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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70화 (71/120)

70화

미라벨은 마음을 졸이며 우고를 응시하였다. 의사의 이런 태도는 대개 나쁜 소식의 전조다. 샤를이 어딘가 많이 아프기라도 한 걸까.

우고는 입맛을 다시더니 진료 가방을 뒤적였다.

“당분간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꾸준히 산책도 하게 하시고요.”

“큰 병이라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또래보다 허약한 편이시군요.”

“난산이었거든. 저체중이었고.”

한숨 돌린 미라벨의 대답에 곁에 있던 리카르도의 몸이 굳었다.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미라벨은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갓 태어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건강해진 편이야.”

“앞으로 고열을 몇 번 더 앓으실 겁니다. 그 고비들만 잘 넘기시면 무리 없이 장성하실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왜 고열을 앓게 되는 거지?”

“고열은 몸 안에서 마력이 충돌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보통은 아르칸젤로인과 세골린데인의 혼혈인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인데, 왜 왕자님께서 이러시는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우고는 진료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 미라벨에게 건네주었다. 투병한 병에는 딸기색의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력의 순환을 돕는 약입니다. 깨어나시거든 물에 한 스푼을 타서 먹이십시오. 일주일간 식후에 꾸준히 먹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또 고열이 나거든 이 해열제와 같이 먹이시고요.”

우고는 또 다른 약병을 꺼내 미라벨에게 주었다. 오렌지색의 액체가 든 약병은 조금 전의 약병보다 약간 더 작았다. 미라벨은 약병을 소중히 챙기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마법으로 열을 내리신 덕에 위기를 넘겼으니, 금방 나으실 겁니다.”

우고는 예의 바르게 말하고서 진료 가방을 챙겼다. 그가 발터와 함께 방을 나서자, 리카르도가 미라벨에게서 약병을 받았다.

“여기 서랍에 넣어 놓을게.”

“네.”

미라벨은 힘없이 대답하고선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깊이 잠들어 있는 샤를에게 향해 있었다.

이제 좀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걱정했는데 자연스러운 증상이라니 다행이었다.

미라벨이 샤를에게서 눈을 거두지 않자, 리카르도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의원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곧 다 나을 거다. 그러니…….”

“다정한 말이네요. 당신답지 않게.”

미라벨의 덤덤한 대꾸에 리카르도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샤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변한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변한 건지.”

“난 변했어. 과거의 나는 잊어 줘.”

“과거의 대공이라…….”

미라벨은 피식 웃었다.

“하긴, 그 사람이었다면 우고를 일찌감치 죽였을 거야. 내가 임신했다는 걸 숨겼다고 화를 내며 죽였겠지.”

미라벨의 시선은 어느새 리카르도에게 향해 있었다. 베일 너머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짙은 빛을 띠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우고가 내 부탁대로 임신 사실을 숨겨 주었는데, 왜 여전히 그를 고용하고 있는 건가요? 정말로 변하기라도 했나요? 내가 아는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네가 기억하는 나는 어떤 사람이지?”

대답 대신 돌아온 질문에 미라벨은 당황하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게 중요해요?”

“나는 네가 기억하는 나를, 그때의 나를 원망해. 그래서 예전과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리카르도는 샤를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잠든 아이를 지켜보던 그가 문득 눈썹을 모았다.

“네가 기억하는 나는 형편없는 남편이겠지. 아이의 아버지가 될 자격조차도 없는.”

“…….”

“틀렸다는 게 아니야. 다만, 나는 달라졌어. 아니, 그러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오늘 왜 저택에 하인들이 없는 거죠?”

미라벨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 주제로 대화를 계속하다가는 그에게 휘말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도가 전과 달라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게 가식이 아니라는 것도 얼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변화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믿을 수 없었다.

과거에 미라벨이 봤던 리카르도의 모습은 그의 본성이었다.

잔인하고, 냉혹하며, 사람의 속을 후벼 파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남자. 그게 리카르도 비토레였다.

그때의 리카르도는 지금의 그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건 내가…….”

지금처럼, 미라벨의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은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당신이 뭘요?”

미라벨의 질문에 리카르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샤를을 뚫어지게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저택에 하인이 없는 건 내가 오늘 일부러 본관의 사용인들을 다 치워서다.”

“왜 그랬는데요?”

“아이를 보고 싶었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 대화에 미라벨은 옅은 짜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 있게 말해 봐요. 그거랑 사용인을 치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아이를 만난 걸 목격한 사람이 없게 하려고 그랬어.”

“……뭐?”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된 미라벨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거칠게 베일을 벗고서 리카르도를 쏘아보았다.

“고작 당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그런 수작을 부렸다고? 하녀만 부를 수 있었어도, 샤를을 혼자 두고 방을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미안해. 아이가 아플 줄 몰랐어.”

“내게 사과할 일을 더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미라벨은 싸늘하게 말했다. 언성을 높이고 싶었으나, 곁에서 샤를이 잠자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속삭이듯이 작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잠시나마 당신에게 고마워했던 게 바보 같아.”

“미라벨…….”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극단적이지. 아,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긴 하네요.”

미라벨은 차게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는 리카르도에게 신랄하게 말했다.

“그새 아주 뻔뻔해지셨어요, 대공 전하. 노력하는 중이라고요? 이게 당신의 노력인가요? 자기 뜻대로 모든 걸 주무르는 게?”

“다시는 안 이럴게.”

리카르도는 미라벨의 음성이 떨리자 눈을 들어 올렸다. 그는 분노에 찬 그녀의 시선에 괴로운 표정으로 호소했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이제 눈이 녹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네가 언제 떠나 버릴지 몰라서…….”

“지긋지긋해.”

서늘한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미라벨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뒤늦게 사과하는 것도 모두 다 지긋지긋해요.”

미라벨은 손을 들어 올려 문을 가리켰다. 그녀는 리카르도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이딴 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마요.”

리카르도는 말없이 미라벨을 응시했다. 미라벨은 그의 시선에 거북함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애처롭게 바라본들, 그를 용서할 순 없다.

아이가 아플 때 도움을 구할 이를 찾아서 온 건물을 헤맬 때의 막막함을 그는 모른다.

그걸 알았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

건물이 텅 빈 사이에 샤를의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대체 어떤 사달이 났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내게 아이를 만나게 해 달라고 다시 부탁을 하지 그랬어요. 뒤에서 이딴 짓을 벌이는 것보단 그게 나았을 텐데.”

미라벨은 시리도록 찬 눈빛으로 리카르도를 쏘아보았다. 원망이 가득한 시선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리카르도는 샤를을 애타는 눈으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게. 네가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주치의를 옆방에 머무르게 하겠어. 그리고 본관의 사용인들에게 일러서 녹색 방의 호출에 5분 내로 답하게 하지.”

미라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를 외면했다.

리카르도는 미라벨이 눈을 돌리자 몸을 돌렸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그녀의 냉기는 녹지 않았다.

리카르도가 서 있던 자리를 보는 푸른 눈이 차가운 겨울 하늘의 빛을 띠었다.

* * *

루체와 함께 온실에서 돌아온 소피는 저녁도 안 먹고 잠든 샤를을 보고 의아해했다.

샤를이 열이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실 왕자님도 곁에 안 계시는데 진짜 큰일 날 뻔했네요. 대공 전하께서 계셨기에 망정이죠.”

“……그러게.”

미라벨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잠든 샤를의 가슴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소피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대공 전하께서 뭔가 잘못이라도 하셨어요? 왕자님 열을 내려 주셨다면서요.”

“그건 그런데…….”

미라벨은 말끝을 흐렸다. 소피는 그녀와 대공 사이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소피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단순한 오해라면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어차피 레나토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소피가 둘 사이를 이어 주는 데 적극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미라벨이 연애를 하길 바라는 소피는 틈만 나면 리카르도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칭송에 가까운 칭찬을 늘어놓으며 미라벨의 반응을 살폈다.

미라벨은 소피의 이런 태도가 난감했다. 보통 시녀라면 대충 응하고 말 텐데,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소피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소피는 묘하게 예리한 구석이 있어 얼버무리기도 어려웠다.

“대공 전하가 불편하신 거예요?”

지금도 그랬다. 소피는 미라벨의 표정을 바로 읽고서 직구를 던졌다.

날카로운 질문에 샤를을 다독이던 미라벨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몸을 틀어 소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크게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실은 그래.”

“예전에 약혼했던 사이라서요?”

고개를 끄덕인 미라벨은 소피의 손을 잡아끌어 쥐었다.

심상치 않은 행동에 소피가 자세를 바로 하였다. 미라벨은 목소리를 낮추고서 입을 열었다.

“나 소피에게 부탁이 있어. 들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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