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장서열이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무언가를 잘못 밟은 사람처럼 별안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순간 구염락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옷이 벗겨졌고, 두 사람은 큰 소리를 내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소리자가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곧 화 마마의 조용한 호통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장서열이 본능적으로 빠르게 구염락을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다쳤을까 걱정이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 구염락이 점점 눈에 초점을 되찾기 시작했다. 방금 전 난폭했던 모습을 지운 채, 그는 긴장한 장서열의 얼굴을 보며 감동했다.
역시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자신을 좋아하기에 자신이 먼저 죽는 걸 바라지 않는 것이다.
“열셋째?”
장서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구염락의 날렵한 눈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는지 염려스러웠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구염락은 그녀가 쏟는 관심에 자책감을 느꼈다. 그는 차마 장서열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괜…찮아. 서열아, 그런데 네가… 네가 내 위에 있어.”
물론 그에게 장서열은 무겁지 않았으나 애매한 위치에 올라와 있는 그 느낌이 견디기 힘들었다.
“괜찮으면 됐어요.”
장서열은 한시름 놓았다. 어차피 이는 그녀에게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신이 처음 욕실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상태가 되었음을 확인한 후, 그녀 또한 창피할 정도로 긴장됐던 마음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일순간 냉기가 감도는 얼굴을 지운 그녀가 평소처럼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도박에서 이긴 것이다.
서풍엽과의 일을 곧바로 고백한 이상, 앞으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었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을 늦게 말했더라면 꼼짝없이 황제를 속인 죄로 처벌받았을 것이다.
“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그에게 옷을 덮어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끄러워하는 건 오로지 구염락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딸기가 되어 있었다.
“서열아,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파란 옷깃을 잡은 구염락이 처음 그녀를 보았던 그날처럼 긴장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 할게.”
다른 누구보다도 잘 할 거야.
장서열은 무언가 손등을 세게 내리친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의 말에는 달콤한 진심 외에도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장서열은 그런 그가 매우 낯설었고, 한편으로 자신이 그에게 너무 못되게 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내 장서열이 웃었다. 새벽이슬처럼 사랑스럽고 연약한 얼굴이었다.
“좋아요. 그럼 저도 전하에게 좋은 후궁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다 씻었나요? 배고플 텐데 식사하러 가요.”
구염락이 웃었다. 태양처럼 밝은 얼굴로 그는 장서열의 손을 잡고 뛸 듯이 기뻐했다. 구염락은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장서열을 마주볼 때마다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장서열은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에 찔린 듯 눈이 시큰거렸다. 전생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웃음을 보였던 적이 없었다. 대신 마치 더러운 물건을 보는 양 언제나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었다.
하지만 이번 생의 구염락을 보면 볼수록 장서열은 전생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구염락의 사랑을 욕심내지 않고 냉정하게 행동한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를 깍듯이 존중하는 제왕과 비(妃)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생에서도 그러했다. 만약 그때 그녀가 금용과 권여아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혹은 그의 마음속 유일한 염원들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그렇게까지 빨리 실패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배고파요.”
하지만 장서열은 그들을 해친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손을 쓰지 않았다면 역으로 자신이 당했을 것이다. 전생에서 그녀들과의 유일한 차이점은 자신에게 지켜 줄 남자가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장서열은 자신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실패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미간을 찌푸리자 뛰던 발걸음을 멈췄다. 억지로 기쁜 마음을 거둔 구염락이 조심스레 장서열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화내지 마, 서열아. 식사하러 가자.”
장서열은 숙이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통쾌함을 느꼈다. 복수한 듯한 느낌이 든 것도 잠시, 이내 다시 서글픈 마음이 든 그녀는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지금 이 순간, 장서열은 새 삶이 기쁘지 않았다. 그녀가 겪었던 말 못할 고민들과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며 쌓아 온 감정들이 때때로 충격을 가할 때마다 그녀는 그저 스스로를 비웃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어떤 게 진정한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장서열은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 대체 자신이 왜 두 번째 생애를 성실히 살아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충실히 남을 무너뜨리면 과연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는 걸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누군가 구염락에 기대어 자신을 밟으려 한다면 이제는 역으로 자신이 구염락에 기대어 그를 밟아버릴 거라는 사실이었다.
문득 장서열은 이런 쓸데없는 상념에 빠져 있는 스스로가 참 한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관을 모두 갖춰 입은 구염락이 조심스럽게 장서열을 데리고 나왔다. 장서열에게 의자를 꺼내 준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서서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집어 주었다. 소리자는 노비처럼 구는 주인의 모습을 못 본 체하기 위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화 마마를 비롯한 나머지 하인들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장서열을 잡아와 태자를 모시는 법을 다시 교육시키고 싶었다. 정성껏 모셔도 모자랄 판에 태자에게 보살핌을 받다니, 양원은 죽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화 마마는 곧 태자의 태도에 더욱 놀랐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간 무수히 그런 행동을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구염락은 자신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기뻤다. 아무도 그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장서열에게 반찬을 집어 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그는 행복했다. 이렇게 그녀와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꿈이라면 활짝 웃은 채로 깰 것만 같았다.
과거 장서열의 시중을 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구염락의 모습은 어떠한 태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또 기분이 좋아진 구염락이 티 없이 웃어 보였다.
구염락은 숟가락으로 그릇을 부딪히는 일도 없이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장서열의 모습에는 절로 존경심마저 일 정도였다. 그였다면 통째로 국을 마셨을 것이다.
구염락의 눈에 장서열은 늘 그렇게 우아하고 고상한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반찬을 집어 주기 전 한참 손을 씻고도 오래도록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이 더럽게 느껴졌다.
구염락의 시선이 몹시 불편했던 장서열이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전생에서 수십 년간 황후로 지내며 터득한 기품으로 가득했다.
“앉아서 같이 들어요.”
구염락이 재빨리 순종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배 안 고파. 반찬을 집어 줄게.”
누구든 앞에서 밥 먹는 모습만 쳐다보고 있으면 체하기 마련이었다. 장서열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같이 밥 먹자니까요.”
구염락은 장서열이 화를 내자 곧장 자리에 앉아 군말 없이 밥을 먹었다.
장서열이 그런 구염락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가 아까처럼 자신을 향해 멍청하게 웃고 있지 않은지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쉰 그녀가 비로소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소리자는 놀라서 턱이 빠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멍청히 서 있었다.
화 마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긴장으로 침을 삼킨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전도유망한 상전을 모시고 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방 마마나 송 마마 따위는 장 양원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릴 수 없었다. 장서열 앞에서 태자는 그저 얼간이에 불과했다.
화 마마는 훗날 자신이 궁에서 권위를 떨치며 모든 궁인들의 아첨을 받는 상상을 했다. 그녀가 조심스레 허리를 꼿꼿이 폈다.
농교와 완정은 태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태자는 그저 전투에 능한 대주국의 영웅일 뿐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무서운 탓에 예쁜 부인을 구하지 못하자 황제에게 아가씨 같은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달라고 청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태자는 좋은 사람 같았다. 비록 세자보다 나이가 어리고 다소 겁이 많아 보였지만 아가씨에게 잘해 주니 그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마음을 놓으며 아가씨보다 두 살이나 어린 데다 잘생긴 새신랑을 기꺼이 인정해 주기로 했다.
한편 기쁨에 젖은 화 마마는 돌아가서 계획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기회에 양원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볼 참이었다. 사내라는 족속들은 본래 잘 달래어 길들여야 하는 법이다. 특히 양원은 태자보다 나이가 많으니 세월이 흐르면 그저 외모만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는 어려울 터였다. 아직 어린 양원이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화 마마는 사전에 미리 대비를 하자고 생각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갈비 한 조각을 든 장서열이 잠시 망설이다 이를 구염락의 그릇에 놓아 주었다.
“한창 성장하실 때이니 고기를 많이 드세요.”
고개를 든 구염락이 장서열을 바라보며 웃었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웃음이었다.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된 장서열이 서둘러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했다.
그녀는 혹시 방금 전 욕실에서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굴지는 않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구염락을 더욱 세게 넘어뜨렸더라도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자신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후 입꼬리를 올렸다.
구염락이 더욱 환하게 웃었다. 역시 서열이 제일 좋아하는 건 그였다. 심지어 그녀는 반찬을 집어 주고, 자신을 향해 웃어 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농교는 태자가 전장에서 쌓아 올린 놀라운 활약과 승전보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건 분명 여기서 따뜻한 웃음을 짓고 있는 태자 전하의 공이 아니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악귀 같은 장군이 태자에게 아첨하기 위해 바친 공로이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농교는 저 어수룩한 태자에게 맡겨야 할 대주국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