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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71화 (72/120)

71화

미라벨은 소피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앞에서 대공 얘기는 하지 말아 줬으면 해.”

미라벨의 부탁에 소피가 눈을 깜박였다. 묻고 싶은 게 한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미라벨은 소피의 궁금증을 외면하고서 말을 이었다.

“이유는 묻지 말고.”

담담하지만 슬픔이 묻어 있는 음성이었다. 소피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서 금빛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걸까?’

소피는 미라벨이 레나토에서 전에 잃은 생기를 되찾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분노와 사랑 중 후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라벨이 대공을 불편하게 여긴다면, 그녀를 움직이는 감정은 분노일지도 모른다.

소피는 미라벨이 왜 대공에게 화가 나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단순한 악감정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어쩌면.

‘혹시, 기억을 잃으셨던 동안에 여기에 계셨던 걸까?’

한 줄기 생각이 소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추측을 지웠다.

너무 멀리 나간 예측이다.

대공의 보좌관인 나시르는 미라벨이 행방불명된 사이에 레나토에 온 외부인은 대공비뿐이라고 했다.

그 여자는 일부 하녀들의 표현에 따르면 불길하고 음침했다고 한다. 어딜 봐도 미라벨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었다.

소피는 이내 찜찜한 상상을 지워 내고서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

“고맙긴요. 아, 물수건이 그새 미지근해졌네요. 다시 가져올게요.”

소피는 샤를의 이마에 얹어진 수건을 챙기고 욕실로 갔다. 미라벨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실은, 소피에게 리카르도와의 과거를 얘기할까 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가 갈수록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라벨이 대공비였다는 사실을, 그녀가 리카르도와 부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피의 반응이 염려스러웠다.

미라벨이 리카르도의 아이를 가질 만큼 그를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소피는 과연 뭐라고 할까.

물론 미라벨이 아르밀라였을 때 당했던 모욕을 말하면 소피는 당연히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반성하고 있으니 용서해 주자고 할지도 모른다. 소피는 마음이 약해 쉽게 잘 넘어가는 편이니까.

더군다나 소피는 샤를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만약 리카르도가 샤를의 아버지라는 걸 안다면, 그녀는 도리어 미라벨을 그에게 들이댈 수도 있다.

소피의 표현에 의하면 리카르도는 ‘제국 최고의 미혼남’이었으니까. 전형적인 귀족 영애인 소피는 결혼에 대한 낭만이 컸다. 사랑과 연애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지금의 미라벨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라라면 몰라도, 소피는 안 돼.’

미라벨은 샤를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며 생각했다.

소피의 죽은 동생인 사라는 맺고 끊는 게 명확했다. 그리고 연애 경험도 풍부해, 정략혼을 하게 된 미라벨에게 조언도 많이 해 주었다.

소피가 아닌 사라를 데리고 레나토에 오기로 한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사라는 이제 없다. 레나토의 눈보라와 마수가 그녀를 앗아 갔다.

미라벨은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며 창밖을 보았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달빛을 받은 정원이 하얗게 빛났다. 눈은 그쳤지만, 아직 봄이 오려면 멀어 보였다.

새하얀 이불을 덮은 풍경을 보고 있던 그녀의 귀에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어마…….”

“샤를?”

미라벨은 샤를에게 빠르게 반응하며 바짝 붙어 앉았다. 아이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대자, 가녀린 숨소리와 함께 얇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마아…… 샤를 아파요.”

“응, 이제 괜찮아. 엄마가 약 줄게. 약 먹으면 다 나을 거야.”

미라벨이 몸을 일으키자 마침 새 물수건을 가져온 소피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기요, 왕녀님.”

“고마워.”

미라벨은 소피에게 물컵을 건네받았다. 우고가 주고 간 물약을 탄 컵이었다.

미라벨은 샤를의 뒷머리를 살며시 받치고서 아이를 일으켰다.

“자, 착하지. 샤를. 이걸 마시렴. 그렇지.”

샤를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엄마가 주는 약을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다행히 약이 먹을 만한지, 투정은 부리지 않았다.

미라벨은 아이의 입가를 훔쳐 주고서 다시 눕혀 주었다. 그런 뒤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 주었다.

“푹 자. 엄마가 계속 옆에 있을게.”

“삼쵼은……?”

“삼촌? 아, 아실 삼촌? 아실 삼촌은 지금 세골린데에 있지. 삼촌이 보고 싶으면 수정구로 만나게 해 줄까?”

“우웅, 아니.”

샤를은 힘없이 도리질을 쳤다. 미라벨은 샤를을 다독이며 자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 줄까?”

“아실 삼쵼 말구. 느때 삼쵼…….”

“응?”

미라벨은 미간을 구겼다. 아이가 뭘 말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박였다.

“음……. 우리 샤를이 말하는 느때 삼촌이 누굴까? 엄마는 잘 모르겠네.”

“아실 삼쵼보다 키 크고, 무서운 삼쵼…….”

샤를의 설명에 미라벨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샤를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된 탓이었다.

샤를은 리카르도를 찾고 있었다.

미라벨은 말없이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발그레한 얼굴로 종알거렸다.

“느때, 늑때 삼쵼 어디 가써? 늑때 삼쵼이 샤를 안아 줘써. 삼쵼이 머리 만져 주니까 안 아파써.”

“……그랬어?”

“샤를 늑때 삼쵼 보고 싶어, 어마.”

“자고 나면 만나게 해 줄게. 지금은 늑대 삼촌도 자고 있을 거야.”

“웅…….”

미라벨의 토닥임에 샤를이 꿍얼대다가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할 때까지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라벨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소피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샤를 잠깐만 봐 줘.”

“그럴게요. 토끼털 외투를 가져다드릴까요?”

“아냐. 저택 안에만 좀 돌아다닐 거야.”

미라벨은 마지막으로 샤를을 한 번 더 눈에 담고서 방을 나섰다. 그녀는 방문을 닫고 나와 문에 기대어 섰다.

시선을 위로 올려 길게 한숨을 쉰 미라벨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샤를이 리카르도를 기억한다. 아이가, 그를 보고 싶어 한다.

가슴이 갑갑했다. 뒤로 팔짱을 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미라벨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서 턱을 당겼다.

정말로 내키진 않지만, 샤를이 리카르도를 만나길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 미라벨에게는 아이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나름대로 사랑을 쏟아 키웠는데도 샤를은 항상 애정을 갈구했다.

리카르도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심지어 그가 구해 주기까지 했으니, 샤를은 리카르도를 계속 찾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미라벨이 신은 슬리퍼가 부드럽게 복도를 스쳤다. 그녀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리카르도가 있는 곳을 향해서.

* * *

눈이 녹기 시작했다.

이 단순한 문장은 리카르도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동안 레나토의 주인으로서 그는 긴 겨울에 시달려 왔다. 추위가 사그라들고 눈이 녹는 건 그의 어깨에 앉은 짐이 덜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리카르도는 올해만큼은 추위의 기세가 등등하길 바랐다. 창문이 꽁꽁 얼고 벽난로에 땔감을 태워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도록 춥길 바랐다.

그래야 미라벨이 레나토를 떠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매정하게도 자연은 섭리대로 흘러갔다. 지난주에 정점을 찍었던 한파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고드름이 녹는 것이 신호였다.

그 탓에 무리한 수를 두었다.

미라벨이 떠나기 전에 아이를 보겠답시고, 사용인들까지 전부 물리는 얄팍하고도 조악한 수.

그리하여 리카르도는 샤를을 홀로 앓게 만들고 미라벨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후으…….”

리카르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도록 자신을 탓하였다.

이래서야 미라벨에게 할 말이 없다.

대체 무슨 낯으로 그녀를 보겠는가.

“대공.”

시선을 내린 채로 한참을 있던 리카르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이어서 들려오는 맑은 음성에 리카르도는 자리에서 튕겨 나왔다. 그는 거의 달리듯이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자, 그의 앞에 미라벨이 나타났다.

“식당에 갔더니 당신이 오늘 저녁은 거른다고 해서.”

“……응.”

리카르도는 대답을 하고서 황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형편없이 쉰 목소리가 튀어나와, 순간 당황했다.

미라벨 앞에서 이미 망가진 모습은 다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그걸 갱신한 것 같았다.

“같이…… 식사할까?”

“딱히 식사하면서 전할 용건이 아니라서요.”

미라벨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녀의 대답에 리카르도는 희미하게 웃었다.

미라벨이 밀어 냈다는 사실보다도, 그녀가 자신을 찾아와 줬다는 것에 마냥 기뻤다.

“들어와.”

리카르도는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차분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서던 미라벨이 멈칫했다.

집무실이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시선을 읽고서 바닥에 뒹구는 술병을 치웠다.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자주 마시는 건 아니야. 가끔씩만…….”

“샤를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해요.”

미라벨은 대뜸 본론을 꺼냈다. 그녀의 말에 리카르도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미라벨이 말을 이었다.

“당신을 ‘늑대 삼촌’이라고 부르더군요. 늑대처럼 무서운 사람이라고 경고했는데, 그게 별명처럼 되어 버렸나 봐요.”

“그런가.”

“딱 거기까지예요.”

미라벨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그녀는 선명한 보랏빛의 눈을 주시하며 경고하듯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허락하는 자리는, 딱 거기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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