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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8)화 (38/449)

제38화

“미쳤어? 돕긴 뭘 도와. 아무리 교육을 못 받았기로서니, 서열 누님의 앞길을 망칠 셈이냐? 누님은 이제 열 살이야. 다 큰 처녀라고! 그런데도 넌 종일 누님의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있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알아?”

“…….”

“여자아이들은 만정 외에는 아무도 누님과 놀려고 하지 않아. 이유가 뭐겠어? 너 때문에 서열 누님의 평판이 좋지 않기 때문이지. 어떤 애는 너희가 점심시간에… 아무튼 차마 하기 어려운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다고!”

장서열과 친분을 쌓게 된 당자는 이제 그녀를 위해 이 불량한 시종을 교육시키기로 했다.

“네가 정말 누님을 위하는 건지 아니면 해치려는 건지 모르겠군.”

구염락은 강하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는 자신이 누님에게 피해를 끼쳤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증오심만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험악한 얼굴로 당자를 노려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당자는 열셋째가 무섭지 않았다.

‘버림받은 주제에, 하찮은 녀석인 주제에!’

당자는 장서열이 열셋째의 버릇을 잘못 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굴하게 살던 과거를 잊고 감히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무례하게 굴고 있었다.

“뭘 노려 봐! 감히 이 몸의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던 주제에!”

“…….”

“왜, 이제 누님의 총애를 받으니 눈에 뵈는 게 없어? 똑똑히 들어. 네가 계속 떨어지지 않으면 누님은 더욱 곤란해질 뿐이야. 물론 넌 인정하기 싫겠지. 하지만 누님은 상야(相爷) 가문의 적녀야. 주변에 자신과 같은 명문가 자제들이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은 곁에 누가 있지? 너랑 만정, 그리고 세자 외에는 누구도 누님과 대화를 하려 하지 않잖아!”

구염락이 소리쳤다.

“내 잘못이 아니야!”

“물론 네 잘못은 아니겠지. 하지만 천하디 천한 너와 있으면 위신이 떨어지지!”

“그럼 너도 꺼져!”

구염락은 마음 속 깊이 사나운 파도가 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자를 때리고 싶었다. 당자의 말은 그를 불에 덴 사람처럼 초조하게 만들었다. 심연에 감춰진 공포심을 자극한 건 당자가 처음이었다. 죽어도 믿고 싶지 않았다.

‘누님은 내가 좋다고 했어. 나는 짐이 아니야!’

그는 장서열의 시중을 들 수 있었다. 다리를 두드리고, 부채도 부쳐주고, 우스갯소리도 할 수 있었으며 말도 끌어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천만에, 그들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들이야 말로 그녀에게 명백한 짐이었다.

감히 내게 욕을 해? 당자는 구염락을 한 대 패주고 싶었지만 서풍엽이 녀석을 봐주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일단 참기로 했다. 이런 작은 일도 참지 못하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는 사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장서열을 따랐으니 그녀에게 어린 도적놈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만일 그에게 미움을 산다면 장서열의 기분도 좋지 않을 테니 참아야 했다. 그러나 죽을죄는 면해 줬을지 몰라도 그를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었다.

‘감히 이 몸을 모욕하다니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왜 꺼져야 하지? 어디 켕기는 구석이라도 있냐, 이 도적놈아! 네가 하루하루 무릎이나 꿇고 살아야 하는 처지라는 걸 잊지 마라. 서열 누님이 널 원치 않으면 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니 너는 대들 자격도 없지.”

“…….”

“지금 이 몸은 누님의 친구야. 그러니까 빌어먹을 넌 누님을 모시는 것처럼 이 몸을 모셔야 해. 안 그러면 네 주인에게 폐를 끼치는 거라고. 저것 봐라.”

당자가 주인의 시중을 들러 가는 배독(陪读)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주인의 친구에게 무례하게 구는 거 본 적 있어? 하나같이 주인에게 충성하고 너보다 능력 있는 자들이지. 넌 내명부에서 살았으니 궁녀와 태감들이 수발드는 데 뛰어나다는 걸 잘 알 거야. 그런데 넌 할 줄 아는 게 뭐야.”

“…….”

“누님의 머리를 엉키게 한 적이 있지? 태감도 아니니 옷을 입혀줄 수 있을 리 없고, 할 줄 아는 요리가 있기는 해? 전복, 인삼, 상어 지느러미는 구경이나 해 봤어? 대두와 홍두는 구별할 줄 알고? 당연히 못 하겠지. 그러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동안 서열 누님의 시중을 들어온 거야? 게다가 감히 무신 가문 출신인 이 몸에게 대들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

“가! 가서 이 어르신에게 물이나 한잔 따라 와! 그러면 이 어르신이 네 잘못 정도는 덮어 주마!”

‘빌어먹을 녀석! 내가 얼마나 오래 참아 줬는데!’

당자는 대체 장서열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녀석을 가까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배독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널려 있었다.

기다란 살구빛 치마로 갈아입은 장서열이 문을 열었다. 동시에 맑은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얇은 비단을 춤추듯 날리게 했다. 그녀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들을 달랬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 방 안에서도 너희 목소리가 다 들릴 정도야. 어라?”

순간 미소를 거둔 장서열이 황급히 구염락에게 달려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열셋째, 왜 그래? 안색이 왜 이리 나빠?”

그녀의 한마디에 구염락은 순식간에 마음 속 불안이 사그라들었다. 그가 물기 가득한 눈동자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누님이 가장 아끼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봐! 서열 누님은 내 거야. 나에게만 관심을 주잖아. 누님은 나만의 것이야.’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위는 관심 없었다. 벌써 여러 해를 장서열과 보내 온 그였다. 그녀에게는 다른 이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배워 열심히 장서열의 시중을 들겠다고 다짐했다. 대두든 홍두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배워서 조만간 그것들을 모두 구분해낼 것이다.

“누님…….”

어미의 위안을 바라는 가련한 새끼처럼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기대고 있었다. 당자는 구염락을 망신줘서 쫓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동정심을 사려는 속셈을 눈치 챈 당자가 미리 선수를 치며 말했다.

“서열 누님은 정말 타인에게 상냥한 것 같아. 구염락이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던 건 다 누님 덕분이야. 그가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 같아 참 다행이군. 정말 충심이 깊은 꼬마라니까.”

“…….”

“누님을 기다리느라 녀석이 초조했나 봐. 계속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어. 내게도 녀석처럼 충정심 깊은 종복이 있다면 좋을 텐데.”

‘멍청한 녀석, 이 도련님은 연경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야. 재주 있으면 내 말을 고스란히 일러 보시지!’

구염락은 장서열을 등진 채 증오 가득한 눈으로 당자를 노려보았다.

‘귀찮은 파리 새끼가 계속 짜증나게 구는군. 어차피 서열 누님은 네 말에 관심 없어!’

마음이 요동쳤다. 구염락은 이를 악 물고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당자는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구염락은 당자의 눈에서 장서열과 가까이 하고픈 갈망을 보았다. 구염락은 자기도 모르게 장서열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그녀를 따른 뒤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혹시라도 그녀를 잃게 될까 두려운 공포는 그로 하여금 지난 날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그들과 같은 권력도, 뻔뻔함도 없었다.

‘만일 서열 누님을 빼앗긴다면…….’

구염락은 초조한 마음에 발을 굴렀다. 남소원에서는 이미 아무도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망할 녀석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그가 자신과 누님의 사이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떠나야 하지? 서열 누님은 내 것이야! 나의 것! 누님에게 잘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누님에겐 저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아!’

어떻게 해야 이들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지 궁리하며 구염락이 장서열의 손을 꽉 쥐었다.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지?’

구염락의 시선이 당자에게 향했다.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건 권력이었다. 권세가 필요하다. 그들보다 더 높고 강한 권력을 갖기만 한다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 구염락은 난생 처음으로 권력에 대한 절박한 소유욕을 느꼈다.

물론 당자는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설령 눈치챘다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태감이나 다름없는 열셋째 구염락과 맞서 봐야 자신의 평판만 떨어질 뿐이었다. 장서열이 아니었다면 그는 저 ‘꼬리 치는 개’ 같은 녀석과는 평생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자는 장서열을 붙잡고 있는 열셋째의 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다혈질 소년답게 물었다.

“열셋째, 너 올해 몇 살이냐?”

‘함부로 장서열의 팔을 잡다니! 남녀유별도 모르는 것이냐?’

“여덟 살.”

고개를 치켜든 구염락이 도전적인 시선으로 오만방자한 당자를 쳐다보았다.

‘또 막말해 보시지. 아까처럼 군다면 분명 서열 누님은 널 싫어하게 될 테니까!’

당자는 즉시 구염락의 의도를 알아챘다.

“다 컸군.”

그가 얼른 화제를 바꿔 나오는 대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마 녀석 꽤 잘생겼네. 이만 갈까? 곧 수업이 시작될 거야.”

자연스레 장서열의 옆으로 비집고 들어간 당자가 구염락을 저만치 시종의 자리로 떼어놓았다. 그러나 장서열은 반사적으로 열셋째를 한 발 앞으로 끌어당겨 자신들과 나란히 걷도록 했다.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는 절대 구염락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신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자는 별다른 내색 없이 학당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을 꺼내기 시작했지만 고집스러운 미간은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보여주었다. 장서열이 열셋째에게 이토록 큰 애정을 갖고 있다면 서풍엽이 이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가 됐다.

구염락의 득의양양한 시선이 당자에게 향했다. 그는 사소한 동작으로 당자의 질투심을 자극했다. 당자는 아예 구염락을 쳐다보지 않은 채 장서열과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점차 이 상황에 익숙해진 당자는 대장부라면 굽힐 때는 굽히고 숙일 때는 숙일 줄 알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타이르기에 이르렀다.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구염락은 무시당했다는 열등감에 더욱 장서열에게 기대어 걸었다.

문과(文课)는 정치가의 올바른 도리를 논하고, 예리한 언어와 유려한 문장을 통해 조국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서술하는 수업이었다. 문자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 주 대학사는 자신이 정립한 학설을 일만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이를 사랑하는 제자의 머릿속에 간절히 담아주고 싶어 했다.

구염락은 수업을 듣기 전 있었던 불쾌한 일은 잊고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잡념 없이 경건하게 수업을 경청하고자 했다. 그는 지식을 모두 흡수한 뒤 천천히 소화하여 자신만의 도리를 완성하려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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