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80)화 (280/449)

제280화

권서함의 낯빛이 심상치 않자 현천기가 다급히 일렀다.

“권 대인, 정신 똑바로 차리고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마십시오. 구염단신과 권비마마 이상으로 더욱 큰일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잘못한 건 그들이 책임져야지 구태여 대인께서 그 짐을 떠안을 필요는 없어요.”

물론 권서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현천기는 권서함을 바라보며 어느 날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어떠할지 상상해 보았다. 과연 오늘 자신이 권서함에게 한 것과 같이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행동이라며 황제를 옹호해 줄 수 있을까.

옷을 갈아입는 구염락의 마음도 그만큼 복잡했다. 그는 오히려 권서함보다 더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장서열이 그가 왜 그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젯밤 구염락은 혜령과 소리자 모두에게 이유를 알리지 않은 채 궁을 나갔다. 그러나 장서열은 혜령을 찾았고, 답을 할 수 없던 혜령은 일등공을 찾아가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이 사실이 구염락의 귀에 들어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서열이 걱정하며 이 일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에 구염락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숨길 수 있을까?’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구염락은 끝까지 그녀가 모르기를 바랐다. 이유가 어찌 됐든 자신이 형제들을 직접 처단한 건 사실이지 않은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구염락은 후회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을 감옥에 가둔다 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구염락은 지금 당장 장서열에게 이야기를 전달할지, 아니면 저녁에 자신이 직접 말할지를 놓고 심사숙고했다. 그녀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하려면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게 나았다.

구염락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현천기가 병풍 밖에서 몸을 굽히며 말했다.

“폐하, 권 한림이 수형처로 갔습니다.”

현천기가 별다른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권서함은 곧장 떠나 버렸다. 똑똑한 사람이 편하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너도 가 보거라.”

“예, 폐하.”

* * *

장서열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붉은 비녀에 장식된 봉황을 바라보았다.

한숨에 이어 쓴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보낸 사람들은 후궁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는 건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건 처음이었다. 장서열은 문득 전전前殿과 조로전 사이에 놓인 문이 외부와의 모든 연결을 차단하는 장벽처럼 느껴져 눈앞이 캄캄했다.

장서열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무언가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물론 구염락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는 당연히 그녀에게 숨김없이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물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누구든 비밀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장서열은 자신이 이 일을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과 무언가 피하는 듯한 구염락의 태도에 주목했다. 이건 결국 그녀가 구염락에게 이 일을 묻지 말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장서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완정, 소리자에게 본궁이 나가서 걷고 싶어 한다고 전해라.”

약간 놀란 완정이 대답했다.

“마마, 혹… 출궁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소리자에게 알릴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

장서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궁 안에만 있은 지도 어느덧 이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완정은 서둘러 현비의 명을 받들러 갔다. 당황한 구염락이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이유로 나가려는 것이냐? 혹 무언가를 전해 들은 것이냐?”

완정이 답했다.

“아닙니다, 폐하. 마마께서는 그저 나가서 걷고 싶다 하셨습니다. 노비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후궁에 오래 머무시다 보니 다소 답답하셨던 듯합니다.”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을 떠나려는 거라 지레 짐작했다.

정신을 차린 구역락은 제 발 저린 스스로를 남몰래 비웃었다. 황제의 여인이자 황아皇兒의 생모가 어찌 자신을 떠난단 말인가. 그녀는 말 그대로 그저 답답한 마음에 나가서 걷고 싶은 것뿐, 그녀를 실망시킬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과거 교만하고 도도했던 장서열은 궁금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었다. 누구도 그녀를 한 곳에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녀는 매달 몇 번이고 청산에 들락거렸고, 심심할 때면 헌원가와 만정을 만나 수다를 떨었다. 매일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녀에게 황궁은 지나치게 한가한 곳이었다.

장서열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도, 그가 자신을 위해 꾸며준 곳에서 가만히 머무는 것도 싫었다. 그녀에게는 일탈이 필요했다.

‘곧 있으면 더 이상 한가하지 않을 텐데.’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구염락은 지금쯤 장서열이 짓고 있을 표정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여인들이 많은 곳은 시끌벅적한 법이다. 그는 새로 들어오는 후궁들을 장서열의 놀이 친구로 붙여 줄 생각이었다.

구염락은 황궁에 있는 장서열이 좋았다. 혹시라도 바깥을 그리워하다 도망이라도 간다면 낭패가 아닌가.

설령 장서열이 어리석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더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게 되는 상상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서열이는 궁에 있어야 해. 설령 날개를 꺾는 한이 있더라도!’

구염락이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 출궁할 채비를 하라고 전하라. 짐이 함께할 것이다.”

쓸데없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구염락은 서둘러 길을 정리했다. 절대로 마주쳐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충왕부 사람들!

다소 무례한 명령이긴 했으나 충왕과 충왕비 역시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충왕비가 아프다는 핑계로 아들을 속히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한 시진 후, 삼 년 가까이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장서열은 연경에서 가장 번화한 대로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처음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좁은 곳에 갇혀 있던 새처럼 새장이 열려도 쉽사리 날아가지 못했다. 황궁의 담, 회랑과 가산假山, 곳곳에 핀 기이한 꽃들만을 지겹게 보아 오던 장서열에게 갑자기 넓어진 시야와 붐비는 인파는 현기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긴장된 입가에 미소가 퍼지기 시작했다. 장서열은 아이처럼 실로 눈부시게 웃었다. 봄바람에 눈이 녹듯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달콤한 모습이었다.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보며 일순간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구염락은 즉시 장서열의 머리에 두립斗笠을 씌워 주며 주위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매서운 눈빛에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장서열은 몹시 즐거웠다. 인파 속을 걷는 기분은 아주 새로웠다.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호통 소리가 시끌벅적했다. 그녀는 하늘과 땅의 드넓은 공기를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아침에 느낀 답답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손을 이끌고 익숙한 점포와 식당으로 달려갔다. 무엇을 보아도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구염락은 약간 울적해졌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렇게나 좋을까.’

구염락은 눈을 반짝이며 즐겁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거슬렸다.

‘황궁이 싫은 건가? 평소 식사가 입에 안 맞았던 거야? 이 설산떡雪山糕이 대체 뭐가 그리 맛있다는 거지?’

두 사람은 손님으로 가득 찬 식당 안에 앉았다. 별채에 자리가 없어 대청 구석진 곳에 앉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서열은 기쁨에 차 있었다. 그녀는 떡을 한 조각 집어 구염락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맛있죠? 저는 이 집 떡이 식사보다 더 맛있어서 올 때마다 꼭 주문했어요.”

말을 마친 장서열 역시 설산떡 한 조각을 먹었다. 입 안에서 녹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순식간에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눈이 가늘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은 마치 인형 같았다.

기뻐하는 장서열을 보며 왠지 모르게 심란해진 구염락은 고개를 돌린 채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는 과거 서풍엽이 종종 이 식당의 바구니를 초혜전에 보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풍엽은 바구니를 건네 줄 때마다 항상 당부를 잊지 않았다.

“서열이가 많이 먹지 못하게 해. 밥을 먹은 뒤 꼭 두 조각만 줘. 밥 먹기 전에 보여 주지 말고. 아마 참지 못할 거야.”

그 시절 서풍엽은 항상 사랑스러운 눈길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입에 올리며 서풍엽이 짓던 그 득의양양한 표정, 그리고 서풍엽의 말처럼 바구니를 볼 때마다 입맛을 다시는 장서열의 모습은 언제나 구염락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당시 구염락은 장서열의 간절한 눈빛을 견디지 못해 매번 서풍엽의 당부를 어기고 그녀에게 떡을 몇 조각이나 더 먹이곤 했다. 심지어 충분한지 묻고 부족하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자신의 몫까지 챙겨 주었다.

그때도 장서열은 이렇게 떡을 입 안에 넣기만 하면 웃어 보였다. 그 한 입만으로 모든 게 충분하다는 듯.

‘중요한 건 떡이 아닌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구염락은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지는 걸 느꼈다.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찹쌀가루를 뭉쳐서 설탕이나 좀 묻혀 놓은 것뿐인데 그리 맛있을 리가.’

구염락은 장서열이 지금 먹고 있는 것이 떡인지 아니면 과거의 추억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설산떡을 좋아하는 거라면 어째서 어선방御膳房에서 만든 건 손도 대지 않는단 말인가.

* * *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는 떡만 따로 팔지 않습니다.”

점소이가 허리를 숙였다. 정중하지만 아부하는 기색은 없었다.

“말도 안 돼.”

손님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남장을 했으나 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용모가 영락없는 여자였다.

“저 사람들은 먹고 있잖아요.”

남장여자가 정확하게 구석의 탁자를 가리켰다. 그녀와 함께 온 남자가 애정 어린 웃음을 보였다.

“정말 예리하구나. 이보게, 저 탁자에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내오게.”

구석에 앉은 아가씨가 즐겁게 떡을 먹는 모습은 누구든 같은 음식을 먹고 싶게 할 만큼 맛있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정말로 단독으로 판매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아직 음식이 나오지 않아 그런 것뿐 저쪽 손님은 식사를 같이 주문하셨습니다.”

점소이가 다시 한번 예의를 갖춰 설명했다. 남장여자는 아름다운 눈꼬리로 그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흥, 은자를 많이 벌고 싶다는 뜻이군! 형님, 그럼 우리도 식사를 주문해요.”

점소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술이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이곳은 식당이지 주전부리를 파는 가게가 아니었다.

‘참 이상한 손님이군. 여기서 두 걸음만 더 가면 바로 간식을 파는 가게가 있는데 왜 굳이 여기 와서 기 싸움을 한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