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7화 (7/75)
  • 3. 인생은 짧고, 사랑만 남는다 (2)

    “아, 저는 왜…….”

    “바꾸라는데, 강 팀장이?”

    서영은 엉겁결에 핸드폰을 받았지만 쉽게 귀로 가져다 대지 못했다. 그러자 지선이 나서서 친절히 그녀의 귀에 핸드폰을 딱 갖다 붙여 주었다.

    ― 윤 대리. 윤서영 대리 맞습니까?

    태욱이 확인하듯 물었다.

    “네. 팀장님…….”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자 태욱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 박 변이 흥분한 거 같아서 내가 대신 받았습니다. 술 많이 마셨습니까?

    “아뇨! 이 대리님 많이 안 드셨어요!”

    서영이 얼른 변명을 했다.

    ― 윤 대리 말입니다.

    태욱의 질문에 서영은 잠시 멍해졌다.

    “…….”

    ― 윤 대리?

    “아……, 저도 많이 안 마셨어요. 그냥, 저녁 겸 반주한 거예요. 제가 퇴사하게 됐다고 말했더니 저녁 사 주겠다고 하셔서요. 박 변호사님께 잘 설명해 주세요.”

    서영은 자신이 왜 이런 보고를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우선은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혹시라도 지선이 이 자리 때문에 남편과 부부 싸움이라도 한다면 그녀의 책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앞자리의 지선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취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 보류라는 말, 서 차장한테 못 전해 들었습니까?

    태욱은 그녀가 궁금해하던 일을 직접 꺼냈다.

    “들었어요. 그래서 의아했습니다. 전 분명 제 의사를 말씀드렸다고 생각했는데요.”

    ― 의사는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직 할 말이 남아서요.

    “……네?”

    ― 어제 윤 대리가 더 듣고 싶어 하지 않기에 못 한 것뿐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무슨 할 말이 남았다는 거지. 서영은 태욱의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뭐, 어차피 속마음을 다 드러내는 타입도 아니었다. 더 이상 그에게 끌려다니기 싫어 서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려는데 전화는 또다시 주인에게로 넘어갔다.

    ― 윤 대리님? 저 박훈재 변호삽니다.

    “아, 네. 죄송해요, 변호사님.”

    “뭐야? 다시 그 인간이야? 하여간 눈치가 없어 가지고.”

    닭발을 뒤적이며 그녀의 말을 엿듣고 있던 지선이 놀라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서영은 2차전을 시작한 신혼부부의 투닥거림을 지켜보면서도 머릿속에는 태욱의 말이 맴돌았다. 무슨 얘기가 남았다는 건가. 그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영은 화면을 확인했다.

    [한국 가서 얘기합시다.]

    태욱에게서 온 문자였다. 서영은 답하지 않았다.

    [술 적당히 마시고 일찍 들어가요.]

    곧 그에게서 문자 하나가 더 들어왔다. 꼭 걱정하는 것처럼.

    [제가 알아서 합니다.]

    서영은 참지 못하고 답했다. 하지만 그 뒤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 하여튼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재주는 타고난 것 같았다. 서영은 일부러 핸드폰을 테이블에 뒤집어 놓았다.

    “누군데? 혹시, 강 팀장이야?”

    언제 통화를 마쳤는지 지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문자 내용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서영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일 문제예요.”

    “무슨 일? 자기 퇴사 문제?”

    역시 지선을 속이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네. 팀장님 허락이 아직 안 떨어져서요.”

    “강 팀장이? 의외네. 그런 문제까지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닌 줄 알았는데.”

    지선은 입 끝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서영도 그래서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멋대로 추측하는 것도 우스웠다. 총괄 팀장이 부서 팀원의 퇴사에 관여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차장님 혼자 힘들까 봐 그러시는 걸지도 모르죠.”

    “강 팀장이 서 차장 걱정을 왜 해?”

    그게 더 의아하다며 지선이 되물었다.

    “그거야…… 제가 빠지면 차장님 업무가 많아질 거고, 그럼 전체 일도…….”

    “윤 대리, 내가 강 팀장 전설 하나 얘기해 줄까?”

    의자를 앞으로 좀 더 끌어온 지선은 서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전, 전설이요?”

    “윤 대리 입사하기 전이니까 모르겠다 싶어서.”

    미끼를 물듯 서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접겠다고 했지만 태욱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언제나 엔돌핀이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커피를 좋아하고 어느 브랜드의 치약을 쓰고 또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까지. 그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싶던 때도 있었다.

    “강 팀장이 말단 사원에서부터 팀장까지 차근차근 올라온 케이스인 건 알지?”

    “아, ……네.”

    그래서 더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다. 사원부터 팀장까지 초고속이었다. 모두 그의 능력이 만들어 낸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가 해내고 이루어 놓은 업적들이 이전 회사의 몸집을 불리고 현재의 유신건설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지금의 신사업 총괄 팀장이 되기까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잤을 것 같아? 지금도 일주일의 절반은 야근이지만 옛날에는 더 심했단다. 그런데 그렇게 잠을 안 자도 다크서클 하나 내려오질 않았대. 이건 좀 무서운 얘기긴 하다.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선은 이야기에서 살짝 벗어난 자신의 감상을 꺼내 놓았다.

    “암튼 그렇게 일만 하는 인간을 같은 부서 사람들이 좋아했을까? 당연히 비교당하니까 싫어했겠지. 은근히 따돌리기도 하고. 강 팀장이 TF 팀에 있을 땐 말이야. 사람들이 같이 일 못 하겠다고 다 손들고 빠져 버리기도 했었대. 엿 먹으라는 거지. 근데 더 기가 막힌 게 뭔지 알아? 다섯 명이 할 몫을 강태욱이 혼자 다 해냈다는 거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간다 이거지.”

    지선의 얘기처럼 평소 태욱의 업무 방식은 일방적일 때가 많았다. 은근히 외골수적인 면이 많다는 걸 서영도 느끼긴 했다.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신사업 팀 한 공간에 다 집어넣자고 한 사람이 강 팀장이잖아. 왜 그랬을 거 같아? 나이 많은 부장들은 낮에 나가서 사우나도 하고, 의자 기대서 잠도 자야 하는데 그걸 못 하게 만들겠다는 거지. 그거 감시하려고 지금 체제 만들었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겠어. 그건 윤 대리도 알 거 아니야?”

    태욱은 이전 회사의 고질적인 업무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오픈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게 서로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자극제로 작용하며 협업보다는 감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게 할 때가 많았다.

    “네. 뭐…… 그렇죠.”

    “오픈 체제면 부서장들 모아서 술 한잔 마시는 자리도 마련하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어디 있었어? 전체 회식 때나 잠깐 얼굴 비치고 사라지는 게 강 팀장 스타일인걸.”

    그 전체 회식 때 일을 저지른 게 자신이라고 서영은 말할 수 없었다.

    “팀원들이 못 따라오면 혼자 하는 게 강 팀장 방식이야. 뒤처진 사람들 끌고 가는 우쭈쭈 독려형이 아니라. 그런 강태욱 팀장이 마케팅 팀원 한 명 빠지는 걸로 신경을 쓴단 말이지? 내가 최근에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쇼킹하다, 야.”

    지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태욱은 정말 왜 이러는 걸까. 그가 시간이 남아돌아 그녀에게 면담을 신청할 리가 없었다. 분명 무슨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대리를 붙잡아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겠지.”

    지선이 점치듯 말을 꺼내 놓았다.

    “네? 무슨……?”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암튼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거지.”

    “……기회요?”

    “강태욱이를 잡으라고.”

    지선이 속삭이며 서영에게 윙크를 보내왔다.

    악마의 속삭임이 이런 것일까. 서영은 기껏 다잡은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가 만약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녀의 퇴사를 막는 것이라면 그녀도 그것을 빌미로 원하는 것을 잠시라도 얻을 수 있을까.

    잠자리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동조한 것은 술에 취해 부린 객기였고, 서영은 그저 태욱과의 평범한 일상을 느껴 보고 싶을 뿐이었다.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몇 번의 만남이라도 괜찮았다. 여느 커플들처럼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산책하는 정도라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태욱과 진지한 관계를 만들 꿈은 애초부터 꾸지 않았다. 감정의 추가 그녀 쪽으로만 일방적으로 기울어질 게 뻔했다. 욕심부리지 않는 선. 끝이 있는 시간. 그 안에서 태욱을 만날 수 있다면 서영은 그 기회를 붙잡고 싶었다.

    “진짜…… 기회일까요?”

    서영의 물음에 지선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인생은 짧고, 사랑만 남는다.”

    지선이 평소 자신의 모토를 읊었다. 서영은 같이 짠, 을 하고는 소주를 목 안으로 넘겼다. 쓰기만 하던 알코올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한순간 달콤하게 느껴졌다.

    ● ◇ ●

    중국 출장은 예상보다 조금 일찍 마무리되었다. 모두 불도저처럼 밀고 나간 태욱 때문이었다. 그 속도를 따라오는 게 힘에 부쳤는지 훈재는 매일 밤마다 고용노동법을 읊어 댔고, 마누라가 너무 보고 싶다고 염장을 지르기도 했다.

    그 마누라를 빨리 만나게 해 주겠다는데 무슨 불만이냐며 태욱은 전에 없던 속도로 빠르게 일을 처리했고, 예정보다 일찍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이 시작되자마자 곯아떨어진 훈재의 옆에서 태욱은 앞으로의 일들을 미리 들여다봤다. 며칠 밤을 새도 버틸 수 있는 몸으로 태어난 걸 감사해야 할까. 그도 한 번씩은 자신에게 놀랄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무슨 에너지로 이러는 건지.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한 여자가 떠올랐다.

    얼굴이 자주 붉어지고, 대답이 느리며, 벚꽃을 좋아하는. 자신도 모르게 흩날리는 꽃들을 보며 화사하게 웃던 그 밤의 서영이 떠오르자 태욱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턱대고 가져 보고 싶다 말하던 자신감은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하루 만에 없던 일로 해 버리자 발뺌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약이 올라 그저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계속 그를 거슬리게 하던 여자였다. 조용한 듯 앉아서 표 나게 그를 바라보던 감출 수 없는 눈빛.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자에 관심을 가질 시기는 아니었다. 그것도 사내에서 마주해야 하는, 그의 밑에 있는 직원이라면 더더욱.

    태욱은 그 정도로만 서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무례한 고백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그의 자극점을 건드리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그에겐 손 회장이 던진 미끼를 끊어 낼 적당한 여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윤서영은 그가 원하는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손 회장이 다시는 결혼으로 그의 목을 쥐지 못하게 할 만큼. 당연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겠지. 재벌남과 부하 직원의 로맨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게 한으로 남은 할아버지에게 부모님의 러브 스토리는 커다란 약점이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똑같이 닮아 가는 손자라니. 한동안 노인의 혈압이 오르겠지만 그 폭탄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결혼 문제만큼은 집안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은 태욱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연극이 필요했다.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파혼녀 지유린을 떼어 내 버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서영이 그 뜻에 동의해 줄지는 아직 미지수였지만 그녀가 그에게 저지른 실수가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상대의 허점을 건드려 상황이 유리해지도록 만드는 일에는 아주 도가 튼 그였다. 사업 머리가 이럴 때도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태욱은 핸드폰을 꺼내 서영과 주고받은 문자를 내려다봤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발끈하듯 보낸 마지막 문자가 태욱을 웃게 만들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와 있으면 웃음이 잦아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주변에 이토록 허술하고 어수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새로운 장난감을 만난 것처럼 그는 조금 기분이 들떠 있었다. 곧 착륙을 준비한다는 멘트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한국 땅이 예전보다 조금 더 반가운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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