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싸우려 하자 곁에 있던 이들이 얼른 나서서 상황을 중재했다.
“어머나, 여기가 정원이군요! 정말 아름다워요. 이렇게 화려한 색상의 꽃은 처음 봅니다.”
“왕비마마께서는 어쩜 이리 솜씨가 좋으세요. 꽃이 이렇게 예쁘게 피다니요. 집에 돌아가면 하인에게 충왕부를 보고 배우라고 해야겠어요.”
“화초에 있어서는 연경에서 황궁을 제외하면 충왕부가 제일이죠.”
부인들을 따라 시선을 옮긴 충왕비는 분명 위지해어가 일부러 장서열을 난감하게 만든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녀가 장서열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신경 쓰지 말고 이만 만정과 정자에 가서 놀거라. 우리 늙은 부인들만 따라다니지 말고.”
“왕비마마께서는 늙지 않으셨어요.”
“어서 가 봐. 너희 젊은이들끼리 재미있게 놀아야지. 위지해어는 멀리하거라. 다시는 널 귀찮게 굴지 못하게 해.”
“네.”
장서열이 자리를 떠나자 위지해어 역시 자리에서 물러 나왔다. 그녀가 장서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역시 만만치 않은 계집이었다. 저렇게 음흉한 아이가 서풍엽의 아내가 된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자신이 아끼는 여인이 얼마나 질투가 심한지 알려줄 테다!’
장서열은 자신을 노려보는 위지해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본 후 이내 자리를 떠났다.
전생에선 자신의 손에 죽어 나간 여인만 수십 명이었다. 심지어 시녀와 태감은 포함되지도 않은 숫자였다. 음흉하고 악독한 수법으로는 그녀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만약 구염락이 그토록 금용을 싸고돌지만 않았다면 금용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위지해어는 장서열이 참고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전생이었다면 장서열은 진작에 그녀를 산 속 깊숙이 묻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성질대로 거칠게 행동하는 건 남의 미움을 살 뿐이었다. 금용이나 장서영처럼 언제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부드럽게 굴고, 항상 괴롭힘을 당한 척해야 사랑 받는 법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서열은 문득 우울해졌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위지해어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앞으로 절대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할퀴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침착해지자. 명문가의 아가씨답게.’
어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여자아이들은 이미 삼삼오오 둘러앉아 놀고 있었다.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들은 시녀와 함께 시원한 정자에 들어가 있었고,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활짝 핀 꽃밭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원은 온통 새소리와 꽃향기, 그리고 미인으로 가득 찼다.
장서열을 잡아끈 만정이 한발 물러나서 긴장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무슨 일이에요? 억울한 일을 당한 거죠?”
웃으며 고개를 숙인 장서열이 아래에 놓인 무수한 꽃 더미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무더기로 활짝 핀 작은 꽃송이들은 경사스러운 연회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억울할 것까지야. 그냥 사람을 좀 귀찮게 하네.”
만정의 작은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그녀가 치를 떨며 말했다.
“제가 세자에게 알리겠어요! 위지해어를 혼내 주도록 말이에요.”
장서열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보 같은 동생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세자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녀와 접촉하는 시간이 많아 봐야 남의 입방아에나 오르내릴 테지. 정말로 둘 사이가 심상치 않은 것처럼 말이야.”
만정이 작은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그럼 어떡해요. 위지해어가 소란을 피우는데, 언니만 계속 당하고 있으면 억울하잖아요.”
“걱정하지 마. 계속 못되게 굴면 인생의 쓴맛을 보게 해줄 거야.”
만정은 그 말이 별로 미덥지 않았다.
“언니는 마음이 너무 여리고 관대해요. 언니에게 무슨 수가 있겠어요. 차라리 장 부인께 털어놓고 상의해 보는 게 어때요? 위지해어가 체면 같은 건 벗어 던지고 세자와 혼담을 논하기라도 하면 언니는 그녀를 첩으로 들이는 수밖에 없다고요.”
장서열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만정을 쳐다보았다.
“넌 세자가 첩을 들이는 게 싫어? 어차피 그녀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는 첩으로 들어올 텐데. 그녀가 첩으로 오는 것과 뭐가 달라?”
“다르죠! 언니가 세자를 위해 첩을 들이는 건 두 사람의 금슬이 좋다는 뜻이지만,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위지해어가 첩이 되는 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은 일이라고요. 언니의 체면도 구겨지고요.”
장서열이 만정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생각까지 할 줄 알다니 다 컸구나. 자, 그럼 이제 말해 봐. 만 부인께서는 네게 어떤 상대를 골라 주셨지?”
만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보통의 여자아이들처럼 그녀 역시 혼사와 관련된 일은 너무나 부끄러워했다. 장서열의 질문이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정말로 정해진 거야? 누군데?”
만정의 머리는 거의 가슴에 닿을 것 같았다. 새하얀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었다.
“자꾸 묻지 말아요.”
“네가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말해 봐, 내가 아는 사람이야?”
같은 시기, 전생에서 그녀는 만정과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정과 혼담이 오간 가문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만정이 입궁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어서 말해 보라니까. 아님 내가 만 부인께 직접 가서 여쭤 볼게.”
장서열이 곧장 만 부인에게 가려는 자세를 취하자 만정이 황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여전히 새빨갛게 물든 얼굴이었다. 그 모습은 작은 앵두 같아 퍽 사랑스러웠다.
“저도 몰래 엿들은 건데…….”
장서열이 눈을 깜빡이며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만정을 쳐다보았다. 만정이 손 안의 비단 손수건을 바라보며 모기처럼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제 나이가 어리니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만일 궁에… 그러니까, 열셋째 전하가 태… 태자가 되면, 저를 수녀(秀女, 심사 과정을 거쳐 입궁한 궁녀. 귀족 가문 여식을 궁에 보내는 제도로 선발되면 황후, 비빈이 되거나 가까운 종친과의 혼인이 결정된다) 선발에 보내신다고…….”
말을 마친 그녀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우물거렸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요! 만일 말하면 난… 난 언니랑 절교할 거예요!”
장서열이 놀란 눈으로 만정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를 좋아한 거야?”
그녀는 만정이 구염락을 사랑한 건 후궁이 된 이후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실은 이렇게나 일찍부터였다. 만정이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요. 언니를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는데 그가… 아니, 열셋째 전하가 저를 붙잡아줬어요.”
그의 단단한 팔은 안전하게 보호 받는 느낌을 줬다. 이를 떠올린 만정의 눈동자에 순간 애정이 가득 찼다.
장서열은 다시 한번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당시 만정이 구염락에게 잘해 준 건 그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라고만 여겼다.
만정은 부끄러웠지만 마침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에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그는 정말 멋지고 또 자상해요.”
만정은 그가 매번 장서열을 위해 물을 떠다 주고, 이상이 없는지 직접 마셔 보며 확인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마술도 훌륭하고, 또 그가 웃을 때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그리고… 그는 언니를 바라볼 때 마치 온 세상에 오직 언니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바라보죠.”
그 시절 만정은 자신이 장서열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장서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정, 네가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구염락이 맞아?”
그가 자상하고 따스한 사람이라니. 그녀는 만정이 처소에서 내내 그를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과연 지금과 똑같이 말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 넌 그를 알지 못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을 거야. 얼어붙은 네 마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테지. 네 처소 앞에는 하염없이 눈이 쌓여 가는데, 같은 시간 그는 다른 여인의 방에서 사랑을 속삭일 거야. 그를 사랑하는 건 뼈가 녹는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야……. 견딜 수 있겠니?’
장서열이 수줍게 웃는 만정을 바라보았다. 큰 눈과 긴 속눈썹에 달콤한 미소가 어렸다. 마치 아무런 걱정이 없는 아기 고양이 같았다.
‘이런 아이가 남자로 인해 아파해야 하다니.’
구염락은 어째서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만정을 총애하지 않았을까. 장서열은 안타까웠다. 그러나 들뜬 만정은 어두워진 그녀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언니, 그가 저를 좋아하게 될까요?”
만정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너무 시끄럽고 숙녀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조용히 지낼 걸 그랬어요.”
장서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잘 보이려 해도 소용없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네가 애지중지하던 그 여동생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현재 만정은 미래에 총애를 얻게 될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며 돌봐주고 있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서열은 순간 울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만소는 만정의 여동생으로, 본래의 이름은 ‘만소아(万素娥)’였다. 이는 ‘구름이 흩어지자 달빛이 기와를 비추네. 근심에 젖은 소아(素娥, 달에 사는 무희)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고 싶어 한다네(桂华流瓦,纤云散、耿耿素娥欲下)라는 시의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후 태자의 양제였던 범억아(范忆娥)의 이름에 같은 ‘娥(아)’ 자가 들어가 이름을 만소(万素)로 고친 것이었다.
만소는 현재 어머니를 여의고 계집종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을 터였다. 본래 정의로운 성격인 만정은 자연히 불쌍한 이복 여동생을 잘 보살피고 있을 것이며, 후에 정부인인 어머니께 만소를 자신과 동등한 딸로 받아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리하여 만소는 언니인 만정을 살뜰히 보필한다는 명분 아래 정부인의 딸인 적녀가 되어 만정과 함께 입궁할 것이고, 그리고…….
‘언니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까지 살뜰하게 보살피겠지.’
만정에게 지극정성을 쏟았다는 이유로 만소는 한동안 구염락에게 넘치는 총애를 받았다. 한 여인을 오래 총애하지 않았던 구염락의 여인들 중 만소는 그나마 긴 기록을 세운 여인이었다. 마치 만정의 친동생인 양 가식을 떨었던 만소는 능숙하게 시를 읊는 법도, 타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구염락은 높은 신분을 지닌 장서열 같은 여인에게는 혼자서 살아남으라는 듯 가차 없이 굴었지만, 만소 같이 출신이 비천한 여인은 돌봐 줘야 한다는 듯 보란 듯이 총애했다. 특히나 만소는 구염락이 총애할 만한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후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