과 부하들의 안위가 보장되고 그것을 도와줄 샐리가 스테판 공작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란 것을 증명할 자리였다.

    그들의 말대로 샐리가 완벽하게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벽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면 상대의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 될 뿐. 그것은 흠집이 많은 저들에게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공녀가 진짜 딸도 아니지 않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헨리의 한 마디에 장내의 공기가 급속도로 바뀌었다. 처음에 흥미진진하게 이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이 이제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똑같이 얼어붙은 공작부인과 그의 아들 레너드를 번갈아 보며 반응을 살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가에서 시작된 경련이 공작부인이 받은 충격을 대변했다. 그런 사실을 밝혀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공작부인은 이런 식으로 대담하게 출생을 밝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히려 이 싸움에서 밀렸을 때 샐리의 출생을 악의적으로 이용하여 그녀를 깎아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헨리와 샐리가 선수를 먼저 쳐버렸다.

    “괜찮겠소?”

    샐리의 주문에 일단 내지르기는 했지만, 헨리 역시도 이런 상황 전개가 정말 괜찮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곱지 않은 시선들 때문에 역풍이 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샐리는 오히려 확신에 차 어느새 헨리의 품에서 빠져나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섰다.

    황제도 성녀도 그리고 오늘 자리의 주인공이지만 모든 화제와 관심을 빼앗겨버린 황제의 정부도 각양각색의 표정과 시선으로 집중했다. 몰리의 경우 처음에는 주인공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해 불만이 있어 보였으나 이내 흥미가 생겼는지 간식거리를 챙겨와 오물거리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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