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언니, 왜 그래요? 혹시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날 비웃으면 안 돼요.”
만정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건 존경하는 서열 언니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었다.
장서열은 만정의 혜안을 인정했다. 구염락에게 반했다는 건 그녀가 남자를 보는 눈이 그리 낮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구염락이 아니었다.
“너 여동생이 한 명 있지?”
만정이 갑작스런 질문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요. 아, 서출 여동생이 하나 있어요. 정말 가여운 아이예요.”
만정의 안색이 침울하게 변했다.
“어머니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노비들까지 그 애를 괴롭혀서 혼자 방에서 울고 있었어요. 겨울이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손에 동상이 남아 있더라고요. 너무 가여워요.”
장서열이 다시 입을 여는 만정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만 부인께서도 알고 계시고?”
만정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만소를 괴롭혔던 노비들을 엄하게 처벌했어요. 다행히 지금은 만소도 한결 나아졌어요.”
“나아졌다니 앞으로는 그 애를 멀리해.”
만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작은 얼굴을 들었다.
“왜요?”
만정은 마침 만소를 친동생으로 삼으려던 참이었다.
장서열은 당장 만소가 못된 마음을 품고 있다거나, 혹은 일부러 편히 살기 위해 만정의 비위를 맞추는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입증할 수도, 무작정 잘못되었다 여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소는 상황이 역전된 뒤 만정에 대한 은혜를 저버렸다.
“생각해 봐. 넌 집안의 큰아가씨고 그 애와는 엄연히 신분이 달라. 네가 안쓰럽다고 한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결국 다른 동생들은 네가 편애한다고 불만을 갖게 될 거야. 그렇다면 만소는 앞으로도 계속해 너만 의지하게 될 테니 얼마나 외롭겠니.”
“…….”
“대신 네가 그 아이가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게 도와준다면 자연스레 가문의 규범에 따라 대접을 받게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자매들과 어울릴 수 있을 테고, 곁에 친구들도 생기겠지. 그게 너 한 사람과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어?”
만정은 서열 언니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소의 거처에 들르는 날이면 만소는 며칠간 더욱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만정은 앞으로 만소를 찾아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만소는 더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장서열은 만정이 말귀를 알아들은 듯하자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넌 후에 입궁할 수도 있잖아. 어머니가 익혀두라고 한 것은 다 익혔니? 자수나 예법은 다 배웠고? 궁은 바깥과 달라서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어. 내 생각에는 남편감으로 당자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만정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 당자 같은 인간은 싫어요. 언니는 모르죠? 당자는 며칠 전에 그런… 그런 곳에 출입했어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요. 예전에 그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고 말하는 게 민망할 정도라고요. 나이가 몇인데 온통 나쁜 습관만 들어서는…….”
장서열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나중에 타일러 볼게.”
즉시 생기를 되찾은 만정이 다시 평소처럼 조잘거렸다.
“세자에게 당자를 좀 때려 주라고 해요! 정말 꼴불견이에요. 연경에 집안 어른들이 안 계신다고 열심히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허구한 날 부끄러운 짓만 저지르고 다녀요. 연경에서 그를 건달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장서열도 무어라 답하기가 어려웠다.
당자는 치기 어린 마음에 유흥에 빠지기는 했지만, 결코 도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정이나 사람들의 눈에 그의 행동이 매우 부적절하고 구제불능으로 비춰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서열은 당자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으로 만정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궁에 들어갈 생각이야?”
만 상서(尚书, 만정의 아버지)는 초혜전에서 딸과 십삼황자가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는 걸 염두에 둔 듯했다. 함께 입궁하는 다른 이들보다 만정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서열은 이후에 펼쳐질 일들을 알고 있었다.
“난 네가 좀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궁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이야. 게다가 네 위에는 너를 억누르기 위해 필사적인 황후와 태후가 있을 거고. 그런 생활은 평범한 권문세가의 정실부인으로 사는 것만 못해. 차라리 말 안 듣는 어린 첩이나 혼쭐내면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게 훨씬 나아.”
만정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세자께 이를 거예요. 언니가 어린 첩을 혼쭐낼 예정이라고요.”
“나쁜 것, 그랬다간 너부터 혼쭐을 내줄 거야.”
돌연 두 사람의 뒤에서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가요? 해어 아가씨께서 지금 부인들을 위해 북춤을 춰 흥을 돋우려 하는데 마침 금 연주자가 부족해요. 해어 아가씨가 말하길, 서열 아가씨가 적임자일 거라며 특별히 제게 아가씨를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서열 아가씨께서 원치 않는다면야…….”
그녀가 경멸하는 시선으로 장서열의 손가락을 힐끔 바라보았다.
“관두시든지요. 해어 아가씨도 강요하진 않을 거예요.”
화가 난 만정이 심부름을 온 아이를 노려보았다. 병부상서 집안의 계집애였다.
‘위지 대사마의 뒤나 졸졸 쫓아다니는 졸개 집안 주제에!’
장서열은 순간 손을 올리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위지해어를 끌어내 곤장을 치고 싶었다. 아무래도 본때를 보여줘야 할 듯했다.
“금방 갈게요.”
병부상서의 딸이 입을 가린 채 풋 하고 웃었다.
“아니, 정말 가려고요? 해어 아가씨의 북춤은 제1교방(教坊, 음악, 무용 등을 관장하던 궁중 기관)에서 전수받은 거예요. 웬만한 금 연주 솜씨로는 따라가지 못할 텐데요. 괜히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자기 이름에 먹칠하지 말아요.”
“먹칠할 이름조차 없는 사람이 부지기수니까요.”
만정이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자 병부상서의 딸은 몹시 화가 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장서열! 얄미운 건 초혜전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지? 이제 십삼황자는 널 언급하지도 않는데, 뭘 그리 잘났다고 우쭐대는 거야!’
그녀는 후에 십삼황자가 태자가 되면 분명 그를 노예처럼 부리던 장서열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지금 십삼황자를 위해 대신 복수를 하는 셈이었다. 어쩌면 이 일을 전해 들은 열셋째 전하가 자신을 좋게 봐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의 얼굴에 패기 있는 홍조가 떠올랐다.
“허세부리지 마! 해어 아가씨는 이미 세 살 때부터 무용을 배웠고 특히 북춤에 가장 탁월해. 교방의 고고(姑姑)까지 해어 아가씨의 실력에 찬사를 보냈어. 세자의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거든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걸!”
말을 마친 그녀가 거만하게 뒤를 돌아 자리를 떠났다. 그녀를 무시한 채 몸을 돌린 장서열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 만정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보이니?”
실제로 그녀는 금기서화(琴棋书画, 금, 바둑, 서예, 그림 그리기와 같은 고상한 취미)나 시사가부(诗词歌赋, 시가와 운문) 중 어느 것 하나 능통하지 않는 게 없었다. 심지어 전부 예전부터 할 줄 알던 것들이었다.
만정은 물끄러미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서열 언니는 무척 아름다웠다. 피부가 희고 매끄러웠으며, 눈썹은 초승달처럼 어여뻤다. 그런 그녀가 긴 속눈썹을 깜박이며 말을 걸 때면 당장 심장이라도 꺼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지나친 미모가 그녀의 능력을 쉽게 간과하게 만드는 게 문제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애초에 그녀가 완벽하지 않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장서열은 사람을 사귀는 것도 싫어했다. 덕분에 과거 그녀가 선보인 궁술 실력은 시간이 지나자, 힘만 세지 머리는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벌인 소동으로 퇴색되어 있었다.
장서열이 쓴웃음을 지으며 만정의 작은 코를 콕콕 찔렀다. 그녀가 의기충만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좋아. 내가 진짜 실력이 무엇인지 보여 주지.”
“그래요! 역시 서열 언니가 최고예요.”
전원은 몹시 시끌벅적했다. 꽃과 비단이 어우러진 야외의 연회장은 교방에서 펼치는 가무와 온갖 산해진미가 한데 어우러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했다.
품계에 따라 자리에 앉은 남자들은 가무를 즐기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누구도 권력자와의 친분을 노리거나 아첨하려는 기색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의 시선은 가장 앞에 자리한 열셋째 황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수시로 십삼황자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감탄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냈다.
구염락은 과실주를 맛보며 서풍엽과 함께 앉아 있었다. 평온한 얼굴의 그는 표정을 바꾸지도, 주변 관원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다. 구염락은 향후 손 안에 쥐게 될 높은 자리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차를 마시던 서풍엽은 좌측에 앉아있는 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천천히 말했다.
“올해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자입니다. 글재주가 뛰어나 폐하께서 그를 한림(翰林, 황제의 문학 시중을 들거나 조정의 문서를 저술하고 황제의 언행을 기록하는 관직)으로 임명하셨지요. 황후께서도 무척 마음에 들어해 장공주를 시집보내려 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가 승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을 마친 서풍엽은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다시 돌아와 웃으며 옆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구염락 역시 술을 맛보며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열셋째는 가무에 흥미가 없는 것 같구나.”
구염락의 옆에 앉아 있는 십황자 구염단영(九炎端荣)은 황후의 사람으로, 구염락을 위시한 조정의 움직임에 큰 불만이 없었다.
기둥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법이다. 태자의 변고 당시 그를 지지하던 모두가 당황하여 갈팡질팡했다. 어렵사리 황제의 눈에 든 열셋째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황위와 멀어지지만 충분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길, 황위에 도전하는 대신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길. 십황자는 전자를 선택해 황제 다음가는 왕야(王爷)가 되길 기다렸다.
“열셋째, 심심하면 충왕부의 희극도 볼 만해. 듣자하니 연경에 있는 극단 전부를 합해도 충왕부의 규모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더군.”
흥미를 느낀 당자가 즉시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서열이가 그리도 희극 감상을 좋아하니 세자 형님이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형님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건 희자(戏子,연극배우) 양성에 소홀했다가 아직 시집오지 않은 부인에게 미움 받고 외면당하는 일일 걸요?”
당자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전부 서풍엽을 놀리며 웃었다. 야유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모두 비슷한 또래에 서풍엽과 친분이 있는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