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46화 (46/75)

15. 사랑은 지나도 사랑으로 남는다 (1)

습관이 무서운 법이었다. 7시 정각이 되면 눈이 떠졌다. 그리고 부엌에선 익숙한 칼질 소리가 들렸다. 서영은 커다랗게 기지개를 켠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굳은 몸을 이리저리 스트레칭한 후 잠자리를 정리하고, 방 안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녕.”

석류나무가 언제나처럼 그녀를 반겼다.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무기한 휴식, 그러니까 백수 상태인 그녀가 요즘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은 정원 가꾸기였다. 정원이라고 해 봐야 두 발걸음만 왔다 갔다 하면 끝나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곳에 그녀가 평소 좋아하는 식물들을 심어 놓았다.

무언가 물을 주고 가꾸며 키우는 건 숭고한 작업임을 깨닫는 중이기도 했다. 한 번씩 말을 건넬 때마다 그녀 자신이 더 위로받곤 했다. 아프지 않고 잘 자라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면 절대 잊지 못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아픔도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은 좀 해 봤어?”

아버지 석완의 목소리가 욕실 쪽에서 부엌으로 흘러 들어갔다. 옛날 주택이다 보니 방음이 부실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전화 통화 내용과 작게 다투는 목소리까지도 의도치 않게 듣게 될 때가 있었다.

인천 본가로 들어와 지낸 지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이젠 어떤 일이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낮 시간엔 구직 사이트에 접속해 적당한 일자리를 살펴보고 있긴 했지만 선뜻 이력서를 넣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방전된 상태라 그래. 쉬고 싶을 때까지 쉬어. 어느 날 안부 전화를 걸어 온 지선은 그렇게 서영의 불편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동안 일을 하며 모아 둔 돈으로 몇 달은 버틸 수 있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정말 어디든 다시 취직을 해야 했고, 새롭게 힘을 내야만 했다. 부모님도 이제는 서영의 상태를 눈치채신 것 같았다.

“뭘 어떻게 물어요? 남자랑 헤어져서 그런 거냐고 해?”

연애하는 줄만 알고, 이젠 품 안에서 떠나보내야 하는가, 다른 걱정을 하고 있던 석완과 영희는 서영이 서울 집을 정리하고 인천으로 내려온 날 모든 걸 단번에 눈치채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녀의 무기한 휴식을 받아들였다.

일주일 내내 잠만 자는 딸을 깨우지도 않았고, 석류나무만 본 채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동안에도 그저 딸의 옆에 간식들을 놓아 줄 뿐이었다. 먹어. 먹으면서 아파. 결국 영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건넸을 때 서영은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너무…… 맛있어서 그래.’

엄마가 해 준 부침개가 너무 맛있어서 그런다며 그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제 다 컸다. 남자 때문에 울기도 하고. 영희는 자신의 딸을 따뜻하게 안아 주기만 했다.

그날 밤, 석완이 애달픈 마음에 그 남자가 어떤 놈인지, 왜, 무엇 때문에, 내 딸을 이렇게 아프게 하는지, 묻겠다는 걸 영희가 가까스로 말리는 대화도 어쩔 수 없이 엿듣게 되었다.

고여 있을 것만 같았던 아픔의 시간들이 흐르고, 서영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유신건설 홈페이지에 접속해 태욱의 사진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직접 찾아보지 않아도 그는 요즘 티브이 광고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중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다 우연히 그 광고가 나오기라도 하면 서영은 밥이 돌알처럼 씹혔다. 세 사람 중 누구든 얼른 다른 채널로 돌렸다. 그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서영은 그럴 때마다 눈치껏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티브이 광고까지 진출하면 어쩌잔 말인가. 서영은 유신건설 홈페이지에 접속해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태욱을 노려봤다.

그래. 만약 서영이 그 일을 맡았어도 태욱을 홍보 모델로 내세웠을 것이다. 이미 그런 전적이 있기도 하고, 유신건설을 이미지화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그였으니까.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와 끝내 자신이 목표한 자리에 앉은 남자. 직장인들의 신화. 그런 인물이 사실은 오너가의 숨겨 둔 핏줄이었다는 비밀까지 밝혀진 상황이라면 이보다 더 완벽한 현실 드라마는 없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증명하듯 유신의 주가는 연일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미지를 파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던 남자였다. 사람들은 그가 핏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며 더 열광했다. 큰아버지인 인국의 공금 횡령 사건도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정의감으로 포장되었다. 유신이라는 회사가 나아갈 방향이 그것이며, 새롭게 이끌어 갈 모토임을 강조했다.

서영은 태욱의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닫힌 입이 낯설어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 앞에서 활짝 웃던 남자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며 도망친 사람도 모두 그녀였다.

모른 척하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서영은 화면을 껐다. 꿈에서 깨어나자. 이제는 그럴 때도 되었다. 새로운 시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정말…… 이런 시나리오는 막고 싶었는데.”

별안간 인천에 나타난 지선은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니까, 얼굴을 보지 않은 지 8개월째였다. 딱 그 기간만큼 그녀의 배 속에는 아이가 자라나 있었다.

“축하할 일이잖아요. 왜 이제야 말해요!”

그러고 싶었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 라는 표정으로 지선이 서영을 바라봤다.

태욱이 이사가 된 이후 유신건설엔 한차례 칼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직격탄을 맞은 게 신사업 팀이었다. 새로 부임한 팀장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태욱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의로, 타의로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제법 되었다.

지선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퇴사 이후 지선은 이직이 아니라 창업을 선택했다. 그런 지선과 손잡은 동업자가 바로, 그녀의 직속 상사였던 지훈이라는 걸 전해 들었을 땐 서영도 의아했다. 그러나 곧 자신과의 관계를 빼 놓고 본다면 설명되지 않을 조합도 아니란 걸 깨달았다.

지훈은 예전부터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싶어 했고, 신사업 팀에 불어온 칼바람이 그 시기를 앞당겼다. 지선의 영업력과 지훈의 전문적인 노하우가 합쳐지면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 분명했다.

정말 현실로 옮겨진 ‘지앤지마케팅’은 두 사람의 경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발판을 만들어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돌연 지선이 임신을 하게 되었고,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훈재는 지선이 아이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특별히 더 조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시작한 일은 아이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술술 풀렸다. 지선의 임신이 여러모로 신경 쓰이던 지훈도 그녀의 업무 능력 앞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앞으로 닥칠 출산이 문제였다. 잠시일지라도 그녀의 빈자리를 채워 줄 사람이 필요했다.

“서 대표…… 그러니까, 서지훈 차장, 아직도 불편한 건 아니지?”

서영은 지선의 질문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태욱과 만나면서 지훈과는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지 않게 되었고, 그것은 퇴사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그의 배려라는 것도 알았고, 그래서 서영은 고맙기도 했다.

“그러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이제.”

서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이 흘렀고, 모두 지난 일이었다. 지훈이 아직도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을 리도 없었고, 서영도 그에 대한 감정 같은 건 애초에 가지지 않았기에 굳이 피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럼 잘됐다. 서 대표가 서영 씨 얘길 하더라고.”

“저를……요?”

“일 부탁할 사람으로 제일 딱이라고. 솔직히 나 아쉬울 때 불쑥 찾아와서 도와 달라고 말하는 거, 너무 민망하긴 한데. 내 배가 이렇게 부르니…….”

지선은 산만큼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웃음을 흘렸다. 태어날 아기는 아들이었고, 엄마는 잘 먹지도 못하는데 벌써부터 태아 몸무게가 정상보다 많이 나간다고 걱정을 했다. 서영은 그녀의 푸념도 어쩐지 행복해 보여 마음이 따뜻해졌다.

“도와드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제가 대리님 일을 맡는 게 좀…….”

“아, 그건 걱정할 거 없어. 내가 하던 일은 서 대표나 내 밑에 직원이 받아서 할 거고. 사보나 마케팅 전문 일을 대신 할 사람이 필요한데, 자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어. 마침 쉬고 있기도 하고. 진짜 사람 살리는 셈 치고, 도와줘.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머물 곳은 우리가 비용 지불하고 마련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서영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선은 어쩐지 침이 꼴깍꼴깍 삼켜졌다.

“그럼 저…… 도와드리는 거 말고, 거기 취직시켜 주실 수 있어요?”

“어?”

서영의 다른 제안에 지선이 더 놀랐다.

“이제 부모님 눈치도 보이고, 다시 제대로 뭐든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가 결심한 듯 웃자 지선은 당장 계약서를 쓰자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음 바뀌면 우리가 더 손해라며 핸드폰을 꺼내 회사 직원에게 근로계약서를 메일로 보내 달라 말하고는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평소 이지선의 영업력이 그대로 실현되는 상황이었다.

어쩌다 보니 서영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와 취직이 되었다. 당장 지낼 곳을 구하고 짐을 옮길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조금은 신이 나기도 했다. 살아 있는 자신을 느낄 때가 되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시간은 또 흐를 것이다. 그것만큼 아픔에 좋은 약은 없었다.

“아…… 근데, 괜찮겠어?”

지선이 그제야 생각난 것처럼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묻는지 그녀도 알았다. 지선과 같이 일하면 훈재와 마주치는 상황이 생길 것이고, 태욱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일 테다. 그렇다고 인천에만 숨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안 괜찮을 게 뭐 있어요. 수시로 티브이 광고에도 나오는 사람인데.”

서영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 뭐. 완전 연예인급이지. 이제 우리랑 노는 물이 다른 사람이니까. 그이도 이제 나한텐 만난다는 소리도 안 해. 좋은 말 들을 일 없으니 그렇겠지만. 그리고 마주치면 뭐 어때? 안녕하세요, 하고 남들처럼 지나가면 돼. 내가 그렇게 친구처럼 지내는 엑스 보이프렌들이 많단다. 아, 이건 우리 오리 아빠한테 비밀.”

지선이 쉿, 하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모처럼 만에 두 사람은 동지애를 담은 눈빛으로 함께 웃었다.

서영은 잠깐 태욱과 마주치는 상상을 해 보았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련 같은 게 남아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평화롭게 흘러간 8개월이 그것을 증명했다.

“우와, 이제 진짜 봄이구나.”

지선과 카페를 빠져나오자 어느새 거리엔 벚꽃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서영이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꽃구경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게 쉽지 않았다. 이 꽃들이 뭔 죄라고. 서영은 잠시 멈춰서 날리는 벚꽃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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