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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81)화 (181/449)

제181화

“푸하!”

하얀 물거품과 함께 수면 위로 나온 그가 계단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었다. 쉴 새 없이 기침하는 그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장서열이 얼른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참 재밌는 남자였다.

‘그렇게 놀랄 필요까지야. 내가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겨우 정신을 차린 구염락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차라리 숨이 막혀 죽을지언정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의 등줄기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그를 저지했다. 이는 기적처럼 그의 초조함을 달래주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장서열이 화를 낸 이유를 떠올린 그가 애써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감히 그녀가 앉아있는 계단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하얀 거품이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물 속의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미소를 머금은 장서열이 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등을 적셔주었다. 흠칫 놀란 구염락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물을 스치던 손 역시 굳어 버렸다.

찰나에 구염락의 변화를 눈치챈 장서열은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꼈지만 스스로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구염락이 놀랐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것쯤이야 후에는 그를 놀릴 거리도 못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수건으로 그의 등을 닦아주며 장서열이 머릿속으로 재빨리 말을 골랐다.

“아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구염락이 얼른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구염락이 고개를 돌려 해명하려 했지만 장서열은 그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차가운 사람이었는지 다시 떠오를 것 같았다. 장서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나빴어요. 조금 전에는 나쁜 기억이 떠올라서 그만…….”

구염락의 눈에 순간 잔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나쁜 기억을 남긴 자를 즉시 찢어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구염락의 등에 손을 얹은 장서열은 그의 분노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정말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네. 이런 무기를 손에 쥐고 괴롭히면 황제도 못 견디겠지. 일단 내가 화를 입을 일이 없도록 황제부터 막아야겠어.’

구염락은 별안간 장서열의 기분이 저조해진 것을 느꼈다. 용기 있게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긴장한 얼굴로 고개 숙인 채 울고 있는 장서열의 모습이었다.

“서열아, 왜 그래? 혹시 내가 뭘 잘못했어?”

장서열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며 억지로 짜낸 눈물을 훔쳤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을 든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구염락에게 웃어 보였다.

구염락의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 순간 만약 장서열이 황제를 죽이라고 했다면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행동에 옮겼을 것이다.

‘나의 서열이가 울다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서둘러 손을 뻗은 구염락이 장서열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다. 그러나 장서열이 눈을 감자 눈물은 더욱 무섭게 흘러내렸다.

눈물이 구염락의 손등을 적셨다. 그는 장서열을 품에 안아 위로하려 했지만 일순간 눈물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놀라 어색하게 손을 거두었다.

“난… 그러니까… 서열아,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장서열은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보기 좋은 그의 나체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전생에서 질리게 많이 보아온 몸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 내가… 다 내가…….”

장서열은 더욱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마치 크나큰 설움을 당한 사람처럼, 그녀를 알아주는 이의 품에서 그 설움을 다 씻어내려는 사람처럼 구슬프게 울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구염락이 몸에 남은 물기에도 아랑곳없이 아무렇게나 옷을 주워 입은 후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서열아, 울지 마… 네가 울면 내 마음이 아파. 너무 아파.”

정말 너무 아파.

구염락의 품에 안긴 장서열은 순간 깨달았다. 슬프게도 한때 깊이 사랑했던 그의 향기 대신 이제 산뜻한 박하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떨쳐낸 장서열은 목이 메일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을 쏟아낸 그녀가 울먹이며 힘없이 말했다.

“전 한 번도 궁에 들어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전하는 늘 저를 누이처럼 대해 주셨죠. 그런데… 폐하께서 저를 기어코 입궁시키려고 하셨어요. 저는…….”

그녀가 다시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구염락의 품에서 그녀는 마치 갈 곳을 잃은 아이처럼 굴었다.

구염락은 당황한 가운데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어깨에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이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주고 있었다. 그는 슬픔과 동시에 편안함을 느꼈다. 실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안정감이었다.

그간 자신의 어깨에 기댄 그녀가 자신을 의지하는 장면을 무수히 상상해 왔다. 구염락은 처음으로 자신이 성장했음을 느꼈다.

줄곧 원했으나 갖지 못했던 행복. 바로 이 행복을 위해 그녀는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의 품에 있어야 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을 빼앗아 온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이제 위선적인 황제가 죽고 백국이 멸망하기만 한다면 그가 장서열을 얻기 위해 꾸민 계략은 그대로 비밀에 붙여질 것이다. 그녀 역시 황제를 탓할 뿐 그를 탓하지는 못할 터였다.

장서열을 품에 안은 구염락은 잔인한 생각을 감추기 위해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덕분에 장서열은 숨을 쉬기 힘들었지만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전하, 저를 돌려보내 주세요. 전 사실…….”

장서열은 그날 사그라진 재처럼 서풍엽과 함께한 새벽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래서 저는 더더욱 이곳에 있을 수 없어요. 전하께서는 앞으로 많은 여인들을 곁에 두실 테고, 저보다 훨씬 나은 여인을 선택할 수 있어요.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 전하의 곁에 머물 자격이 없어요. 다만 옛정을 생각해서 부디 제가 부처님을 모실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말을 끝낸 장서열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무릎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구염락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나 이내 장서열의 팔을 끌어당긴 구염락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서열 누님은 내 것이다. 누님은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어!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 서풍엽은 나와 경쟁할 자격조차 없어!’

서풍엽과는 단 하루였다. 고작 하룻밤. 그러나 자신과 서열 누님에게는 앞으로 수많은 날들이 남아 있었다. 이는 자신의 여인조차 지키지 못한 무능력한 남자를 잊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구염락은 스스로를 설득하며 죽일 듯이 장서열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서풍엽에 대해 단 한 마디라도 더한다면 바로 그녀를 처단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살기였다.

장서열은 놀랐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누군들 미쳐 본 적이 없겠는가. 그녀 또한 한때 상아를 속인 그 쓰레기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능력 없는 태감 따위를 노려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특히 그 상대가 구염락이라면 더욱 그랬다.

‘할 수 있다면 나를 가둬 봐. 넌 날 탓할 자격도, 미워할 자격도 없어. 네 아버지가 날 억지로 입궁 시킨 것뿐 내가 자진해서 입궁한 것도 아니니까.’

황제를 속인 죄를 묻기엔 그녀는 황제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구염락이 장서열을 세게 품에 안았다. 그녀가 품에 안기는 순간, 구염락은 서풍엽을 죽이고 싶어졌다. 질투였다. 미치도록 질투가 났다. 서풍엽은 감히 자신의 귀한 보배를 건드렸다. 그는 자신의 것을 건드릴 자격이 없었다.

장서열이 몸을 떨었다. 얼음장 같은 그의 기세가 마치 그녀의 마음속을 뚫고 들어간 것처럼 온몸이 두렵고 서늘했다.

품에 안긴 장서열의 불안감을 느낀 구염락이 순간 힘을 빼고 간절하게 말했다.

“서열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그들이 나쁜 거야. 그들이 널 괴롭혔어.”

‘내가 모조리 죽여 버릴게. 그럼 더는 두려워하지 않겠지… 아무도 누님을 난처하게 만들지 못해!’

장서열은 만족했다. 애초에 구염락이 자신을 탓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멀쩡한 인생이 그의 가족들에 의해 망가지게 생긴 마당에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상황은 너무나 모순적이었다.

순간 장서열의 입술에 구염락의 감촉이 느껴졌다. 감출 수 없는 분노가 어린 입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장서열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입맞춤을 넘어 아예 그녀를 통째로 삼킬 듯한 기세였다. 앞으로 절대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누구도 그의 것을 건드릴 수 없었다.

구염락은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물론 그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보다도 장서열에게 경고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더는 멍청하게 굴지 마. 넌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고귀한 남자를 사랑해야 해.’

구염락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장서열이 서풍엽을 선택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녀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서풍엽을 떠올린 걸까.

입을 맞추던 구염락이 돌연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깨어져 유리 파편처럼 조각난 마음이 다시 한번 무참히 짓밟혔다. 이제는 주워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더러워진 기분이었다.

그의 서열 누님은 단 한 번도 그와 평생을 함께하려 했던 적이 없었다. 그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이고 비참한 일은 없었다.

어느덧 울음을 멈춘 구염락이 경건한 손길로 새 수건을 꺼내어 물이 담긴 나무통 속에 넣었다. 이어 그는 젖은 수건으로 조금 전 입을 맞춘 장서열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그녀에게 더러운 피를 묻힌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형제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매장시킬 궁리만 하는 비열한 자신에 의해 그녀가 더럽혀졌다.

그는 장서열과 함께할 자격이 없었다. 장서열이 자신과 같은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머리를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조용히 남소원에 있었다면, 혹은 일찍이 죽거나 누님을 빼앗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 결국 최악의 인간이 되어 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쓸모없는 존재였던 그는 결국 커서도 똑같이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자신은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도, 황제도, 이제는 서열 누님까지 자신을 싫어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며 그의 손에 들린 수건을 잡고 그를 쳐다보았다.

구염락의 동공은 풀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해 마지않던 그녀를 당장 죽이기라도 할 듯한 눈빛이었다.

장서열은 즉시 긴장했다. 지금 구염락은 마치 전생에서 우연히 보았던 그날 밤과 같았다. 그날 구염락은 총애하던 후궁을 생매장 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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