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8화 (8/75)
  • 4. 서두를 것 없이 (1)

    “윤 대리? 윤 대리!”

    “네?”

    서영이 놀라 파티션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같은 팀원인 혜주가 보고서를 들고 서 있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건네받으려는데, 그녀의 책상 위로 파일이 던져졌다.

    “무슨 일 있어? 하루 종일 넋 놓고선.”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혜주는 쌩하니 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서영보다 입사는 빨랐지만 직급이 같아 이래저래 사이가 어색한 팀원이었다. 늘 어렵고 처리할 것이 많은 업무는 서영에게 떠넘기는 편이었고, 이름이 확실히 드러나거나 성과가 보장되는 일에는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어 가져가는 얌체 같은 타입이었다.

    “휴…….”

    서영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작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태욱의 집무실 쪽을 바라봤다. 그는 오늘 출장에서 돌아와 여전한 모습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점심쯤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오늘 저녁 같이 합시다.]

    그 문자를 받고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만날 줄 몰랐나. 지선과 대화를 나누며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전에 닥치니 서영은 여지없이 허둥대며 눈에 보이도록 티를 내고 있었다. 알겠다는 답장만 간단하게 보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오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이러면서 태욱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어 갈 건지. 짝사랑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걸로만 끝내야 하는 게 맞는 건가. 한발 물러서게 하는 소심함이 또다시 그녀를 흔들었다. 그러나 며칠 만에 그의 얼굴을 보게 되니 기분이 들뜨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갈대도 이보다는 덜하겠지. 서영은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혜주가 넘긴 보고서를 살폈다.

    “윤 대리.”

    정신없이 오후 업무를 처리하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서영은 자신의 파티션 앞에 다가와 서 있는 지훈을 보고 얼굴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네. 차장님.”

    지금 당장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태욱과의 저녁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지도 몰랐다. 두 선택 모두 그녀를 난처하게 하는 건 분명했다. 서영은 태욱의 집무실과 지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같이 저녁 먹자고.”

    “네?”

    서영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당황했다.

    “왜? ……약속 있어?”

    지훈에게서 곧장 서운한 표정이 드러났다. 퇴근 후 그와 저녁 겸 맥주를 한잔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대부분 업무에 관한 것들이었고, 지훈은 한 번씩 서영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먼저 잡힌 약속이 있으니 지훈에게는 거절의 뜻을 밝히는 게 맞았다.

    “네. 친구랑, 근처에서 저녁 먹기로…… 했어요.”

    왜 거짓말이 튀어나왔을까. 서영 스스로도 의아했다. 어차피 태욱과 만나는 일은 그녀의 퇴사 문제에 관한 연장선일 뿐인데. 괜히 지훈을 더 신경 쓰게 하기 싫었던 그녀의 짧은 생각이 곧이어 상황을 아주 이상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윤 대리, 아직 많이 남았습니까?”

    지훈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태욱이 어느샌가 퇴근 준비를 마치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서영은 당연히 그가 문자나 전화로 만날 장소를 전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태욱은 서영과 함께 퇴근할 마음인지 지훈의 옆에 나란히 서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저……. 이제 정리하고 일어나면 됩니다.”

    서영은 태욱에게 대답하며 눈으론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지는 걸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졸지에 거짓말을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차장님.”

    “서 차장은 퇴근 안 합니까?”

    서영과 동시에 태욱이 옆의 지훈에게 말을 건넸다.

    지훈은 태욱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했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일부러 나선 것 같았다. 일중독 강태욱 팀장이 이 시간에 퇴근을 한 적이 있던가. 그는 요즘 그답지 않은 것들투성이였다.

    “이제 하려고요. 팀장님은…… 윤 대리랑 약속이 있으셨군요.”

    “네. 그럼. 나갑시다, 윤 대리.”

    태욱은 지훈에게 짧게 답한 뒤 서영을 재촉했다. 꼭 같이 나가겠다는 표정인 걸 보니 그는 먼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기 싸움인지. 서영은 어쩔 수 없이 얼른 컴퓨터를 종료시키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지훈에게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짤막하게 인사한 뒤 태욱을 따라나서는 서영을 그 자리에 서서 보는 지훈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둡게 굳어졌다. 뭔가 상황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태욱의 눈빛에서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비행기 수속만으로도 바쁜 새벽, 굳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부서 팀원의 사표 수리를 보류하라는 뜻을 전했다. 전화를 끊으며 지훈이 의아함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서영과 면담을 한 것부터가 평소의 강태욱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리 추측해도 하나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것도 이제 와서. 지훈의 머릿속엔 이해할 수 없는 물음들이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곧 이 답답하고 짜증 나는 감정이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 차장이랑 많이 친합니까?”

    단둘만 올라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욱이 불쑥 물었다. 목소리에는 특별한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자주 묻던 질문이었다. 바늘과 실처럼 서영의 곁에는 늘상 지훈이 붙어 있었으니. 입사를 하고 나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수십 번은 했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대학 선배이기도 하고. 많이 챙겨 주시는 편이에요.”

    서영은 사실 그대로 말했다. 입사 당시에는 그 말이 오해를 불러와 의도치 않은 소문으로 번진다는 것을 몰랐다.

    회사 일에 적응하기도 바쁜 신입 사원이었고, 그녀의 눈에는 다른 남자가 들어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혼란한 틈을 타 회사에서는 그녀와 지훈이 사내 연애 중이라는 가십이 나돌았다.

    당연히 서영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못했다. 대학 선배의 연줄을 타고 입사해 회사에서 자리도 잡기 전에 연애부터 시작했다는 질타가 이어졌다.

    억울하기보단 무서웠다. 회사란 이런 곳이구나. 대학에서도 잠시 무리의 힘을 경험하긴 했지만 회사는 더 능숙하고 잔인하게 편을 가르고, 성공과 실패 두 가지로만 평가받았다.

    그래서 입사하자마자 실적을 내기 쉽지 않은 신입들은 실수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다. 그 순간부터 모든 건 낙인이 되었고, 이후로 아무리 수많은 성공을 한다 해도 예전의 실패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지훈이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를 회식 자리에 데려와 소개함으로써 단순하게 정리되었지만 그 이후로 서영은 모든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은 태욱을 대할 때면 더욱 심해졌다. 그녀의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그가 오해를 받고 피해를 입을까 봐. 지나서 생각해 보면 지난 5년간의 그런 행동들이 무슨 의미였나 싶었다. 그렇게 참고 참았던 감정이 터지듯 발현되어 당사자인 태욱에게 술자리에서 잠자리를 운운한 가벼운 여자가 되어 버렸으니.

    “사적으로도 자주 만납니까?”

    “…….”

    그의 물음을 이해할 수 없어 서영은 태욱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아들이며 그가 잠시 입꼬리를 올렸다. 못마땅할 때 보이는 차가운 웃음이었다.

    “이런 질문,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네.”

    서영은 짧은 대답, 그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가벼워 보였다고 한들 어찌 한 사무실에서 두 명을 마음에 두고 저울질하겠는가. 그렇게 보였다는 것도, 그에게 오해를 받는 것도 서영은 불쾌했다.

    “이럴 땐 또 무서운 면이 있군.”

    태욱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눈빛만으론 감정이 쉽게 읽히지 않는 남자였다. 그녀를 직시하는 그의 눈동자 속에 평소 보았던 팀장 강태욱은 없었다. 서영은 가슴속이 울렁거리며 손끝이 뜨거워졌다. 결국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서영이었다.

    “…….”

    “뭐, 대답하기 싫다는 사람한테 캐묻는 취미는 없습니다.”

    태욱이 업무 얘기를 하는 것처럼 건조하고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고 곧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서영이 먼저 내리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서영은 그보다 앞서 밖으로 나왔다. 뒤따라 내린 태욱이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저깁니다.”

    그가 스마트 키를 눌러 차 문의 잠금을 해제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더 어색해진 것 같아 서영은 곤혹스러웠다. 그녀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지훈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까지 태욱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가 궁금해한다는 것 자체도 그녀에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타요.”

    태욱이 자연스럽게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서영은 순간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지하지만 누가 보기라도 하면 오해할 만한 장면이었다. 그녀가 잠시 두리번거리자 태욱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는 사람 없습니다.”

    “아…….”

    그의 말에 민망해진 서영은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또 한 번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아 큰 숨을 삼켰다. 당황하지 말자. 침착하게. 많이 연습했잖아. 서영은 태욱이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오르는 짧은 순간 동안 기도하듯 주문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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