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77)화 (277/449)

제277화

병풍 뒤에서 서비절이 나타났다. 그는 원한 가득한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온 가족을 희생해 한 여자의 평안과 맞바꾸다니…….

‘그럼 내 어머니는 무엇이며 서북 지역에 남아 있는 누이, 형제들은 다 뭐란 말인가!’

서비절은 아버지 서북왕이 연경에 와서 저지른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이는 명백히 가문에 치욕이었다. 설산의 매처럼 천하 호걸이었던 아버지는 어느새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런 아버지를 여태껏 식구들은 애써 참고 견뎌 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로지 한 여인을 위해 추태를 부리고, 심지어 아낌없이 가족의 목숨을 내걸었다.

아버지는 변했다. 낯설고 냉정한 그는 더는 아들을 어깨 위에 태우고 서북의 눈 덮인 산봉우리를 넘나들던 그 위대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서북왕에게 가족이란 마음속에 품은 여인 하나만도 못한 존재였다.

구염락은 서비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서비절이 조옥언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었다. 나머지는 서씨 가문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구염락도 가끔은 철두철미한 모습을 버리고 온화하게 굴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역사에 독단적인 폭군으로 남는 걸 원치 않았다.

자신을 만류하는 진 공공의 말이 전부 이치에 맞는 건 아니었으나, 그 또한 가치 없는 일을 위해 역사서에 불필요한 기록을 남길 만큼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장서열의 명성에 해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구염락은 그들 부부가 난폭한 군주과 난잡한 비가 아닌, 현명한 제왕과 어진 황후로 남길 바랐다.

구염락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사람을 두렵게 하는 그의 웃음에서는 딱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은 모든 게 하찮은 인간이 벌이는 일일 뿐, 깊이 생각한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 * *

약연若然은 뒷산 밖을 나서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거처에서 염불을 외우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백국을 정벌한 황제는 환궁 후 한 번도 약연을 찾아오지 않았다. 약연은 조급한 내색 없이 평소와 같은 생활을 유지했고, 딱히 손자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궁에서는 매달 생활비와 함께 사람을 보내 왔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않았다.

약연은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만큼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었다.

햐얗게 센 곳 없이 온통 까만 머리카락과 새하얗고 혈색 좋은 뺨은 인자하고 평온한 인상을 주었다. 어느덧 고귀한 신분에 좋은 저택을 얻게 된 약연은 이제 백여 명의 노비를 부리는 귀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유세를 떠는 일 없이 오히려 자애롭고 온화한 태도를 유지했다.

집안의 노비들은 모두 약연을 좋아했다. 그녀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소녀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고, 투명한 눈동자에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소박한 옷을 입고 있어도 명문가 규수처럼 단정한 약연의 자태는 천천히 피어나는 작약처럼 아름다웠다.

“부인! 보세요. 예쁜가요?”

지난달 황궁에서 보내온 비단으로 지은 분홍색 조끼였다. 어린 소녀가 입고 있는 모양은 퍽 보기에 좋았다.

약연이 기쁜 얼굴로 담담하게 웃었다. 백옥 같은 손가락으로 소녀의 머리카락을 만져 준 약연이 만족스레 말했다.

“그래, 보기 좋구나. 표아飘儿는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소녀는 주인의 곁에서 즐겁게 재잘대며 기쁨을 표현했다. 이렇게 예쁘고 부드러운 옷감은 처음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찬사를 전부 옷에 쏟아냈다.

‘고작 이런 하찮은 은혜로 나를 이곳에 남겨두려 하다니.’

소녀를 바라보는 약연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결코 진실되지 않았다. 약연은 현비가 허튼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비의 곁에 있는 구염락은 자신의 아들이었고, 오랜 세월 인내와 고통 속에 살아온 사람은 약연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제왕이 된 아들이 주는 이득은 죄다 현비의 차지가 되었단 말인가. 현비는 최소한 자신에게 송구한 마음조차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표아가 약연의 손을 흔들며 초조하게 불렀다.

“부인, 부인! 왜 그러세요? 제가 한 말을 들으셨나요?”

약연이 웃으며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악의 없이 천진난만한 아이는 수줍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약연에게는 소녀처럼 무지한 시기가 없었다.

약연의 눈빛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서북왕은 벌써 오랫동안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또 옛 정인을 만나러 갔겠지?’

약연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알고 보니 조 부인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 놀음을 즐길 줄 아는 여인이었다.

‘서숭산의 혼을 쏙 빼놓다니. 아주 득의양양하겠군.’

* * *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수면 위로 기슭에 우뚝 선 버드나무 그림자가 비쳤다. 가을바람이 부는 호수 연안에는 정교한 화방画舫 한 척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옥호접은 기다란 청록색 치마 위로 손바닥 넓이의 자주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쇄골과 허리춤까지 겹겹이 늘어진 연분홍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하얀 목선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화방 밖은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를 보기 위한 연경의 명사들로 가득했다. 미인에 반한 그들은 옥호접이 정한 규칙에 따라 재능과 학식을 드러내며 시사诗词를 외우고 벌주놀이를 하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창가에 기댄 고운 그림자는 온통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눈썹을 살짝 구부린 옥호접은 작은 손으로 화방에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한 바퀴 휘감았다가 풀었다. 늦가을이었지만 아직 버드나무에는 여린 잎이 남아 있었다.

옥호접은 청산 호수를 떠나 잠시 다른 곳에 배를 정박한 상태였다. 그녀가 청산에서 모욕을 당한 일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연경 백성들에게 특별한 바람을 몰고 온 여인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후궁을 들인다니 명문가 여인들은 손꼽아 간택일만 기다리고 있겠군. 천하의 지존에게 시집가려고 말이야.’

여인들 중에는 봉황이 될 만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옥호접 같은 기녀에게는 희망조차 없는 일이었다.

옅은 한숨이 채 새어나오지 못하고 옥호접의 작은 입 안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어린 계집종이 차분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가씨, 문제를 맞힌 분이 계세요.”

화방은 옥호접이 지은 시의 수수께끼를 맞혀야만 들어올 수 있었다. 어차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딱히 감동적일 것도 없었으나 옥호접은 단번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뭇 사람들을 홀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염하면서도 단정한 표정은 제법 시원스러웠다.

배 안으로 장서양이 들어왔다. 과거 청산 문회에서 백 등 안에 들었던 그가 하찮은 화방에 들어오지 못할 리 없었다.

대갓집 문지기의 복장을 한 장서양은 화려한 비단 복장을 한 활기찬 남자와 함께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평범한 외모를 지녔으나 값비싼 옷감을 두른 탓인지 그럭저럭 준수해 보였다.

남자는 소문으로만 듣던 옥호접을 보자마자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역시 값어치를 하는군! 은자를 쓴 보람이 있어!”

장서양은 말이 없었다. 어차피 은자를 받기 위해 온 곳이었다. 옥호접의 수수께끼를 푸는 대가는 은자 오십 냥이었고, 남자는 옥호접을 만난 후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서양에게 백 냥을 던졌다.

“꺼져! 썩 꺼지거라! 네 볼일은 끝났으니 이 몸의 흥을 깨지 마!”

말을 마친 남자는 경악한 옥호접에게 조급히 달려들었다. 앞섶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옥호접은 문 앞에 선 장서양에게 분노 어린 시선을 던졌다.

‘감히 문제를 대신 풀어 주는 대가로 장사를 해? 이런 짓거리로 돈을 벌다니!’

옥호접은 당황했다. 만일 모든 사내들이 저런 편법으로 화방에 들어온다면 그녀는 손님을 가려 받을 최소한의 장치를 잃는 셈이었다.

주렴 밖으로 장서양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옥호접은 하체에 통증을 느꼈다. 원한 섞인 눈이 주렴 밖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장사를 망친 원수에게 반드시 오늘 일을 앙갚음하겠다고 다짐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간 옥호접이 궁금했으나 재능과 학식이 부족해 문제를 풀지 못한 연경의 귀족들은 콧노래를 불렀다. 시를 읊지 못해도, 대구를 맞추지 못해도 이제는 돈을 주고 사면 그만이었다. 옥호접의 절묘한 금 연주를 묘사하는 능력 또한 돈이면 해결 되었다.

화방 문제를 대리로 풀어 주는 이들은 정찰 가격을 제시하며 공평하고 신용 있는 거래를 약속했다. 심지어 옥호접을 만나지 못한다면 환불하는 조건이었다.

순식간에 연경의 부잣집 도련님은 물론 불량배들까지 옥호접의 손님이 되었다. 그들은 문인과 시인에게 추앙받는 기녀가 거리에 널린 손쉬운 기녀들과 뭐가 다른지 알고 싶어 했다.

옥호접과 밤을 보낸 이들이 늘어났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시문을 짓는 우아한 기녀는 한순간에 음담패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남자들은 옥호접의 피부가 얼마나 하얀지, 기교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장황히 늘어놓으며 평소 도도하기로 유명한 그녀의 명성을 가차 없이 모욕했다. 보고 겪은 모든 말을 쥐어짜 낸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만족한 얼굴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특권이었던 즐거움은 만인의 유희 거리가 되었고 우아한 취미는 세속적인 거래로 변했다. 옥호접과 보내는 시간을 재주와 학식의 척도로 여기던 문인들은 더 이상 그녀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옥호접의 화방은 금세 썰렁해졌고, 문제를 맞히러 오는 사람도 뜸해졌다. 콧대가 꺾인 화방은 일개 기방과 다를 바 없는 비천한 곳이 되었다.

세자와 권 대인은 애초에 옥호접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물러가라 명한다면 물러나야 하는 처지였으니 처음부터 어떠한 원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 대리로 문제를 풀어 준 그 비천한 작자는 달랐다. 옥호접의 장삿길이 막히고 그녀가 구렁텅이로 들어간 건 모두 장서양의 농간 때문이었다.

화가 난 옥호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소매를 휘두르자 탁자 위에 있던 찻주전자가 깨지며 뜨거운 찻물이 쏟아졌다. 찻물과 함께 쏟아진 찻잎은 몹시도 무력하여 마치 더는 빛나지 않는 그녀의 처지 같았다.

시녀들이 무릎을 꿇었다. 이런 상태라면 옥호접은 결코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없었고 화방 식구들은 계속해 평범하고 질 낮은 손님을 접대해야 했다. 그들은 손님을 받는 것까지는 개의치 않았으나 이런 상황에서 몸을 파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명성에 치명적이었다.

옥호접도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화방 바깥에는 변변한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농부나 도적이 겨우 백 문 정도의 돈을 가져와 들여보내 달라 소리를 치기도 했다. 수년간 화방을 경영해 온 옥호접에게 이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치욕이었다.

옥호접은 분노했다.

‘장서양! 제 갈 길이나 똑바로 갈 것이지 하필 내 앞길을 막아? 천하에 못된 것! 내 떠나기 전에 반드시 네 놈을 호되게 혼내줄 테니 각오하거라!’

이를 악문 옥호접의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가서 그자에 대해 알아 와라. 어떤 내력을 가졌는지,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대체 뭘 하는지까지 전부!”

“네, 아가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