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81)화 (281/449)

제281화

한편,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구염락은 더욱 심란해졌다. 장서열을 사랑해 마지않은 서풍엽은 그녀를 위해 코앞에 간식 가게를 놔두고 굳이 이곳에서 먹지도 않을 음식까지 주문하는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하자 구염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건 항상 장서열을 제한하려 드는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구염락이 심기가 불편한 듯 말했다.

“먹고 와. 밖에서 기다릴게.”

말을 마친 구염락은 시위를 남겨둔 채 장서열의 얼굴을 보지 않고 큰 걸음으로 떠났다.

장서열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떡이 목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내쉰 그녀는 물로 목을 축이며 넘어가지 않는 떡을 간신히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립에 달린 너울을 황급히 내린 그녀가 구염락을 쫓아 나갔다.

장서열이 따라 나오자 구염락은 초조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심지어 어딘지 모르게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서열이는 여전히 나를 신경 쓰고 있어. 내 기분을 눈치채고 바로 나왔잖아.’

어깨가 으쓱해진 구염락이 부드럽게 말했다.

“먹고 싶으면 조금 더 먹어.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 바람 좀 쐬려고 나온 거야.”

장서열이 구염락의 팔을 잡고 웃었다.

“많이 먹었어요. 더 먹으면 다른 걸 못 먹을 것 같아요.”

이어 고개를 비스듬히 젖힌 그녀가 구염락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폐하, 데리고 나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은 구염락이 두립 밖으로 삐져나온 장서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방금 전까지 느낀 서운함을 잊어버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좋다면 짐이 식당의 요리사를 궁으로 불러 매일 먹게 해 줄게.”

구염락은 의기양양한 눈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장서열이 포옹이라는 상을 내려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식당에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향해 있었다.

“궁에서 먹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 나와서 사람들이 배부르게 술과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며 달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떡을 먹어야 맛있게 느껴져요. 마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 같이요.”

장서열의 얼굴에 그리움이 일자 구염락은 괜찮아졌던 기분이 다시금 나빠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더듬는 추억에는 그가 없었다. 구염락은 이 식당이 처음이었지만 장서열은 아니었다.

‘전에는 매번 그 녀석이 함께 왔겠지.’

구염락은 장서열이 잡고 있는 팔을 빼냈다.

“얼른 돌아보고 환궁할까. 짐은 오늘 매우 바쁘거든.”

장서열이 웃어 보였다.

“지금 바로 돌아가시지요. 저도 그다지 볼 게 없군요. 그저 오랫동안 나오지 못해 한 번 와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가시지요.”

다시 구염락의 팔짱을 낀 장서열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구염락이 미간을 찌푸렸다. 순순히 수긍하는 그녀의 반응은 그를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저 한번 해 본 말일 뿐이다. 구염락이 생각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그는 장서열이 힘들게 나온 만큼 더욱 마음껏 놀고 즐기길 바랐다.

놀다 지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그의 품에 기대어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얼마나 즐거웠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럼 그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그녀가 입을 맞춰 줄지도. 어쩌면 더욱 열정적인 밤을 보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염락은 오늘의 외출로 서로를 향한 마음이 더 깊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 환궁을 해 버리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장서열은 아직 충분히 놀지도 못한 데다 그 때문에 설산떡도 마음 편히 먹지 못했다. 그녀를 기쁘게 하지도 못한 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갈등에 휩싸인 구염락은 움직이지 못했다. 장서열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저 그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조금 더 걸을까요?”

구염락이 짐짓 근엄하게 답했다.

“청산은 어때? 짐이 기마를 가르쳐 주지.”

말을 마친 구염락은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당기며 앞으로 걸었다. 장서열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정말 아이 같다니까.’

“가르쳐 준다고요? 폐하의 기마 스승이 누구인지 잊으셨나요?”

“더는 안 될 텐데. 활을 한번 당겼다고 손을 다치다니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지. 짐과 상대가 될까? 못 믿겠으면 한번 겨뤄보든지.”

이 추억만큼은 모두 그의 것이었다. 구염락과 장서열 둘만의 일.

구염락이 기뻐하자 장서열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은 마차에 오르지 않고 청산을 향해 걸었다. 이들은 우연히 재미있는 풍경을 발견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안하고 번화한 세상에 감탄했다.

장서열은 평화로운 구염락의 치세를 칭찬했다. 그는 득의양양한 얼굴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맞잡은 장서열의 손을 꽉 쥐었다. 마음이 꽉 찬 기분이었다.

* * *

반 시진 후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청산 호숫가에 도착했다. 호수는 수많은 배와 인파들로 가득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수의 중심부는 연경에서 명성이 자자한 칠대천이었다.

“배 타세요! 오십 문입니다!”

“바로 출발합니다. 오십 문만 내세요.”

“돈은 도착하면 받습니다. 오십 문입니다. 절대 거짓말 안 합니다!”

장서열은 바람을 맞으며 얼굴 앞을 가린 너울을 정리했다. 번화한 호숫가를 바라보며 그녀가 담담히 웃었다.

“청산지주는 은자를 세면서 절로 흥이 나겠어요.”

“짓궂기는. 관몽득은 청산을 운영하는 게 취미라더군. 돈만 아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야.”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린 장서열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숙여 다리를 두드렸다. 걸어오느라 약간 피곤했다. 지켜보던 구염락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게 힘들 것 같다니까 왜 말을 안 들어. 이 정도 거리도 힘들다면 기마 시합을 벌였을 때 결과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군.”

구염락은 거만한 표정과 달리 아내를 위해 서둘러 그늘진 곳을 찾아냈다.

“여기에 잠시 앉아 있어. 가서 배를 불러 올게.”

호수에서 불어온 바람에 너울이 날리자 밝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도발은 그만하시죠. 이 부인이 넓은 마음으로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잠시 후면 낙극생비樂極生悲(즐거움 끝에는 슬픈 일이 생긴다), 자괴불여自愧不如(스스로 남보다 못하다고 여겨 부끄러워하다)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되실 거예요.”

장서열에게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인 구염락이 그녀의 귓가에서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까? 부인이 날 유혹하지 않는 이상 남편으로서 끝까지 버텨야지. 아내를 이기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

구염락을 밀어낸 장서열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을 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저리 안 가요?”

“조금만 기다려. 이 남편이 얼른 데리러 올 테니.”

몸을 돌린 구염락은 곧 다가올 둘만의 세상을 생각하며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벌써 오랫동안 그녀가 말을 타는 걸 보지 못했다. 과거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구염락은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구염락은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낯익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구염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당장 돌아가 호수의 풍경을 감상하는 장서열의 눈을 가리고 싶었지만 이미 한 발 늦었음을 깨달았다.

장서열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서 웃고 떠드는 무리에게 머물러 있었다. 구염락은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멀리 사라지도록 당자 일행을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호수 유람을 할 기운이 남아있는 걸 보니 곤장 오십 대가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이로군. 현천기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대체 권서함과 뭘 하는 거지?’

설마 그에게 맞은 권서함을 위로하러 왔을 리 없지 않은가. 구염락은 현천기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권서함에게 현천기의 위로가 필요할 리 없었다.

구염락은 그들을 호수로 밀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저기서 서풍엽을 더하고 현천기를 뺀다면 과거에 장서열이 함께 어울리던 바로 그 무리였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비록 너울이 그녀의 표정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옛 친구를 만난 그녀가 기뻐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한숨을 내쉰 구염락은 단념한 채 몸을 돌려 그녀에게 돌아갔다. 저들이 있으니 구태여 배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제일 먼저 장서열을 발견한 건 헌원가였다. 그녀는 두립을 쓰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왠지 낯이 익다고 느꼈으나 얼굴을 볼 수 없어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바람이 너울을 빠르게 걷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헌원가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일행을 남겨둔 채 지체 없이 장서열을 향해 뛰어갔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장서열이 한 발 먼저 헌원가에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나를 곧장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너희를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당자가 잘해 주지? 아이는 언제 낳을 거야? 궁에 들어와서 우리 황아와 어울리면 좋겠다.”

헌원가는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꿈도 꾸지 마요! 우리 아이라면 헌원씨 가문과 당씨 가문의 보배일 텐데, 어찌 궁에 들어가 현비마마의 아드님께 해코지를 당하게 하겠어요? 언니 혼자 나온 거예요?”

그제서야 정신이 든 헌원가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다 곧 찬바람을 몰고 온 사내를 발견하고 몸이 굳었다.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린 그녀는 긴장한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간 걸 느꼈다. 무릎을 꿇기 전부터 이미 손을 떨고 있던 헌원가의 행동은 몹시도 부자연스러웠다.

헌원가가 느낀 건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심이었다. 윗사람이 불편한 건 당연했다. 게다가 상대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냉정한 영덕제였다. 이 세상에 그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헌원상과 말을 탈 때 지켜야 할 주의 사항을 이야기하고 있던 당자는 갑자기 부인이 뛰어나가자 하던 말을 멈췄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헌원가의 뒤를 좇던 그는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에 당황했다.

오늘 당자는 모처럼 일찍 퇴청했다. 맑고 상쾌한 가을 날 아내와 처남과 함께 가족의 정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자는 거의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지체 없이 처남을 이끌고 나가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