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황실의 서재에 선 서북왕이 줄곧 움직이지 않는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소신, 폐하께서 천하의 복을 누리게 되신 것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옵니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서재는 천하의 권력이 집중된 황제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황제와 서북왕 두 사람을 제외하면 차를 올리며 시중을 드는 하인조차 없었다.
말을 마친 서북왕은 구염락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서북왕은 잘못을 뉘우치지도, 그로 인한 후폭풍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듯했다.
물론 서북왕은 구염락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은 여태껏 그의 지지를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게다가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구염락이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구염락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확실히 서북왕은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구염락 역시 서북왕의 은혜를 모르지 않았다. 따라서 구염락은 서북왕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그가 명성을 지키며 물러나도록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서북왕은 황실의 일에 지나치게 깊이 관여했고, 끝내 황손까지 해치려 했다.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던 두 사람 중 결국 서북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조로전에 벌어진 일의 배후에 본왕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차가운 대답에 서북왕의 입꼬리에 조소가 퍼졌다.
“소신이 현비마마를 건드려 무슨 득을 보겠습니까. 제 손을 벗어난 폐하를 아무리 견제하고 싶다 해도 소신, 결코 그런 치졸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폐하의 자손은 많을수록 좋지요. 그래야 저 역시 또 한 명을 골라 잘 키우지 않겠습니까.”
구염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짐을 급히 알현하고자 한 이유가 고작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기 위함인가?”
“폐하께서 소신을 의심하시는데 어찌 이것이 헛소리에 불과하겠습니까. 그 일로 이득을 본 사람은 소신이 아닙니다. 헌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하찮은 것들이 떠드는 말에 현혹되어 소신을 범인이라 생각하시는지요. 폐하, 정말 이대로 진범을 놓칠 생각이십니까?”
구염락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황금빛 용이 수놓아진 검은 평상복 바깥으로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
서북왕이 대범하게 말했다.
“폐하,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황자를 모해하는 건 소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제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누군가 저를 겨낭하여 일부러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폐하, 이제 소신은 폐하께서 옛 은혜를 잊으신대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소신을 고깝게 여기시는 건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폐하께서는 진실을 믿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면 진범을 죽이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
“폐하께서는 계속 성모圣母(구염락의 친모)를 궁에 모셔오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성모가 중병에 걸렸는데도 보러가지 않으셨습니다. 폐하, 진정 모친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제 말을 부정하지 못 하신다면 더는 소신을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폐하께서는 이미 천하를 차지한 제왕이시며 소신은 결코 폐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소신이 폐하를 지지했던 정을 봐서라도 더는 소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참으로 깔끔한 원망이군. 서북왕, 그런 뻔뻔한 말을 하면서도 정말 양심의 가책이 안 느껴지오?”
구염락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북왕을 바라보았다.
서북왕은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자랄 줄 알았다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을 아이. 어린 구염락을 황궁에 들여보낸 후 서북왕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그가 직접 구염락을 살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폐하, 소신에게 죄가 있다면 기껏해야 이를 자세히 조사하지 않은 우를 범한 것뿐입니다!”
“조사에 소홀한 것은 대죄가 아니더냐? 태후는 그와 같은 이유로 냉궁에 갇혔다. 그대는 같은 죄를 저지르고도 이리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는데, 대체 얼마나 더 특별대우를 해 줘야 성에 차는 것이지?”
서북왕은 구염락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태연하던 마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영명하신 분입니다. 소신이 아무리 나라에 공이 없다 해도 결코 과오를 저지른 적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거슬리는 건 모조리 죽일 생각이십니까!”
“…짐이 말한 적이 있던가?”
구염락이 한결같이 무심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대가 짐을 지지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아니었다면 그대가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안 그 즉시 죽였을 테니까… 그대는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게 다행이라고는 생각지 않나보군.”
“구염락!”
“진정하라. 누구에게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겠지만 그대는 결코 처벌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 분의 담력이 어떠한지는 그대가 더 잘 알겠지. 이번 일은 그 분과는 무관해.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지……. 그대는 참 대단하군, 이런 순간에도 끝까지 책임을 전가하려 들다니.”
경멸이 담긴 시선이 서북왕을 향했다. 순간 서북왕의 눈 속에 노여움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파렴치한 두 모자에게 구역질을 느꼈다.
약연은 순진한 얼굴로 마치 서북왕을 위하는 척 온갖 조언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건 황실을 겨냥한 노림수였다. 그녀는 후궁에 자손이 없어야 황제를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서북왕을 설득했지만 결국 그들이 벌인 소동은 내명부가 아닌 황실 전체를 뒤집어 놓았다.
‘약연 그 천한 것이 과연 수단이 좋구나!’
약연은 서북왕을 볼 때마다 매번 조금씩 비슷한 이야기를 흘렸다. 어느 순간부터 서북왕은 가랑비에 옷 젖듯 약연의 계략에 휘말려들었다. 그러니 이제와 그녀의 지시를 받았다고 실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는 언제나 서북왕을 깡그리 없애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북왕은 자신이 아니었다면 두 모자가 결코 지금처럼 좋은 나날을 보낼 수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어찌 저런 배은망덕한 놈이 있단 말인가!
구염락이 서북왕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계속 부인할 텐가?”
서북왕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아니옵니다. 소신은…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의 먹이가 된 스스로를 원망할 뿐입니다. 하지만 폐하, 잊지 마십시오. 현비마마의 일은 결코 소신 혼자서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폐하께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이쯤에서 멈춰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책임을 회피하려 들더니 갑자기 쉽게 인정하는군. 왜? 갑자기 양심이 말을 걸던가?”
서북왕은 치미는 화를 눌러 참았다.
“분명 소신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지 못하신다면 저로서도 방법이 없으니 다만 한 가지만 더 간청드리겠습니다. 소신, 이제 나이가 들어 사직을 청하려 합니다. 부디 과거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소신의 식솔들은 용서해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서북왕은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렇지 않으면 쌍방이 막심한 손해를 입는 싸움까지 치달아야 했다.
구염락의 시선은 티끌 하나 없는 바닥과 으리으리한 대청을 지나, 지난날 그의 앞에 산처럼 나타났던 인물에게 고정되었다. 서북왕은 황궁에서 기댈 곳 없는 구염락에게 손을 내밀고, 손 공공 등 측근들을 곁으로 보내 그의 성장을 도왔다.
구염락은 서북왕의 은혜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서북왕이 약한 모습을 보이며 화해를 청할 때는 그 또한 마땅히 가장 평화로운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렇다면 예정대로 단순히 서북 세력을 와해시키는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짐의 황아皇儿는?”
구염락의 눈빛은 싸늘했다. 서북왕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허면 소신의 아들들을 내어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들은 자네가 사랑하는 여인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 다르지. 조옥언은…….”
“폐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본왕이 오늘 폐하가 두려워 고개를 숙인 줄 아십니까?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 서북왕은 폐하의 삼천 병사를 피로 베어 낼 것입니다!”
구염락이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성질하고는… 조 부인은 사사롭게는 짐의 장모이니 당연히 그녀를 어찌할 수 없지. 하지만 설령 짐이 조 부인을 어찌한다 해도 그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지? 그리 야단법석을 떨 필요는 없을 텐데.”
서북왕은 조급해졌다.
“폐하, 본왕이 경고합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조옥언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조 부인이 현비마마의 생모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없으니 득보다 실이 많지 않도록 조심하시지요!”
“그대가 짐에게 경고를 해? 하하! 참으로 무섭군. 짐은 단지 조 부인이 홀로 오래되어 적적하니 재가를 권하는 게 어떨지 생각한 것뿐이야. 그 밖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구염락이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짓자 서북왕이 그런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팽팽한 눈빛에 증오가 가득했다.
서북왕이 목구멍에서 간신히 두 글자를 쥐어 짜냈다.
“…감히!”
“감히? 이 세상에 짐이 하지 못할 일은 없다.”
“구염락! 본왕은 이미 네 뜻대로 모두 해 줬다! 나라의 군권까지 모두 내어 준 마당에 대체 무엇을 또 원하는 게냐!”
구염락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군권 정도로는 부족해……. 이건 어떨까? 그대의 모든 손주들이 황아가 받은 고통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대로 맛보는 거야. 그러다 죽는 아이가 있다면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수밖에.”
“…….”
“대신 짐이 넓은 아량으로 조 부인의 재가는 없던 일로 하지. 서북왕,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담담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잔인한 말이었다. 서북왕은 껄껄 웃음을 터뜨리다 돌연 웃음을 뚝 그친 후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폐하. 이것으로 서로 빚진 것은 없는 겁니다. 허나 조옥언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는 날에는 결코 본왕이 폐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구염락은 진심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는 정말로 서북왕이 자신을 어찌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자신감이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했다.
“짐도 조 부인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서북왕은 그제야 바짝 긴장하던 마음을 놓았다.
“부디 폐하의 약조가 지켜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소신, 이만 물러가옵니다.”
서북왕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구염락이 차가운 눈으로 먹색 병풍 뒤를 쳐다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