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53화 (53/75)
  • 17. 또 속는 바보는 (2)

    문이 열리고 서영은 태욱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안녕하세요. 지선이 말한 그 간단한 인사가 지금은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태욱은 성큼 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덜컹,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서영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에 잠깐 그의 입가에 어이없는 미소가 비쳤다.

    “누가 보면…… 내가 잘못 들어온 줄 알겠습니다.”

    태연하게 걸어 들어온 태욱은 슈트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쳐 놓았다. 이럴 수도 있는 거구나. 서영은 그동안 자신이 반응한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 이별이 뭐라고. 그녀는 처음일지라도 그는 숱하게 경험했을지도 몰랐다. 남녀 사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업무에 있어서도 미련 없이 털고 돌아서서 자신의 일을 해야 하는 게 그의 자리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는 아직까지 얼어 있는 서영에게 깍듯한 존댓말로 물었다.

    “아……. 변호사님이 이거, 가방 전해 달라고 부탁하셔서요. 지금 대리님이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가셨거든요.”

    그녀의 설명에도 태욱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래, 그에게 무엇이 중요할까 싶었다. 서영은 덧붙여 말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허락 없이…… 들어온 건 죄송합니다. 벨을 눌렀는데 답이 없어서. 그냥 가방만 두고 가려고 했습니다.”

    마치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 같아 우습기도 했지만 그게 그녀였다. 이 사람과 이별을 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지금 하나씩 경험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존댓말. 냉정한 눈빛. 무신경한 행동들을 통해서 거리감을 파악했다. 눈치 없이 통증을 일으키는 가슴은 모른 척하는 게 맞았다.

    “그럼, 쉬세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스르륵 다리의 힘이 풀렸다. 멍청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어쩌면. 차라리. 이런 그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미련조차 남기지 않는 게 맞았다. 이별을 말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더 아프다더니. 그 말이 정답이었다. 서영은 가까스로 힘을 내 복도를 걸어 나갔다.

    태욱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창가 쪽을 바라봤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곳에 리조트를 세우겠다고 결심한 건 오로지 한 사람 때문이었다. 언덕을 올라 바라본 도시는 아름다웠고, 그는 이 순간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그때의 태욱은 사랑으로 충만했었고, 모든 게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리조트를 완공한 뒤 치워 버리듯 은림에게 권한을 넘긴 건 그때의 자신에 대한 화풀이였다. 그래 놓고선 이 자리에 앉아 떠나질 못했다.

    ― 서영 씨한테 맡겼어. 애 낳고 얘기하자.

    다짜고짜 제 말만 하고 끊어 버린 훈재의 전화를 이해한 건 한참 후였다. 태욱은 은림과의 대화를 천천히 마무리하고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들은 바와 달리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 가방 따윈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도 될 문제였다.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단 말인가. 여전히 미련을 떠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지.

    서영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그에게 보여 주었던 웃음을 다른 남자를 향해 지으며. 평범한 남자. 행복한 결혼. 이해하려 했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그럴 거면 사랑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그랬다면 벚꽃 따위에 미친놈처럼 발작해 애꿎은 나무들에게 잔인한 봄을 선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미움보다 증오에 가까운 감정만 남긴 채 싸늘하게 식어 간 심장이 이젠 움직이지도 않았다. 두 번이나 병신처럼 살진 않겠다 다짐하고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서영이 서 있었다. 태욱은 잔인한 시험대 위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모른 척을 했다.

    내가 아팠던 만큼 네가 아프길. 너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나이길. 증오로 뒤덮인 그의 심장은 싸늘한 연극을 시작했다. 하지만 서영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서투르게, 그의 가슴을 쥐락펴락하는 말간 얼굴로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져 버렸다.

    태욱은 소파에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술을 찾기 위해 걸어가던 그의 시선이 멍하니 가방에 닿았다. 그는 무엇에 홀린 듯 빠른 걸음으로 객실 문을 열고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천천히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바라보고는 비상구로 향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사람처럼 달려 내려갔지만 1층에 도착한 사람은 서영이 아니었다. 거칠게 얼굴을 쓸어 낸 태욱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서 있었다.

    ○ ◆ ○

    지선은 다행히 3.5kg의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훈재는 머리가 붙잡힌 채 분만실로 따라 들어갔고, 그녀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흐느껴 울었다고 했다. 낳을 땐 죽을 것 같더니 아기 얼굴을 보니까 하나 더 낳고 싶어. 얼마나 예쁜지 몰라. 지선은 산후조리원으로 옮긴 후 서영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어 속마음을 전했다.

    그녀와 훈재를 볼 때면 서영은 사랑의 또 다른 의미를 떠올렸다. 같이 걸어 나가는 것. 서로 다툴 때도 있고 때론 상대가 징글징글하기도 하지만 함께 성장했다. 그래서 돌아설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선이 보내온 오리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서영은 잠시 감상에 젖었다.

    “윤 대리님, 대표님이 찾으시는데요?”

    잠깐 사무실 복도에 나와 있던 서영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선이 예상보다 빠르게 출산을 하는 바람에 회사는 더욱 바빠지게 됐다. 지훈이 지선의 몫까지 맡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며칠째 동분서주하는 그가 딱할 정도였다. 서영은 곧 대표실 앞에 도착해 짧게 노크했다.

    “들어와요.”

    전화 통화를 하고 있던 지훈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손짓을 했다. 서영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책상 앞 회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따로 부른 이유는 아마도 아트센터와 관련된 일 때문일 것이다. 당장 꺼야 할 불이 한가득인데 은림은 생각보다 빠듯하게 일정을 잡고 그들을 재촉했다. 이 일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사람처럼 수시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받았다. 지훈도 서영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정신이 없다.”

    지훈이 통화를 마치고 서영의 앞에 다가와 앉았다.

    “점심은 드셨어요?”

    서영이 묻자 지훈은 짧게 웃으며 책상 위에 놓인 샌드위치 봉투를 눈으로 가리켰다.

    “인수인계 늑장 부린 내 탓이지, 뭐. 애가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는데.”

    “진짜 이렇게 성격이 급한 애인 줄 몰랐다고, 이 대표님이 미안하다고 대신 전해 달래요.”

    서영과 지선이 매일 통화하는 사이라는 건 지훈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쉬어 갈 생각인지 아기의 얼굴을 보여 달라고 했다. 마침 지선에게서 동영상이 날아와 두 사람은 꼬물거리는 신기한 생명체를 잠시 넋 놓고 바라봤다.

    “이래서 다들 메신저 사진을 바꾸는구나.”

    그걸 지금에서야 이해하게 됐다는 것처럼 지훈은 아이의 사진을 오랫동안 내려다봤다. 요즘 들어 그가 결혼과 아이라는 단어를 입에 많이 올린다는 걸 눈치챘지만 서영은 거기에 되도록 답하지 않는 걸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하실 말씀은 뭐예요?”

    이렇게 의미 없는 시간을 같이 보낼 사이도 아니었다. 서영은 늘 먼저 물러나며 지훈에게 거리를 뒀다. 그는 그녀의 그런 반응엔 이제 적응했다는 듯 잠시 웃더니 뒤쪽의 책상에서 서류를 가져와 서영의 앞에 내밀었다.

    “아트센터 일을 대충 나눠 봤어.”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선 계획표를 내려다봤다. 지금 당장 급하게 마무리해야 할 일은 특집호의 인터뷰였다. 그걸 저 자신의 몫으로 돌려놓은 지훈의 속내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서영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인터뷰가 젤 급한데 이걸 대표님 혼자 하시게요?”

    “하면 돼. 못 할 게 어디 있어?”

    오히려 지훈이 고집을 부렸다.

    “대표님 스케줄이랑 그쪽…… 이사님 스케줄 맞추다가 시간 다 지나가요. 손 관장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사람도 아니고요. 어차피 제가 전담으로 맡기로 했으니까…….”

    “내가 왜 안 된다고 하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녀의 말을 잘라 낸 지훈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대표님.”

    “그래. 내 마음 때문이 아니라곤 말 못 해. 하지만 그것보다는 네가 상처받는 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내가 널 지켜본 세월이 몇 년인데. 얼마나 아팠을지 안 봐도 다 알아.”

    지훈의 추측에 서영은 웃음이 흘렀다. 아프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누구든 아픈 게 당연한 것이 이별이었다. 유별나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곳으로 들어와 일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 할 부분이었다.

    “이번에 그렇게 피하면 다음은요? 그다음도 선배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줄 거예요? ……왜요? 제가 극복해야 할 일이고, 피하고 싶지도 않아요. 인천에서 보낸 시간으로 충분해요.”

    “서영아.”

    “그리고 결혼 기사까지 난 사람이에요. 나랑 더 이상 뭘 하겠어요? 그럴 맘이 없는 사람이란 거 선배가 나보다 더 많이 겪어서 잘 알잖아요. 나랑 선배가 이러는 거 그 사람이 알면…… 비웃어요. 그러니까, 내 걱정 말고 당분간 이 대표님 빈자리나 잘 채워 주세요.”

    서영은 계획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이 못 이기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하나씩 이겨 내면서 자리를 찾아가면 될 문제였다.

    자리로 돌아온 서영은 망설임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유신 측 홍보 팀을 통해 그와의 인터뷰 일정을 잡으려 했으나 담당자들이 정신없이 바쁜 게 통화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 지금 난리 났을걸요.”

    앞자리의 가현이 불쑥 말을 던졌다.

    “무슨 일…… 터졌나요?”

    홍보 팀이 바쁘다는 건 외부적으로 이슈가 될 사건이 터졌다는 뜻이었다. 서영이 인터넷 창을 열어 검색하기 전 가현의 대답이 먼저 날아왔다.

    “손태욱 이사, 속도위반이래요.”

    서영보다도, 옆자리에 앉은 다른 직원이 더 놀라 맞받아쳤다.

    “뭐야, 진짜예요? 재벌은 그런 거 철저할 줄 알았더니.”

    “재벌은 사람 아니야?”

    그런가요, 웃음으로 무리의 대화에서 빠져나온 서영은 인터넷 창을 켰다. 검색할 단어를 입력하기 위해 커서를 바라봤지만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 같았다. 마우스를 잡은 그녀의 손끝이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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