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해가 지자 궁궐 곳곳에 등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넓디넓은 궁에 밝은 불이 비치는 곳은 제한적이었다. 황제에게 잊혀진 곳은 깜깜한 암흑이었다. 주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일찍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보초를 서는 이가 없는 곳의 궁인들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자들은 침대에 누워 달을 보았고, 사이가 좋은 궁인들은 서로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침대에 누운 구염락은 칠흑 같은 벽을 바라보다 지나가는 쥐를 발견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는 세 번째 쥐를 본 후 결국 일어나 쥐를 잡아 죽였다. 그가 마침내 깊은 숨을 내뱉었다. 줄곧 거슬렸던 부족한 느낌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구염락은 침대에서 내려와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 저군전 쪽으로 잠행을 나갔다.
‘설서라고 했던가.’
저군전 숲에 숨어든 구염락은 일등 궁녀의 처소가 어디일지 가늠해 보았다.
달빛이 은밀하게 내려앉았다. 어두운 궁에는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나간 세월을 보여주듯 부서진 건물은 수리되지 않은 채 잡초가 가득 자라 휘황찬란한 궁의 위용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끔 이곳을 찾는 건 악몽에서 깬 궁녀들이었는데, 그녀들은 이곳에서 몰래 기도를 올리다가 다시 황망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곤 했다.
방치된 정원에는 정자 누각과 연못 등이 마치 주인이 있을 때의 영광스러운 나날을 보여주듯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은 선황제의 애첩이 묻힌 곳으로, 그녀의 사인(死因)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슬픈 전설과 누구도 찾지 않는 황량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둠을 파고드는 까마귀 소리는 사람을 더욱 두렵게 했다. 의식을 잃은 이는 화초가 가장 예쁘게 자란 곳에 던져졌다. 근처에 앉아 밤하늘의 달을 바라본 구염락이 차가운 공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어디선가 초원의 풀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방문을 열자마자 밝은 햇빛이 쏟아졌다. 구염락이 가장 싫어하는 날씨였다. 모두에게 공평한 세상이 아닌 주제에 누구에게나 따스한 척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제일 구역질이 나는 건 오늘이 쉬는 날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젯밤 저군전에서 벌어진 사건을 듣고 돌아오던 곽 공공은 정원에 서있는 음울한 얼굴의 구염락을 보자 순간 놀라 빠르게 몸을 피했다. 구염락은 귀찮다는 듯 발밑의 화분을 퍽 걷어찼다.
담장 밖에서 아첨을 담은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손 공공이 우아하게 난화지(兰花指, 엄지와 중지를 구부리고 나머지 손가락은 편 동작)를 짚으며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따스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열셋째, 이리 와 보거라. 오늘 포고(布库, 팀원을 등에 업은 두 사람이 바닥에 그린 원 안에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등에 업은 사람을 끌어내리거나 원 밖으로 밀어내어 승부를 가르는 놀이)를 한다는 구나. 네 녀석이 좋아하는 놀이지?”
* * *
초 마마(嚒嚒)는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장서열의 단장을 마친 뒤 그녀를 정원(正院)으로 이끌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녀가 초 마마에게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오라버니가 돌아왔나? 숙부께서 오 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초 마마는 갈수록 고와지는 장서열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좋은 일이 있지요. 하지만 저는 말하지 않을 거예요. 부인께서 알려주실 거랍니다.”
말을 마친 초 마마는 더욱 싱글벙글한 얼굴이 되었다. 장서열은 이를 통해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딱히 좋은 일일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헌원상을 만난 이후로 줄곧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조옥언은 일찍부터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딸을 태자비로 만들려는 장신성의 속셈을 알아챈 뒤부터 조옥언은 모든 신경을 딸에게 기울였고, 마침내 딸이 교활한 아비의 계략에 휘둘리지 않게 되어 무척 기뻐했다.
조옥언은 웃음을 머금고 딸이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딸은 피부가 곱고 자태가 아름다우며 영민했다. 비록 금(琴)과 바둑, 서예와 그림에 정통하지는 않았지만 천 명 중 하나 나올 법한 훌륭한 규수였고, 유년 시절의 자신보다도 더욱 침착하고 신중했다. 딸의 고운 모습에 조옥언은 많은 위안을 얻었다.
‘그래, 무슨 걱정인가. 딸아이는 어떤 남자와 혼인해도 귀한 대접을 받을 거야.’
딸은 성격이 곧지만 고집스럽지 않았고, 도도하지만 거만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이리 어여쁘고 영민하니 어떤 가문에서 맞이한들 복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충왕비 장소접(庄小蝶, 서풍엽의 어머니)은 서풍엽의 통방(通房, 첩을 겸하는 하녀)을 일부러 우락부락한 여인 두 명을 뽑아 지정했다. 딸은 그러한 배려를 받아 마땅했다.
조옥언은 순종적이고 일찍 철이 든 딸이 혼인 후 많은 일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져 마음이 아파왔다. 장서열은 그런 어머니의 눈빛이 겸연쩍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른 모습의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조심스러웠다. 조옥언은 딸이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해 그녀를 옆자리로 불렀다. 조옥언은 장래에 한 가문의 주인이 될 딸에게 집안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서열아, 너도 들었겠지만 충왕비가 풍엽이 들일 통방을 먼저 내게로 보내 만나 보게 했단다. 시댁에서 진정으로 너를 배려하는 것 같구나. 허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굴어서는 아니 된다.”
장서열은 놀랐지만 웃는 초 마마의 모습을 보며 좋은 일이구나 짐작했다. 실제로 충왕비는 그녀에게 매우 잘해 주었고, 매년 선물을 보내왔다. 덕분에 장서열의 창고는 충왕부에서 보낸 ‘작은’ 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옥언은 계속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제 아파(牙婆, 인신매매를 업으로 하던 여자)를 불러 네가 시집갈 때 데려갈 계집들을 사 두었단다. 너도 와서 한번 보거라. 지금부터 천천히 교육시켜 장래에 너에게 쓸모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두도록 해라.”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계집들의 역할은 불을 보듯 훤했다. 어머니는 충왕부에서 보여준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자태가 고운 아이들을 길러 함께 보내려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교육 시킨다면 후에 그녀가 혼인을 할 때쯤엔 충분히 성숙해질 것이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물론 그녀도 언젠가는 혼인을 하게 될 것이며, 이와 같이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일들을 겪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서풍엽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떤 유형을 싫어하는지만 들어봤을 뿐이었다.
누구나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딱히 질투심이랄 게 없었다. 만약 그녀가 저잣거리의 한낱 부녀자였다면 남편을 독차지할 것인지, 혹은 남편을 위하여 첩을 들일 것인지를 두고 망설였겠으나 그녀는 일개 평범한 부녀자가 아닌 존귀한 상부의 딸이었다.
지난 생에서도 그녀는 그저 구염락이 황후인 자신의 체면을 고려해 금용이 너무 날뛰지 않게만 해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먼저 장서열의 한계를 무너뜨렸고, 결국 그녀가 끝끝내 반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물론 장서열 또한 부인 이외의 첩을 들이지 않는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저 남편이 부인을 존중한다는 사실이 부러웠을 뿐,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일평생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딸이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라지 않는 어머니라면 세상 물정과 맞지 않는 관념을 주입시킬 리 없었다. 그저 마음 편히 남편을 잘 구슬러 부부가 서로 존중하며 사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길이었다. 첩을 총애하고 처를 멸시하는 건 뿌리부터 썩은 남자로, 그런 작자와는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사시(巳时, 오전 9시) 일각(一刻), 황공한 표정으로 나타난 아파가 아홉 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서른 명쯤 데려와 상부 후원에 무릎 꿇렸다. 부인과 아가씨께 인사를 올린 아파는 차마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지체 높은 부인들이 눈여겨보았다는 여자아이들의 내력을 읊기 시작했다.
어머니 곁에 선 장서열의 시선이 두 번째 줄 왼편에 자리한 여자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는 단연 돋보이는 외모로 수척한 아이들 사이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다만 눈빛에 너무 겁이 많아 여자아이라면 응당 필요한 총기가 부족해 보였다. 장서열은 어머니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잠시 머물다 이내 실망하여 곧 또 다른 빼어난 아이를 찾아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아파는 군말 없이 아이들의 내력과 재주를 소개했다. 장서열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이들을 한 차례 훑어본 조옥언의 시선이 다시 겁먹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사방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아파는 말솜씨를 뽐내기는커녕 함부로 입을 놀리지도 못했다. 상부에서 계집종을 고르고 있는 이유를 생각하면 더더욱 몸을 사려야 했다.
조옥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미색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마마(嚒嚒)들이 잘 가르치기만 한다면야…….
“저 아이는?”
잠시 뒤 조옥언이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녀는 계집종의 미색이 너무 뛰어나 후에 주인과 문제를 일으키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친정에서 데리고 간 몸종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여인이라면 어차피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부인께 아룁니다. 저 아이의 이름은 완정(완정婉婷)이라고 합니다. 노파가 동업자에게서 데리고 온 아이인데, 그때 저 아이는 너무 맞아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갖은 방법을 동원해 겨우 살려 놓았지요. 솔직히 말해 제가 무슨 좋은 일을 하자고 데려온 것은 아니옵고, 보시다시피 저 아이는 용모가 상당히… 그래서 사온 겁니다.”
첩으로 판다 해도 본전은 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예상 외로 아이가 부지런하고 더러운 허드렛일도 나서서 잘합니다. 다만 성격이 조금…….”
말꼬리를 흐린 아파의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조옥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들 중 몇 명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완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서열은 기분 좋게 이마 앞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올렸다.
‘드디어 만났구나.’
완정은 결점이 없던 아이였다. 주어진 삶에 만족할 줄 알았고 눈치를 살피는 데 능했다. 완정은 고생 끝에 얻은 기회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았기에 최선을 다해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그런 완정이 단 한 번 독단적인 선택을 내린 적이 있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회유하기 위해 완정과 농교 중 한 명을 보내려 했을 때였다. 이를 눈치 챈 완정은 그녀보다 한 발 앞서 소리자와 함께 하는 것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