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범억아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녀와 장서열 사이에 우애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만약 장서열이 태자와 혼인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서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혼인이라도 하는 날에는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 될 터였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체면치레도 없을 것이다.
구염락은 장서열을 위해 묵묵히 먹을 갈았다. 그는 범억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범억아는 더 이상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자가 전달한 선물이 있기에 그녀는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경멸에 찬 눈으로 장서열을 쳐다볼 뿐이었다. 순간, 범억아가 뭐라 말을 뱉기도 전에 구염락이 탁자에 있는 벼루를 들어 그녀를 향해 내던졌다.
‘누님을 한 번만 더 노려보거라!’
순식간에 달려 나온 네다섯 명의 노비가 온몸에 먹물을 뒤집어쓰며 주인을 보호했다. 설서는 엉망진창이 된 몸을 보며 분노에 가득 차 구염락을 가리켰다.
“무엄하다! 감히 양제의 몸에 손을 대다니! 여봐라!”
방문이 열리고 예닐곱 명의 태감들이 몰려들었다.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바람에 만정은 뒤쪽으로 밀려났다. 범억아는 그제야 초혜전의 사람들이 전부 장서열을 위해 배치된 눈과 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제께서는 장서열을 이토록 총애하시면서 어째서 후궁으로 들이지 않으시고 내 머리만 아프게 하시는가!’
물론 혼자 생각에 그칠 뿐이었다. 장서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구염락, 성질하고는……. 그래도 큰 문제는 없겠지.’
장서열이 설서에게 외쳤다.
“감히 어디서 소리를 지르느냐! 열셋째 전하께서 양제와 장난을 친 것뿐이다.”
범억아는 분노했다.
‘뭐라고? 장난을 친 거라고!’
장서열은 범억아를 무시한 채 계속해 말했다.
“범 양제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양제께 예를 갖추지 않는 것 같군요. 설서는 욕심이 많아 더 좋은 것을 품고자 하니, 이 사실을 궁 전체에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겠지요. 이곳에서 받은 설움으로 과연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것인지…….”
설서는 황급히 주인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양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주인이 걱정되어 나선 겁니다! 저는 저 분께서 열셋째 전하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양제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는 정말로 주인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장서열의 말에 모욕을 당한 범억아는 이를 앙갚음 하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장서열, 어린 나이에 벌써 이간질을 하다니! 너 같은 걸 어찌 후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태자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웠던 범억아는 다시 한번 터져 나오는 화를 삼켰다.
“일어나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어디서 눈물을 보이느냐! 못난 것!”
설서가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범억아는 열셋째에게도 이를 갈았다.
“감사합니다, 양제. 감사합니다…….”
울면서 바닥에서 일어난 설서는 점점 마음속에 두려움이 싹트는 걸 느꼈다. 목숨은 건졌지만 앞으로 자신과 양제 사이에는 분명 거리가 생길 터였다.
‘어렵사리 일등 궁녀로 승진했는데, 벼루 하나에 그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다니!’
설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악독한 눈빛으로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구염락이 그녀를 비웃었다
‘노려 봐? 그래, 실컷 노려 보거라.’
장서열이 위엄 있는 손짓으로 모든 이들을 물렸다.
“열셋째 전하께서 계집종과 장난을 친 것뿐인데 어찌 그리 소란을 피우느냐.”
장서열의 말에 구염락은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먹을 갈았고 태감들은 겁에 질려 답을 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들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한편 태감들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태자의 양제와 다투고 있지 않았나?’
‘지금은 왜 계집종을 상대로 싸우는 거지?’
‘도대체 누구와 싸우는 거야?’
그러나 누구도 입을 떼지 못한 채 모두들 공손히 인사를 하고 떠났다. 문 밖에선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소년이 지나가다 자리에 멈춰 선 채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초혜전을 통틀어 제일 문제가 많은 건 역시 장서열이었다.
체면이 다 구겨진 범억아는 이곳에 더 머물다가는 왠지 더 큰 모욕을 당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체면보다도 우승(右丞, 관직 이름)의 일맥인 범 씨 가문이 좌상의 딸에게 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친정은 그녀의 근본이었다. 범억아는 차라리 아이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장서열의 저 도도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여봐라! 가져온 선물을 여기 아가씨께 전해라! 뚜껑을 잘 덮어 아가씨의 눈이 멀지 않게 조심하고!”
말을 끝낸 범억아는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버렸다. 말한 대로 선물은 전달했으니 이곳에 남아 모욕당하는 취미 따위는 기르지 않으리라.
‘장서열, 날 그렇게나 업신여기다니! 구염락 저것은 또 무슨 물건이기에 감히 내게 손을 댄단 말인가! 가만 두지 않겠다!’
구염락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장서열은 범억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녀가 구석에 서있던 만정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그녀의 얼굴에 편안하고 따스한 미소가 묻어나왔다.
“왜 이제야 왔어. 오늘은 너보다 나비를 더 많이 잡을 거야.”
그녀가 열셋째에게 말했다.
“이 선물들은 네게 줄게. 그럼 이제 놀러 나가자.”
‘역시 서열 언니가 최고야!’
만정은 즐거운 표정으로 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이길 텐데요? 그럼… 열셋째 오라버니는?”
“곧 따라올 거야.”
꼬맹이가 벌써 열셋째를 챙길 줄도 알다니. 하지만 전생에서 구염락은 세도가의 완벽한 여인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출신을 의식한 탓에 그보다 좋은 것들은 모두 배척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금용에게 그리 높은 자리를 주었겠는가.
장서열은 속으로 구염락을 멸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구염락과 만정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녀가 냉궁에 들어가자 만정은 죽음으로 애원했다. 아이는 아마도 다른 이의 손에서 자랐을 것이다.
어차피 다 전생에서의 일이었다. 지금 그녀들에게는 구염락과 함께할 시간이 많았고, 따라서 장서열은 그의 앞에서 항상 찬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정리하면 나와서 같이 놀자.”
“네.”
구염락은 순순히 답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모래주머니 던지기 같은 게 뭐가 재미있다고.’
사실 나비 잡기는 더욱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만정은 항상 이 두 가지 놀이만을 고집했고, 장서열은 만정이 마음대로 하게 뒀다. 정말 귀찮았다. 구염락은 만정이 아파서 학당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아이들은 학당이 마치는 시간을 좋아했지만 구염락은 이 시간에 지는 태양이 늘 거슬렸다. 그는 장서열과 함께 떠나는 서풍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언제나 넓은 궁에 홀로 남았다. 그녀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그는 궁을 나갈 수가 없었다. 만약 마차에 몰래 숨어 있는다 해도 금방 잡히고 말 것이다. 그는 외로웠다.
‘매일 낮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염락은 석양을 밟으며 기운 없이 남소원으로 돌아왔다. 금용과 소리자는 정원을 가득 채운 선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운 구슬이네요!”
“진짜 호랑이 가죽이네! 와, 옷으로 만들면 따뜻하겠어요!”
곽 공공은 창문을 통해 정원에 쌓인 선물을 보며 쓰린 마음을 부여잡았다. 모두 자신의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구염락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 존재에 곽 공공은 방에 숨어서 차마 나오지 못했다.
어린 금용은 그녀와 같은 높이의 상자 옆에 서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고와요. 반짝반짝 빛이 나네.”
그녀는 깨끗하게 빤 하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동상이 치유되지 않은 열 손가락은 모두 빨갛게 부어 있었다. 비록 마른 몸에 누런 피부를 갖고 있었지만 타고난 용모 덕분에 치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소리자는 토끼 가죽을 한 장 꺼내 즐거운 목소리로 금용의 몸에 갖다 대며 말했다.
“이 토끼 가죽이 정말 좋아 보여. 이렇게 긴 토끼털은 처음 봐! 이걸로 네 조끼를 만들어 줄게. 어때?”
금용이 부드러운 토끼털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전하, 저희에게 상으로 주실 건가요?”
소리자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하지, 전하께서는 좋은 물건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적이 없는걸!”
말을 마친 소리자는 상자 가득 들어있는 가죽을 고르며 최상품은 구염락의 것으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금용의 옷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는 금용이 가죽 털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용은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구슬들은 분명 주인님이 쓰지 않을 테니 내가 갖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정말 곱다.’
상자 속 물건들을 확인하며 그녀는 끊임없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구슬들도 상감해서 장신구에 넣으면 예뻐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커다란 옥석 하나는 사황자가 모자에 달고 다니는 것보다도 더욱 컸다. 예전에 그녀가 받은 비단에서는 모두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여기에선 꽃향기가 났다. 여자아이의 팔에 걸치는 겉옷에는 마치 수천 송이의 꽃이 수놓아진 듯했다.
두 사람이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을 때, 평소 입던 헝겊 조각으로 옷을 갈아입은 구염락이 삽을 들고 나와 널찍한 곳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를 본 소리자가 손에 든 모든 물건을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전하, 구덩이는 왜 파십니까?”
‘우리는 저장할 겨울 식량도 없는데…….’
구염락은 벌써 작은 구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상자를 묻으려고.”
모두 서열 누님이 자신에게 준 것이었다. 그녀가 준 것은 잘 보관해야 한다. 소리자와 금용은 얼이 빠졌다.
‘이렇게 좋은 물건들을… 쓰지 않고 땅에 묻는다고?’
구염락은 하인들의 안타까움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열심히 구덩이를 팠다.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리자는 가죽조끼가 없어지면 자신보다도 금용이 더욱 슬퍼할 것을 알기에 용기를 내 주인에게 물었다.
“왜 묻으십니까? 사용하지 않으시려고요?”
“사용한다고? 지금은 다 못 쓸 테니까.”
‘그러니까 묻어 두고 천천히 사용해야지.’
구염락은 결코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장서열의 선물을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소리자는 더 이상 묻지 못한 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금용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소리자는 앞으로 심부름을 많이 하여 겨울쯤 금용에게 면으로 된 조끼를 하나 사주자 다짐했다. 소리자가 삽을 들고 구염락에게 다가갔다.
“제가 돕겠습니다.”
앞으로 몇 년 정도는 주인에게 무엇을 입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