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헌원가의 일이 우연이었든 누군가의 고의였든 사실 그녀에게는 개입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만일 구염락이 역사의 흐름대로 제위에 오른다면 미래 대주국은 강한 군사력을 토대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구염락과의 관계에 기대어 평안한 생을 보내게 될 터였다. 하지만 만약 구염락이 운 나쁘게 제위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그녀는 서풍엽의 비호 아래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또 한 번 얻은 생에서 큰 권력을 얻기보다는 평탄한 삶을 살고 싶었다. 지난 생의 원한은 대부분 갚아 주었다. 다만 금용이라면… 그녀가 좋은 운을 타고 난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장서열의 눈에 조소가 떠올랐다. 아직은 금용에게 인생의 쓴맛을 보여줄 때가 아니었다.
“그럼 부탁드려요, 오라버니.”
서풍엽이 그녀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바보야, 너 때문에 놀라 죽는 줄 알았구나.’
청산지주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여전히 꿇어앉은 채로 말했다.
“아… 아가씨…….”
장서열이 말했다.
“여기까지 직접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 그만 헌원 동생과 권 공자에게 가보세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앞으로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청산으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소인이…….”
화가 난 조옥언이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 입 다물라! 상부의 여식이 어찌 네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소인이 말주변이 없어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분수를 잊고 금기를 범하다니!’
그때, 바깥에서 성큼성큼 뜰을 가로질러 오는 소리가 들렸다. 장신성이 크게 외쳤다.
“서열이는 무사하오?”
그는 딸이 어찌되었든 울다 지친 조옥언의 눈이 아예 멀어버리기만 바랐다.
* * *
조정은 이번 ‘낙마 사건’으로 몸살을 앓았다. 문무 관원이 서로 다툼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으나, 사망자가 없었고 아이들의 일이었기에 며칠 후 소란은 가라앉았다.
한편 세가의 자녀들은 장서열의 기마술을 찬양하느라 바빴다. 그녀가 쏜 화살이 천 리를 날아갔고 마치 바람처럼 말을 몰아 질주를 했다는 등 소문이 크게 부풀려졌다. 덕분에 어른들은 아이들이 진정한 기마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과장하는 것이라며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정작 소문의 당사자인 장서열은 몸조리를 위해 한 달이 되도록 집 밖을 나서지 못했다.
한 달 뒤, 장서열은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 가벼운 찰과상으로 한 달이나 갇혀 지내야 했던 그녀는 이른 아침의 햇살을 바라보며 새삼 격세지감을 느꼈다. 보기 좋게 살이 올라 부드러워진 얼굴을 톡톡 두드리던 그녀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 학당으로 향했다.
구염락은 한 달 내내 오늘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샛길의 귀퉁이에서 상부의 마차가 나타나자 그가 나는 듯이 뛰어가 소리쳤다.
“누님! 서열 누님!”
순찰을 돌던 시위들은 그를 피해 멀찍이 길을 돌아갔다. 평소 염라대왕이 울고 갈 정도로 무자비한 그가 저런 애틋한 목소리를 낼 줄 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길 위에 선 수많은 마차들의 휘장이 열렸다. 열셋째가 있는 쪽의 마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복잡했다. 구염락은 줄곧 마차를 따라 초혜전까지 뛰었다. 그의 두 눈은 별처럼 빛났으며 동작은 토끼처럼 날렵했다. 마침내 그가 마차에서 내리려는 장서열을 와락 껴안으며 기쁘게 빙빙 돌았다.
“서열 누님, 드디어 왔군요!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현기증이 난 장서열이 구염락의 어깨를 꽉 붙잡고 놀라서 외쳤다.
“어서 내려 줘!”
마침 근처에 있던 당자가 그녀의 목소리에 걸어 나왔다. 감청색 옷이 햇빛 아래 번쩍번쩍 빛났다. 당자가 손에 든 채찍으로 순식간에 구염락을 진정시킨 뒤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누님이 놀라잖아.”
그동안 당자는 열심히 기마술을 단련했다. 그러나 견문을 넓히고 배울수록 그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헌원가를 구했던 장서열의 기마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만 깨닫게 될 뿐이었다.
창백해진 장서열이 구염락을 잡고 숨을 헐떡였다. 햇볕 없이 거의 한 달간 침대에 누워만 있었기에 갑자기 빙빙 돌자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구염락이 미안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그가 물결에 비친 햇살처럼 환한 얼굴로 자신의 서열 누님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당자가 손을 뻗어 그녀를 구염락에게서 떼어 냈다. 그리고 거만한 얼굴로 열셋째를 쳐다보았다.
“넌 볼일 없으니 저리 꺼져.”
구염락은 순간 마음이 조여오는 듯했다. 그동안 느꼈던 위기감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당자를 쏘아보는 새까만 두 눈동자에는 증오와 살기가 가득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장서열이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당자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 거야?”
초혜전은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로 북적였다. 장서열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문 밖의 그녀에게 복잡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에 대한 평판은 한 달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장서열의 활약을 직접 목격한 아이들은 그녀의 곁을 지나가다가 마치 다른 곳을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접근하는 당자의 배짱에 속으로 탄복했다.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구염락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떠도는 소문을 주워들은 아이들은 장서열에게 흥미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와 친분이 없으므로 그저 아쉬운 눈길로 곁을 지나치다가 다시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뒤돌아볼 뿐이었다. 웬일인지 당자는 줄곧 장서열의 곁에 있었다.
그들은 당자가 장서열의 곁에서 ‘바보스러움’을 옮아오지는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했다.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역겨운 열셋째 구염락까지 있었다. 여자아이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당자에게로 다가가 평판이 나빠질 수 있으니 그녀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귀띔해 주었다. 당자의 미간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시끄러워!”
당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다른 꿍꿍이를 품은 듯한 멍청한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보긴 뭘 봐! 배짱이 있으면 와서 말이라도 걸어 보든지!’
당자는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역시 장서열에게 감히 알은 척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냉담한 성격을 지닌 그녀에게 말을 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자는 지난 한 달을 꼬박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녀에게 말을 붙일 핑계를 찾을 수 있었다.
“죽은 말에 대해 할 말이 있어.”
그날 장서열의 활약을 떠올리면 당자는 평소 우습게 생각했던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경외심까지 느껴졌다. 그는 그녀에 대한 소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대체 어떻게 ‘그 일’을 해낸 건지가 알고 싶었다.
그는 그날 보았던 기마술을 수도 없이 연습했지만 그녀가 보여준 속도는 따라갈 수 없었다. 어쩌다 간신히 속도를 맞춘다고 해도 그녀처럼 정확하게 활을 쏠 수가 없었다.
“말?”
그 말에 구염락은 돌연 장서열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줄곧 느껴온 불안이 점점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는 아예 장서열의 몸에 딱 달라붙고 싶었다.
그간 그녀에게 차마 말도 붙이지 못했던 이들이 얼마 전부터 자꾸만 그녀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그들의 친구라도 되는 듯 하나같이 태도가 기이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구염락은 몹시 불안했다. 이제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보다 뛰어난 이들이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장서열은 구염락을 달래듯 그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팔을 껴안고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를 몹시 총애하는 모습이었다.
“말 한 필을 변상해 줄게.”
마치 잘 알고 지내던 사람과 대화하듯 장서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당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열셋째를 흘겨보았다.
“네가 매미야? 왜 그렇게 매일같이 딱 붙어 있는 거야!”
구염락을 타박한 당자가 장서열에게 말했다.
“변상하지 않아도 돼. 난 누님이 내게 기마술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장서열은 당자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구염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한 달 사이 꼬마 녀석의 키가 큰 것 같았다. 머리에 손이 닿을 듯 말 듯했다.
“너도 알겠지만 섭 사부의 기마술은 최고야.”
말을 마친 장서열은 당자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눈짓했다.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오늘은 참 이상했다.
당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장서열의 뒤를 따랐다. 그는 역시 이 방법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냉담하고 거만한 겉모습과 달리 친해지기 쉬운 사람이었다. 지난 한 달간 열셋째 도적놈을 찾아가 그녀에 대한 정보를 모았던 것이 효과가 있었다.
“누님이 내 말을 죽였잖아. 나는 그 말과 매우 각별했어. 말이 꿈에 나타나 말하길, 내게 기마술을 가르쳐주면 누님을 용서해 주겠대.”
그를 힐끗 쳐다본 장서열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당자다웠다. 연경의 호걸이었던 그는 말재주가 뛰어나 능숙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말에서 떨어지는 게 두렵지 않다면 가르쳐 줄게.”
당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간단히 응할 거라 생각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는 거절을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준비해 왔고, 심지어 그중에는 말의 뼛가루를 보여주는 일까지 있었다.
“왜, 싫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은 당자가 흥분한 채로 그녀를 따라갔다. 아이는 아이였다. 훌륭한 인물이 기꺼이 자신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자 경계심을 완전히 푼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더라! 어떻게 연습한 거야? 다친 곳은 다 나았어? 이제 안 아파? 근데 누님이 몇 살이지? 어쩜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많아? 정말 멋졌어! 형님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했는데 믿지 않았어. 누님은 모르겠지만…….”
당자는 거의 시조(始祖, 가계의 처음이 되는 조상)의 내력까지 읊을 기세로 한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마치 장서열과 알고 지낸 지 몇백 년은 된 사람 같았다. 심지어 그는 말을 잇느라 장서열이 가는 곳이 정전(正殿) 방향이 아니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그만 입을 다물라고 해야만 했다. 쉼터 앞에 도착한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구염락의 팔을 빼냈다.
“잠시 들어갔다 올게.”
그가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장서열은 소매는 물론 머리까지 흐트러진 채였다. 그녀의 말에 구염락은 반사적으로 그 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내가 도와줄게.”
“괜찮아.”
당자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구염락이 너무 싫었다. 그가 구염락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눈치 없는 녀석을 참아준 지 오래였다. 문이 닫히자 당자가 짜증스런 얼굴로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장서열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당자는 질투심이 일었다. 할 수만 있다면 구염락을 발로 한 대 걷어차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