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45화 (45/75)

14. 사랑을 모르지 (4)

“두통약은 먹었어요?”

다정한 물음이었다.

“……괜찮아.”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주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이었다. 2주가 흘렀지만 그대로였다.

예전처럼, 서로를 보고 웃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너는 모든 걸 받아 주었으니. 네 마음을 볼모로 이 전쟁에 이용당하게 만들고, 네가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상처를 온갖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도록 했으나, 그 모든 걸 사랑으로 덮어 버리려 하는 놈을 이렇게 찾아와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생각은…… 많이 못 했어요. 아니, 안 하고 싶었어요.”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욱은 그저 서영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오피스텔의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건 서영이었다.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선 당연히 마주 앉아야만 했다. 유난히 큰 테이블이 오늘따라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다.

“처음엔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원래 이렇잖아요. 허술하고, 잘 당하고, 잘 속고. 그러다가, 또 좋은 게 좋은 거다. 웃기만 하고.”

그런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그녀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웃고 있는데 태욱은 가슴이 찢기듯 아팠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착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개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복수의 독기를 품는 그와는 달랐다.

“나는…… 그때부터 그랬어요. 내 동생…… 보내고 나서요. 사실은, 내가 욕심부리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에요. 그게, 그러다 보니, 사는 동안 철칙이 됐어요. 지금을 감사하며 살자. 물 흐르듯이. 뭐든 원해서도 안 되고, 가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

“근데, 처음이었어요. 팀장님은.”

서영은 터지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원하는 사람. 가지고 싶은 사람. 그래서…… 술 먹고, 그런 거예요.”

이제 와 말할 수 있다는 것처럼 그녀는 그때를 떠올리듯 하얗게 웃었다. 평생 그 무엇도 원하지 않고 살아온 여자가 처음으로 가지고 싶다고 욕심을 부린 게 그였다. 태욱은 그녀의 눈빛을 오해했고, 그녀의 감정을 가벼이 여겼다. 서영이 쌓아 온 마음이 얼마나 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퇴사하려던 이유…… 사실은…….”

“알아.”

태욱이 그녀의 말을 막으며 대답했다. 서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팀장님이 유신그룹 손자인 거 알았을 때 그만해야지 생각했어요. 근데 어차피 잠시 연극을 하다가 목표를 이루면 그만두기로 한 사이였잖아요.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거 아니에요. 차라리 잘됐어요.”

태욱은 표정 없이 서영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아요. 서로를 위해서.”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태욱은 서영의 결론이 우스웠다. 그리고 허무했다. 뻔뻔하게 그 ‘끝’을 얘기한 이도 그였으며, 어떤 확신도 주지 않은 채 모든 걸 감추려고만 했던 남자도 태욱이었으나 지금은 모른 척해야만 한다.

“많은 거 안 원해. 그냥 옆에만 있어.”

그가 더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아직 나를 원하잖아. 그거면 된 거 아닌가?”

태욱은 오히려 화를 내 보았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무슨 이유든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나를 보고, 이제 내가 너 아니면 안 되는걸.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이 뭔지 알게 해 준 사람이 너인데. 나는 모르겠어. 모른 척할 거야. 그게 맞아.

태욱이 돌아섰다. 그녀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문이라도 잠가 버리게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서영은 기어이 그가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한 한 사람을 입에 올려 그의 발을 묶었다.

“어머님을 데려와요.”

태욱은 웃음이 났다. 착해 빠져서는. 그가 그녀를 선택해 어머니를 데려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제까지의 서영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은림이 그 죄책감에 기름을 부어 주었겠지. 누구 하나 도움 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를 더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인간들뿐이었다. 서영만 곁에 두면 행복할 줄 알았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너랑 상관없이 그럴 생각 없어. 스스로 다 내려놓고 떠나신 분이야.”

태욱은 냉정하게 말을 뱉었다. 그리고 서영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일으켜 세워 그를 바라보게 했다.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진심을 토해 냈다.

“내가 붙잡고 싶은 건 너야.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서영이 아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솔직하게 말할까요?”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그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나는 당신이랑 헤어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게…… 많아요. 고모님이 혹시 모른다고 했어요. 부모님한테 이상한 게 보내질 수도 있다고. 인천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우편함만 봤어요. 혹시라도 엄마 아빠가 그걸 보게 될까 봐. 동생 사고에 대한 거라면 우리는…… 아니,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못 하고 벌벌 떨어요. 당신은 이해 못 해요. 그게 어떤 건지.”

태욱의 눈동자가 무너졌다. 그래도 서영은 더 독해지기로 마음먹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내 상처가 이리저리 이용돼야만 하는 그런 환경에 사는 남자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부모님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웃으실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비겁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팀장님도, 나랑 끝까지 갈 생각 한 거 아니잖아요. 회장이 되고 싶다면서요? 그렇게 해요. 팀장님은 그 길 가고, 나는 내 길을 갈게요.”

작살에 찍힌 것처럼 서영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태욱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만하라고 돌아서자 서영은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걸음을 옮겨 오피스텔을 나가 버렸다.

태욱은 그 자리에 서서 웃었다. 시원하게 웃고 나자 허무함이 몰려와 그의 인내를 모조리 상실시켜 버렸다. 부엌으로 들어가 진열장에서 양주를 꺼내 글라스에 따랐다. 입에 가져다 대려다 그대로 그것을 내던져 버렸다. 뚝뚝 피가 흐르는 손을 표정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태욱은 핏방울을 바닥에 지도처럼 남기며 저벅저벅 침대로 걸어갔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 ◆ ○

다음 날 출근한 서영은 사직서와 함께 크림 원피스가 든 종이 가방을 태욱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퇴사 처리는 반나절 만에 이루어졌고, 원피스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채 청소 아주머니의 수레에 이끌려 사라지는 걸 지켜봐야 했다.

태욱은 그날 오후 신사업 팀 집무실 정리하고 새로 마련한 이사실로 자리를 옮겼다. 신사업 팀은 당분간 팀장 없이 부서장들 체제로 운영될 예정이라 했고, 서영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금방 구해졌다.

인수인계 기간 동안 그녀는 사내의 1순위 가십거리가 되어 직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지만 지선의 보디가드 덕분인지 별다른 테러를 당하진 않았다.

지선에게는 감출 것 없이 태욱과의 헤어짐을 곧장 알렸다. 그녀는 ‘나쁜 새끼’라며 덮어놓고 그를 욕했다. 서영은 오해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먼저 헤어짐을 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선은 그러니까 ‘더 나쁜 새끼’라며 서영을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실연 같은 건 경험하지 않은 여자처럼 살았다. 태욱만이 그녀의 일상에서 사라졌을 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잠시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둔 게 한몫 톡톡히 했다. 이별이 처음이라 그런가. 실감이 나지 않았고, 때론 시시하기도 했다.

사는 일들이 다 그랬다. 서영은 어릴 적 너무 큰 상처를 경험했고, 그것보다 더한 아픔은 없을 거라 여기며 살았다. 정말 모든 일들이 그때만큼 힘들거나 아프지 않았다. 지나갔고, 잊혔다. 태욱과의 이별도 그럴 것이다.

회사를 퇴사하면 다시는 볼 일이 없는 남자였다. 그녀가 인수인계를 하는 기간 동안에도 그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이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지도 않고, 임원진들만 이용하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과는 정말 다른 세계에서 산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진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 출근을 마무리하고 지선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서영이 물었다. 자신에게 묻는 질문 같기도 했다. 그렇게 제정신을 못 차리고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굴 땐 언제고. 체념이 익숙한 성격 때문이라고 합리화를 해 보지만 마음 끝이 술맛처럼 썼다.

“사랑이란 게…… 원래 그렇게 무서워.”

지선은 알 수 없는 말로 서영의 가슴을 더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다.

사랑이 도대체 뭔가. 물음표만 남긴 채 모든 것이 순조롭게 정리되어 갔다. 당분간은 부모님 댁에 내려가 있을 생각이라 원룸도 정리했다. 아직 계약기간이 남은 상태라 걱정했는데, 의외로 주인은 흔쾌히 전세금을 돌려주었다. 집이 아주 비싼 값에 팔렸다는 것이었다. 낭만을 알면서도 다리가 아주 튼튼한 사람이 또 있구나 생각하며 서영은 빠르게 집 안의 짐들을 정리했다.

딱히 버릴 것도 가져갈 것도 없었다. 원래 옵션으로 구비돼 있던 가전들은 그대로 두면 되었고, 그녀의 짐은 옷들과 책, 살림 도구들뿐이었다. 박스를 몇 개 사 와 물건들을 담았다. 계절별로 옷을 나눠 담다가 큰 와이셔츠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서영은 심장 쪽이 아팠다. 급하게 식사를 해 체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옷을 접어 두었다.

욕실로 들어가 수납장을 열어 정리했다. 안 쓰는 것들은 버리는 봉투에 담고, 계속 사용할 것만 작은 가방에 옮기는데 그가 쓰던 일회용 면도기 묶음과 칫솔, 그녀가 사 준 로션이 차례대로 나왔다. 막힌 목구멍이 이젠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이런 흔적들을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할 뿐이었다. 독하게 그를 끊어 낼 땐 언제고. 잔인한 말로 상처 줬으면서. 이렇게 사소한 것들로 인해 무너지다니. 정신을 차려야 했다.

서영은 욕실을 빠져나와 베란다로 향했다. 이젠 에어컨 없이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자 마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큰 숨을 쉬고 뒤돌아서려는데 눈앞에 작은 종이가 보였다. 그 자리, 이번엔 다른 색깔이었다.

어쩌자고. 나쁜 사람. 그녀는 오히려 그를 욕했다. 종이의 내용은 읽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을 훔쳐 냈다. 모른 척하면 그뿐이었다. 이렇게 독하니 사랑을 모르지. 모두가 말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서영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베란다에 남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녀의 등 뒤로 찬 바람이 불었다. 어느덧 뜨거운 여름이 끝나 가고 있었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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