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52화 (52/75)
  • 17. 또 속는 바보는 (1)

    오픈식은 자유로운 파티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즐기고, 느끼라는 취지였다. 그 콘셉트에 맞게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좋았고, 풍경화를 그려 놓은 듯 탁 트인 야외 조망은 모두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호강시켰다.

    누군가 이 자리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몸소 느껴 보았기에 기획할 수 있었다는 자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북악산 자락에서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급 리조트가 실패할 확률이 몇이나 될까. 이 자리를 어느 누가 선점하느냐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것을 한 남자는 해냈고, 끝내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세상에 선보였다.

    “하여튼, 대단하긴 하다.”

    지선은 비현실적인 풍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태욱이기에 가능한 시도였고, 기어코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서영과의 관계가 어찌 되었든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거기엔 자신의 남편 훈재도 한몫을 톡톡해 해냈기에 오픈식엔 꼭 참석하고 싶었다. 몸이 점점 더 무거워져 마지막까지 고민하긴 했지만 완공 직전, 갑자기 시 측에서 정책 변화의 흐름 때문에 법적인 문제를 트집 잡아 훈재가 더욱 고생을 했던 게 생각나서였다.

    임산부인 와이프를 두고 맨날 야근하는 못난 남편이라고 훈재가 자책할 때면 지선은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자신도 남은 일을 처리했다. 이렇게 같이 있으면 된 거잖아. 그녀의 해결책에 훈재는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이지선을 누가 이기냐고. 앞으로도 계속 져 주세요. 꾸벅 인사를 하면 훈재는 참지 못하고 지선의 얼굴을 붙잡아 입술을 맞췄다.

    그 타이밍에 나타나는 사람은 늘 태욱이었다. 작작 하라는 표정으로 서류를 던지고 사라지던 그가 다시 떠올랐다. 이별의 상처를 잊기 위해 전투적으로 일만 하는 남자가 거기 있었다.

    저러다 쓰러지면 어떡해. 지선이 참지 못하고 훈재에게 물으면 그는 짧은 대답만 남겼다. 안 쓰러져. 지금 강태욱이 아니라 손태욱이잖아. 그게 뭐가 다른 것인가. 지선은 아직도 수수께끼 같은 말의 답을 찾지 못했다.

    “변호사님은 못 오신대요?”

    서영이 풍경을 뒤로하고 물었다.

    “어. 다행이지. 중국 놈들한테 절을 할까 봐.”

    태욱을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소리였다. 서영은 짧게 웃으며 뒤늦게 사실 보고를 했다.

    “……만났어요. 아니, 본 건가.”

    “뭐?”

    지선이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아트센터 간 날이요. 잠깐, 스쳐봤어요.”

    그때의 만남을 자꾸 악몽처럼 꾼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호라. 그래서, 서 대표가 그담 날 저기압이었어.”

    서영은 지선의 말 안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지겨운 도돌이표일지라도 확실히 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선은 이미 다 들었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알아. 자기는 서 대표한테 맘 없는 거. 그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거. 근데 나는 자기가 새로운 사람 만나서 다시 좀 밝게 웃었으면 좋겠는데, 이젠 그게 다른 사람 만난다고 될까 싶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요즘 내가 왔다 갔다 해. 이것도 임신 호르몬 때문인가?”

    지선은 종종 상대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도록 자신의 속내를 모두 꺼내 보일 때가 있었다. 그게 그녀만의 화법이었고, 매력이기도 했다. 서영도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달랐을까. 그랬다면 태욱이 아니라 훈재 같은 남자를 만났겠지. 그건 상상이 되질 않았다.

    “아직은 좀 춥다. 이제 들어가서 미술관이나 좀 볼까?”

    지선의 제안에 서영은 흔쾌히 따라 주었다. 두 사람은 야외 공간을 빠져나와 미술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앙이 호텔 로비처럼 뚫려 있는 오픈 구조인 리조트는 난간에 서면 아래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서영은 로비 쪽에 서 있는 은림을 발견했다. 손님을 맞고 있는 그녀는 오늘의 주인공이 확실하다는 것처럼 넘치게 아름다웠다. 은림 또한 지선처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충분했다. 사생아라는 그늘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을 뿐, 태욱과 견주어 봤을 때 실력도 모자람이 없었다.

    “멋있어요.”

    서영의 말에 지선의 시선도 아래로 내려갔다.

    “누구? 아, 손 관장? 그래. 저런 여자가 유신건설에 있었으면 내가 거길 때려치우지도 않았을 텐데. 아쉽긴 하지. 제대로 된 핏줄이 뭐라고. 아무리 피 터지게 싸워도 결국 마지막엔 머리 좋은 놈이 앉게 될 것을. 후보군에도 못 오른 건 씁쓸한 현실이지.”

    ‘자격’이란 말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태욱이 가진 울분도 그것이었을까. ‘손’이 아니라 ‘강’으로 살아 내며 유신을 일으켜 세운 힘 안에는 그녀가 이해조차 못 할 복합적인 감정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영은 그와의 이별을 정당화했다. 어느 누구도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했다. 오직 태욱 자신만의 힘으로 그 자리를 차지해 노력을 보상받길. 은림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느새 또다시 한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고쳐지지 않는 병이었다.

    “근데…… 나, 왜 이렇게 배가 당기지.”

    지선이 잠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요?”

    놀란 서영이 얼른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부터 조금씩. 아, 뭐. 저녁을 좀 많이 집어 먹긴 했지.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지선은 다시 괜찮아진 듯 깔끔하게 웃어 보였다. 둘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중국에 있어야 할 두 남자와 마주했다. 네 사람이 함께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것이 이젠 금기가 되어 버릴 줄은 몰랐다.

    “……리조트를 짓기 전에 이 언덕을 혼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목표가 많았던 때였죠. 쉬는 게 죄인 것처럼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매일을 살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요? 하지만 단 하루, 단 한 번의 행복이 아주 큰 밑거름이 된다는 걸 이 언덕 위에서 깨달았습니다. 휴식이 편안함을 주고, 인생을 이어 가도록 이끌 겁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이곳이 떠올랐으면 합니다.”

    태욱이 단상에서 조금 멀어지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의 축사가 오픈식의 깜짝 이슈가 되어 자리를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서영도 사람들을 따라 두 손을 맞부딪쳤다. 언제 도착한 것인지 본사의 홍보 팀 직원들이 열정적으로 현장의 분위기를 담았다. 은림은 주인공에서 밀려난 것처럼 뒷자리에 서 있었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이 장면을 연출한 것처럼.

    “비행기 타기 전에 연락해 주면 좀 좋아. 무슨 007 작전도 아니고.”

    서영의 옆에 서 있던 지선은 누군가를 향한 넋두리처럼 투덜댔다. 사실 다른 층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앞에 선 두 남자를 마주쳤을 때 서영보다도 지선이 더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당혹감은 곧장 행동으로 발현돼 빠른 속도로 닫힘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다. 훈재가 놀라 손을 뻗었지만 다행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먼저 닫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영은 그저 옆에 서서 소리 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태욱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그가 그녀를 바라본 게 맞는지도 모를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다시 마주한 건 로비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였다.

    “전 괜찮아요.”

    서영이 짧게 대답하고 웃었다.

    “내가 안 괜찮아. 서 대표가 무리해서라도 본인이 간다는 걸 내가 자기 데려왔는데 이게 뭐야. 사보 일은 서 대표랑 나눠서 하기로 했다며? 오픈식이야 거기서 거긴데.”

    은림이 말한 대로 진행하는 대신 지훈과는 사보 일을 나누는 것으로 타협했다. 분명 그녀의 선에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생길 거라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회사 업무에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사보 일을 온전히 맡아서 한다는 것도 부담이긴 했다.

    그렇게 오픈식까지는 지훈의 몫으로 넘기기로 하고 끝난 이야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그의 업무 스케줄이 꼬여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서영이 대타로 나선 것이다. 지선도 같이 가 주겠다고 해서 부담 없이 다녀올 생각이었다. 이미 그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라 전해 들은 후라 마음이 가볍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뒤엎듯이 눈앞에 태욱이 나타났고, 뜻하지 않은 재회를 이어 가야만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쩌겠어요. 이제 현장도 마무리된 것 같으니까 우린 빠져요.”

    서영은 가방과 자료들을 챙겼다.

    “그래. 빨리…… 빠지…… 아.”

    로비를 나서던 순간, 지선이 갑자기 배를 움켜잡았다. 놀란 서영은 옆에서 그녀를 부축했다. 곧 다리 사이로 무언가 축축한 액체가 흘러내린 걸 발견한 서영은 하얗게 질린 지선의 얼굴을 보곤 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

    “119! 119부터 부를게요.”

    “으으악……!”

    진통이 시작된 것 같았다. 아직 예정일까지 많이 남아 있었기에 지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오픈식 시작부터 쿡쿡 쑤셔 오던 통증이 그것 때문이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아아아악!”

    지선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강한 통증에 그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서영이 급하게 119를 불렀지만 리조트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어째야 하지. 일단 택시라도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해야 하나. 하얗게 변한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저 멀리서 구세주처럼 훈재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래, 남편이 이곳에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훈재는 곧장 서영 대신 지선을 단단하게 부축했다.

    “진통인 것 같아요. 119는 불렀는데…….”

    “으아아악! 나 살려…… 즈으악!”

    지선은 훈재가 나타나자 곧장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훈재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차 키를 내밀었다. 서영은 곧장 의미를 알아채고 근처 직원에게 부탁해 차를 빼 왔다. 훈재와 함께 지선을 부축해 뒷좌석에 태웠다. 자신도 따라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데 훈재가 그녀의 앞에 서류 가방 하나를 던지듯 건넸다.

    “이거 좀 전해 줘요. 거기 앞주머니에 룸 키도 들어 있어요. 미안합니다.”

    “네?”

    이것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전해 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서영은 훈재의 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곧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내려다보자 상황 파악이 되었다. 가방 앞에 꽂혀 있는 만년필이 누구의 것인지는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서영은 큰 숨을 내쉬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까. 그러기엔 이 안에 어떤 기밀문서들이 들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훈재도 그녀를 믿었기에 가방을 건넸을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서영은 간단하게 마음먹고 발걸음을 돌렸다. 룸 키를 꺼내 호수를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파티 참석자 중 중요 인원들은 하루 정도 이곳에 묵고 가기로 했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서영은 룸 키의 호수가 적힌 방문 앞에 섰다. 여러 번 망설이다 조심스레 벨을 눌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방 안에 없는 건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었다. 룸 키를 인식기에 가져다 댄 후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만 놓고 금방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얼른 물건을 소파에 놓아두고 돌아선 순간 서영은 숨이 멎는 듯했다. 띠리릭. 또 다른 룸 키의 인식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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